2020. 11. 12. 큐티
로마서 4:1 ~ 8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다윗
관찰 :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1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 여기서 “육신으로”는 유대인들과 같이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추구하는 자리에 서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는 후대에 형성된 율법을 통해서 판단할 수 있는 조건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겨주셨다. 그것은 율법을 넘어서서 판단해야 하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발견했고, 그것을 통해서 율법의 본질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있다.
-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 때에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행위로 의롭다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자랑할 근거가 없었다. 그것은 더욱 하나님 앞에서 그러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는 모세의 율법적 요구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할례가 있었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있었다.
-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 여기신 근거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실 것을 믿었던 것,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죽여서 바치더라도 죽은 이삭을 살리실 것을 믿는 부활 신앙을 믿음으로 드린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렇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고, 그것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우선하는 것이었다.
2) 죄 사함을 받은 기쁨을 고백한 다윗
- 4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 행위로 의롭다함을 주장하는 자의 주장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사도 바울은 본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일한 것을 삯으로 받는 것이 당연하듯이, 자신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받는 자들은 그것이 보수를 받는 것과 같이 여겨져서 은혜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다. 아무리 착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하더라도 자신의 공로로 의를 얻게 된다면, 다른 사람과 비교가 발생하게 되고, 자신이 한 공로, 업적보다 못한 자들에 비해 자신이 얻은 의의 크기를 비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가치와 의미를 파악하는 가운데 그렇게 사람의 공로로 주어지는 차원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 5절.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율법의 요구에 부합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하신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의에 이르지 못하다는 것을 이미 변증했기에 다룰 수 있는 내용이다. 또한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요구에 최선을 다해보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도 바울이기에 증언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 6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 자기 자신의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은혜에 거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언급한 다윗의 고백을 예로 들고자 한다. 자신의 주장이 근거없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고, 신앙의 천재 다윗이 이미 깨닫고 주님께 고백했던 바라는 것을 통해서 변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 7절.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자 하는 다윗의 고백은 시편 32:1 ~ 5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이다. 사도 바울은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보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함으로 그 죄가 가려지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는 은혜를 거론하고 있다.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얻는 것이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받게 되는 것보다 큰 복이고, 그 길이 옳더라는 것이다.
- 8절.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사도 바울이 이신칭의(以信称義) 교리를 이끌어 내는 근거가 바로 다윗의 이러한 고백에서 비롯되고 있다. 다윗은 본래적 의인도 아니었고, 오히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회개함으로 나아갔던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죄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은혜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지는 것이 참된 복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프로세스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이끌어 내고 있다.
가르침 :
1) 사도 바울은 구약의 깊은 지식을 동원하여 믿음의 본질,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것의 핵심을 정리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근거로 끌어내고 있는 인물은 아브라함과 다윗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유대인 그 누구라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의로움을 폄훼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믿음의 근거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증거하는 것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한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있다.
2) 아브라함은 율법이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기 전의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가치로 다루어져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 의미는 율법을 넘어서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된 근거가 율법적인 행위에 말미암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율법 이전의 사람이기에 부연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근거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궁극적으로 이삭이 죽어도 살리실 것이라는 부활 신앙을 소유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그를 의롭다 여겨주셨다. 그렇기에 율법을 준행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말미암는 의보다 우선하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3) 다윗의 신앙과 그의 의로움에 대해서는 유대인에게 부연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윗 역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르고 우리아를 살인교사하는 끔찍한 죄를 지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을 믿은 다윗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 죄를 씻어주시고, 죄가 없다고 여겨주셨다. 그리고 다윗을 의롭게 여겨주셨다. 율법에 분명히 금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한 다윗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셨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다른 핑계나 다른 논리를 전개할 힘을 잃게 되는 근거가 되는 말씀이다.
4) 사도 바울은 구약의 핵심을 끌어와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끌어내고 있다. 참으로 구약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뚫렸기 때문에 다다르게 된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이 참으로 구약을 근거로 주어진 것임을 철저히 깨달았고, 그것을 깊고 깊게 묵상하는 가운데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적용 :
1)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것은 인생의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칭의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내 행위나 인과율에 지배받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철저한 신뢰로 말미암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내 죄가 사해지는 것에 대한 믿음과 그 죄를 씻어주실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믿는 믿음과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선하신 결과로 인도하실 것에 대한 믿음을 주님께 내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 내가 열심을 내어 기가막힌 결과를 내는 것보다 언제나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공로를 보시지 않으시고 믿음을 보시는 분이시다.
2) 미얀마 양곤에서 코로나 19의 상황에서 날마다 마음이 엎치락 뒤치락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구사해야 하는 믿음이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것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아닌 주님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서 중요한 일이다. 꼭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뤄져서 성공하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다. 실패하고 쫄딱 망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고자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 다음에 있을 일들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선하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 성공과 실패보다 중요하다.
3) 주님께 믿음을 더 공급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하겠다. 기도의 자리에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가 예수님이시다. 그렇기에 나의 믿음이 부족함을 고백하고, 믿음을 공급해 주시길 간구할 때, 주님께서 믿음을 채워주실 것이다. 크신 주님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