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여호와는 나의 구원자
성경본문 : 시편 27: 1-14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
읽으며 묵상하며 : 여호와는 나의 구원자(27:1-14)
다윗처럼 파란만장 한 삶을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일찍이 베들레헴의 목동에서 출발하여 왕이 되기까지 한 마디로 역경 그 자체였습니다. 다윗의 일생을 보면서 성공이라는 결과 뒤에는 항상 시련이라는 고통이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가 찾아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지만 이것이 다윗에게 있어서 반드시 행복만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때부터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형들을 찾아 갔다가 골리앗을 물리친 일을 시작으로 사울왕의 악사가 되어 군대장관이 되기까지 누가 보면 순탄한 성공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 뒷면에는 여전히 역경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환호하는 순간에도 다윗의 목을 겨누는 시퍼런 칼날이 있었습니다. 왕권에 대한 위기를 느낀 사울왕은 다윗을 여러 차례 죽이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충성스런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을 떠나 도피와 망명생활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미친 짓을 하면서 목숨을 유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적국인 블레셋의 부하 노릇까지 해야만 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평탄한 생활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또 다시 망명의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잃고 통곡하며 가슴 아픈 경험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성공하기까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이 그 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시 27:1~2)
한마디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들에게만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마 7:8, 11) 다윗도 역경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7절 이하의 말씀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이든지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봄철에 우리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데는 반드시 시련과 역경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맙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과 구원자로 우리 곁에 항상 계실 것입니다. 오늘도 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힘찬 하루를 시작합시다
****************************************************************************************************
살며 생각하며 :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 혼선을 빚어서 결국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한 분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아마 서로의 의견 충돌로 세상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채 혼돈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후 ·보시니 참 좋았더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마음 열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면서 가장 감탄하게 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한걸음 더 : 천문학자 케플러
천문학자 케플러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천문학을 연구하는 한 친구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인데 늘 이렇게 주장했다. “태양계란 그 자체의 힘으로 생성된 것이고 또 그렇게 유지되는 것이야. 누가 만든 것이 아니야.”
케플러는 그 친구에게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만드셨음을 알게 해주고자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양계를 일정한 비율로 축소하여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별들이 빛을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만들어서 그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친구는 매우 감탄을 했다.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나?”
“아무도 만들지 않았네. 자기 힘으로 생겨나서 자기 힘으로 도는 것일세.”
“뭐야? 어서 말해봐! 어떻게 만든 사람이 없이 저절로 만들어지고 돈단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나!”
“이 친구야! 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장난감도 만든 사람이 있다면 이 거대한 우주 만물이 창조주가 없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 있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천문학자 케플러는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했나요?
말씀 속으로 : 창세기 1장 1, 26-28 / 시편 139편 1-12절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시편 139: 1-12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서 인간은 어떻게 지음 받았나요?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이것에 대해 시편기자는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나요?
삶 속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나에 대해 다 아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은 평안함과 담대함으로 받아들여 질수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두려움일수도 있습니다. 이 차이는 왜 생길까요? 나는 어느 쪽에서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나요?
세상 속으로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어떤 방법, 어떤 모습으로 증거할 수 있나요?
출처 :울산중앙교회 권태현 목사
***************************************************************************************************
질문하며 적용하며
1. 다윗이 환난 중에도 담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27:1-6)?
2. ‘안연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27:3)?
3.다윗이 구원을 확신하면서도 반복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27:7)?
4. 다윗이 부모와 여호와 하나님을 극단적인 대조법으로 비교한 의도는 무엇입니까(27:10)?
****************************************************************************************************
확신하며 간구하며
빛과 사랑이신 하나님
세상을 사는데 우선순위기 있음을 알게 하시고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이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것에 인생의 가치를 두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구현하는데
이 자녀의 인생을 바치게 하소서
세상의 명예와 부와 권세에 탐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건설하는 일에 앞장 서게 하소서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가지 말게 하시고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택을 하게 하소서
세상의 어려움과 손해에 연연해 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복을 기대하면서
이 세상에 사랑과 정의로 헌신하게 하소서
당장의 눈 앞의 자신의 이익보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치를 바라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2) 찰스 스펄전
시편 27 편
[개 요]
주제-이 시가 기록된 때와 관련하여 머리말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다윗의 시”라는 머리말은 많은 시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 노래의 제재로부터 판단해 본다면, 기자는 대적들에게 쫓김을 당하고 있었고(2, 3절), 여호와의 집 바깥으로 쫓겨난 상태였으며(4절), 부모와도 이별하였고(10절), 또한 위증자에게 시달리고 있었다(12절). 이 모든 상황은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다윗을 대적하는 말을 하였던 때와 부합하지 않는가? 이것은 유쾌한 희망의 노래로서, 시련 속에서 전능자의 팔에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 자들에게 꼭맞는 내용이다. 이 시는, 다윗과 교회와 주 예수의 표현을 삼중적으로 각각 생각하면서 읽을 때, 더욱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성경의 완전성이 보다 현격하게 드러날 것이다.
구성-이 시편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절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확신.
4-6절 그분과의 교제를 사모하는 마음을 토로함.
7-12절 기도에 전념함.
13, 14절자신의 경우에 믿음의 지탱시키는 능력이 어떠한지를 인정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르도록 권고함.
[강 해]
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여기에 개인적인 관심사가 나타난다. “나의 빛”, “나의 구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러하다. 영혼이 그 점을 확신하고 있으며, 따라서 담대하게 선언한다. “나의 빛.” 신생한 상태에 있는 영혼 속에 구원의 전조로서의 신령한 빛이 가득 비추인다. 만일 우리 자신의 어둠을 보기에 충분하고 주 예수를 사모하기에 충분한 빛이 없다면, 구원의 증거도 없다. 구원은 어둠 속에서 우리를 찾아내지만, 우리를 거기 남겨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제공한다. 회심 후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 위로, 인도, 선생이시며 또한 모든 의미에서 우리의 빛이 되신다. 그는 우리 내부의 빛이요, 우리 주위를 밝히는 빛이요, 우리에게서 반사되는 빛이며, 우리에게 계시되는 빛이시다. 주께서 단지 빛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빛이시라”고 표현된 점에 주목하라. 또한 그는 구원을 베푸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구원이시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모든 언약적 축복들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모든 빛이 햇빛인 것은 아니지만, 태양은 모든 빛들의 아버지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추론되는 요지는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질문 형태로 언급되고 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 질문은 그 자체가 대답이 된다. 어둠의 권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빛이신 주께서 그것을 멸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지옥의 저주를 무서워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의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만한 골리앗의 도전과는 판이하다. 그 이유인즉 그것이 매우 다른 기초 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변덕스러운 육신의 팔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전능자의 실제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는 강한 어투의 세번째 형용 어구에 해당하며, 기자의 소망이 부숴질 수 없는 삼중의 끈에 의해 단단히 매이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주께서 은혜의 행사를 아낌없이 베푸시는 경우에 우리가 거듭 찬양을 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생명은 그것을 만드신 분으로부터 그 모든 힘을 공급받는다. 그리고 만일 그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자 계획하시면, 우리는 대적의 어떠한 음모에 의해서도 쇠약해질 수 없다.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 담대한 물음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본 것이기도 하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현재에든 다가올 장래에든지 간에 누가 나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2절.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이 구절은 과거의 구원을 기록하고 있으며, 시련의 때에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경험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각 단어가 교훈적이다.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많으며, 그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은 해악을 초래하며 증오심으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행악자가.” 행악자가 우리를 미워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소망스러운 표시이다. 만일 우리의 대적들이 경건한 자들이라면 그것은 쓰라린 슬픔이 될 것이지만, 행악자들의 사랑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증오가 더 낫다.
“내 살을 먹으려고.” 마치 식인종들처럼 그들은 끝장을 내려고 하며, 그 사지를 찢고, 자신의 악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축제를 벌인다. 우리 영혼의 대적들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으며, 도무지 관대함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아야 직성이 풀린다. 다윗이 어떤 위험에 처해 있었는지 보라. 그는 강하고 잔인한 수많은 대적들의 손아귀 안에 있었지만, 자신의 완벽한 안전과 그들의 전적 실패를 주시하였다.
“내게로 왔다가.” 그들은 공격하여, 마치 사자가 먹이에게 달려들듯이 희생물을 덮친다.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하나님의 입김이 그들의 다리를 넘어뜨리셨다. 길에는 그들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한 돌들이 놓여 있었고, 그들은 이 돌들 위로 수치스럽게 넘어졌다. 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이 문자 그대로 보여주신 사실이다. 그때 그를 붙잡으러 왔던 자들이 뒤로 넘어졌다. 여기서 그는, 믿음의 능력으로 무릎을 일으켜 대적들을 면전에서 내던질, 고투 중인 모든 신자들을 예표하신 셈이다.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아직 전투가 수행되지 않는 동안, 실제적인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사의 마음은 긴장에 사로잡혀 두근거리기 쉽다. 똑같은 군대라도 진을 친 채 대치 상태에 있는 군대는 실제적 충돌 상태에 있는 군대보다 흔히 더 큰 공포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는 영의 다음과 같은 언급과도 일맥 상통한다-“한 사람을 두려워한 나머지 천 명이 죽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의심의 여지 없이 예상되는 재난의 그림자가, 소심한 사람에게는 재난 그 자체보다 더 심한 슬픔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믿음은 용기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며, 두려움의 잔에 남은 잔재들을 창문 밖으로 집어던진다.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실제로 창이 찌를지라도, 믿음의 방패가 그것을 막을 것이며, 설령 첫번째 가벼운 충돌이 단지 전쟁의 시작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대적과는 상관 없이 믿음의 깃발들이 나부낄 것이다. 비록 전투가 계속 발생하고 싸움이 거듭 이어진다고 해도, 신자는 오래도록 지속되는 전투로 인해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3절은 2절로부터 자연스럽고도 논리적으로 추론된 내용이다. 확신은 경험에서 생긴다. 여러분은 큰 위험으로부터 구원받은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기를 세우고서 야영용 횃불을 피워놓고 기다리라. 그리고 대적으로 하여금 제 마음껏 해보라고 하라.
4.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우리가 단번에 얻을 수 없는 것을 청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에 의해 우리를 즐겨 판단하신다. 절름발이 말을 탄 사람은, 만일 그가 최선을 다해 서둘러 간다면, 그리고 가능한 한 더 빨리 가려고 노력한다면, 속력이 느리다는 이유로 자기 주인에게 비난을 받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실행에 옮기려는 당신의 자녀들의 뜻을 귀하게 여기신다.
“여호와께.” 이분은 우리의 소원을 아뢰기 위한 올바른 대상이시며, 우리의 두레박을 내려뜨릴 우물이요, 두드릴 문이며, 또한 우리의 돈을 찾을 은행이 되신다. 사람들에게 청하라, 그리하면 나사로와 함께 거름더미 위에 던져질 것이다. 반면에 여호와께 청하면, 천사들에 의해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질 것이다. 여호와를 향한 우리의 요청은 성결하고, 겸손하며, 지속적이고, 순종적이며, 열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바람이 하나의 덩어리로 결합된다면, 시편 기자의 경우처럼 잘 되어질 것이다. 다윗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볼 때, 우리는 그가 휴식과 안정 그리고 다른 수많은 좋은 일들을 소원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진주와 같이 고귀한 대상에 고정시켰으며, 휴식을 뒤로 미루었다.
“한 가지 일.” 분산된 목표들은 혼란과 쇠약함과 실망을 야기시키는 경향이 있다. 한 가지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며, 한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우리의 모든 애정이 단 하나의 대상에로 결집되게 하며, 그 애착이 하늘에 속한 것들에 고정되게 하자.
“그것을 구하리니.” 거룩한 소원은 단호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옛 격언에 이르기를, “희망과 소원만을 지니고 있는 자는 결코 알뜰한 살림꾼이 아니다” 혹은 “바람만으로는 결코 자루를 채우지 못한다”라고 한다. 소원이란 행동이라는 좋은 토양에 뿌려져야 하는 씨앗이다. 왜냐하면 소원만으로는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일 실천적인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소원이 마치 비 없는 구름과 같음을 발견할 것이다.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왕되신 여호와와 교제를 나누기 위해, 다윗은 항상 그 궁전에 거하기를 갈망했다. 성막 봉사로 인해 지치기는커녕, 그는 줄곧 그 일에 종사하기를 소원했으며 그것을 일생의 낙으로 여겼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식구 중 하나, 곧 하나님의 집에서 태어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자녀가 되기를 갈망했다. 이는 우리가 가장 사모하는 소원이기도 하며, 우리는 그것을 영속적인 삶의 날들에까지 확대한다. 물론 이러한 삶이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다. 우리는 위에 있는 아버지의 집, 곧 우리 영혼의 가정을 사모한다. 만일 우리가 그곳에 영원히 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보잘것없는 이생의 삶의 행복과 불행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황금 성 예루살렘”은 우리의 마음이 갈망하는 유일한 목표이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지상과 천상의 예배자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우리는 단지 목회자를 보거나 그에게 보이기 위해 혹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성도들의 모임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의인의 모임에 함께 모이는 것은, 자애로우신 아버지와 영화로우신 예수 그리고 신비로우신 성령을 더 많이 알게 됨으로써 영광스러우신 우리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며 더욱 경건하게 받들기 위함이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무슨 말인가? 그것을 생각해 보라! 믿음을 통해 그것을 바라보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신실한 자들이 “아름다우신 왕”을 보게 될 때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겠는가! 그것은 무한히 복된 광경이라 할 것이다.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우리는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들의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 회개하는 죄인들뿐만 아니라 확신을 지닌 성도들도 그곳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지를 사모해야 한다. 또한 천성에 대한 관심과 그곳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는 방법을 문의해야 한다. 하늘나라에서는 문의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우리가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우리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에 관해 알 수 있는 우리의 모든 역량을 일깨워야 한다.
5절.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이 구절은 시인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는 열망을 지닌 두드러진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인즉, 그가 위험한 때에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난 날에,” 그 곤란한 때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버리는 때에, 그가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숨기실” 것이다. 최악의 위험에 처했을 때 그가 내게 최선의 피난처를 제공하실 것이다. 왕의 초막이 진 중앙에 세워졌고, 그 주위로 모든 강한 용사들이 항상 둘러서서 지켰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굳건히 존속되는 그 신성한 주권 안에서, 신자는 평안히 숨되, 스스로 몰래 숨는 것이 아니라 자상하게 돌보시는 왕에 의해 피난처를 제공받는다.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희생 제사가 하나님의 주권을 도와 선민을 해악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구약 시대에는 위반 시 죽음이라는 형벌이 따랐던 까닭에 지성소에 감히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만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그곳에 숨기셨다면, 어떤 대적이 감히 그들을 괴롭히려 하겠는가?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여기서 불변성과 영원성 그리고 무한하신 능력이 하나님의 주권과 희생 제사에 힘을 보탠다. 하나님 당신에 의해 대적들 위에 높이 들리움을 받고, 결코 침해를 받지 않는 난공불락의 바위 위에 높이 들리움을 받는 사람의 위치는 그 얼마나 복된가! 우리가 자기 백성을 그토록 효과적으로 지켜주시는 여호와와 함께 거하기를 사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6절.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그는 이 사실을 분명히 확신한다. 구약 시대의 경건한 자들은 믿음으로 기도했고,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며, 기도 응답이 확실할 것이라고 믿었다. 다윗은 자신을 에워싸는 모든 자들에 대해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둘 것을 믿음을 통해 확신했기 때문에, 모든 대적들이 자기 앞에 엎드러질 때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준비란 감사를 통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는 전투 중에도, 승리의 개선 때에 감사의 기쁨을 표현할 곳을 내다본다. 그는 자기 왕궁에서 베풀어질 축제에 대해 혹은 연회장에서의 잔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신령한 구원과 어울리는 거룩한 환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노래하여.” 이는 감사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 양식이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러한 맹세는 반복을 통해 강조되며, 여호와께 모든 찬양을 돌려 드리겠다는 맹세로써 설명된다. 침묵할 자는 그렇게 하게 하더라도, 신자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때 찬양을 드리는 것이 당연하며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세상의 헛된 일들을 노래할 자들은 그렇게 하게 하더라도, 신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노래를 남겨둔다.
7.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10.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7절.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영성의 진자(振子)는 기도와 찬양 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앞절에서의 노래 소리가 여기서는 부르짖음으로 바뀐다. 다윗은 훌륭한 군사로서 자신의 무기들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기도”의 무기를 지니고서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뇌에 찬 그의 부르짖음에 주목해 보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한, 혹은 과시적인 헌신을 통해 자신의 자만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한, 주께서 과연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실까 하는 것은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하지만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여호와께서 어떻게 들으실까 하는 것만이 고려 대상일 뿐이다. 이 ‘소리’는 개인적인 기도에서도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필수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것은 유익하며, 주의산만을 막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긍휼은 죄인들의 희망이며 성도들의 피난처이다. 용인될 수 있는 모든 간구자들은 이러한 속성에 크게 유의한다. “응답하소서.” 우리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있으며, 만일 우리가 중요한 사업차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도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을 경우에 응당 여유를 가져야 하는 정도 이상으로 태평스럽게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만일 우리 자신의 음성을 주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고자 주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알프스 산맥의 바위들이 농부의 뿔나팔 소리를 아름다운 음률로 메아리치게 하듯이, 진실한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반영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인즉, “내 얼굴을 찾으라”는 명령은 복수형으로서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것을 단수형으로 받아 개별적 적용을 암시하였다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여호와의 음성은 다른 모든 음성들이 수그러드는 상황에서, 곧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더욱 효력을 발휘한다. 그때 내 “마음”이, 즉 나의 내밀한 성품이 움직여 순종의 반응을 보인다. 그 반응의 신속성에 주목하라. 말씀을 듣자마자 실행에 옮겼다. 하나님이 “찾으라”고 말씀하시자마자, “내가 찾으리이다”라는 대답이 뒤따랐다. 이처럼 거룩한 신속성을 더욱 함양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에 더욱 민감해지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 더욱 예민해지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9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멀리”(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임-역자 주)라는 말은 원문에는 없으며, 역자들에 의해 불필요하게 첨가된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얼굴이 조금만 숨겨져도 신자에게는 커다란 곤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자신을 숨기심으로써 그 얼굴을 찾는 자들로 하여금 당신과 만나지 못하게 하셨다면, 여호와의 얼굴을 찾으라는 말은 고통스러운 명령일 것이다. 여호와의 미소는 가장 큰 위로가 되며, 그분의 찌푸리신 얼굴은 최악의 불행이 된다.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다른 종들은 불신실함이 입증되었을 때 내버림을 당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의 전임자인 사울이 그러했으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여러 가지 결점들을 자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오래 참으심을 통해 계속 자신을 돌보아 주실 것을 갈망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자각할 때에도 이것은 가장 적절한 기도이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선언에 얼마 만큼이나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겠는가? 여러 해 동안, 갖가지 시련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 하나님에 의해 지탱되어 왔으며,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고백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배은망덕은 타락한 인간에게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영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부자연스럽고 혐오스럽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이는 거듭 묵상될 가치가 있는 귀한 제목이다.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이는 장래를 위한 기도이자, 과거로부터 얻은 추론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를 떠날 작정이셨다면, 왜 애당초 우리와 함께하셨겠는가? 만일 이제 영혼이 내버림을 당한다면, 때늦은 도움은 단지 헛수고일 뿐이다. “나를 버리지 말고”라는 첫번째 간구는 일시적인 유기를, 그리고 두번째 간구는 최종적으로 은혜를 거두어가심을 각각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둘 다 우리에게 일어나지 말도록 기도해야 할 사항이다. 또한 두번째와 관련하여, 우리에게는 강조되어야 할 불변의 약속들이 있다.
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이토록 친밀한 관계마저 최종적으로 나를 버릴 것이지만, 설사 인간의 가슴에 애정이라고 하는 젖이 메말라버린다고 하더라도, 결코 잊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계신다. 가장 위대한 성도들 중에는 자기 가족에게서 쫓겨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들도 있다.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는 나의 변론을 지지하실 것이며, 재난들로부터 나를 건져올리실 것이며, 나를 자기 팔로 안으실 것이고, 나를 대적들 위에 높이실 것이며, 마침내 나를 그분의 영원한 처소로 받아들이실 것이다.
11절.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그는 자기 자신의 길에 몰두하게 되기를 간청한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여호와가 걷게 하시는 길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기도는 개인적인 무지, 영혼의 위대한 학습 능력, 그리고 흔쾌한 마음의 순종 등에 대한 겸손한 자각을 시사한다.
“내 원수를 인하여.” 이러한 원수들은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지만, 분명하고 단순한 솔직성을 지닌 자의 길은 그들의 분노로부터 벗어나 있다. 정직한 단순성이 어떻게 사악한 자들의 술책을 좌절시키고 압도하는지를 목도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진리는 지혜이다.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다.”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여기서는 방향뿐만 아니라 도움을 간구하고 있다. 우리는 지도뿐만 아니라, 여정 중에 우리를 도와줄 안내자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요망되는 길은 공공연하고 정직하며 평탄한 길로서, 복잡하게 얽히고 비뚤어지고 위험한 길, 곧 간교한 길과 반대된다. 선한 사람들은 그럴싸한 투기와 의혹스러운 과정에 대해서는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천국의 상속자에게는 솔직한 단순성이 최상의 정신 상태이다. 부정직한 속임수와 정치적 편의 추구는 세상 시민들에게 돌려주자. 솔직한 사람들만이 새 예루살렘 시민의 자격을 갖고 있다. 에서는 간교한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장막에 거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12절.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만일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시면, 나는 마치 사자에게 던져진 희생물같이 되어 산산이 찢겨 완전히 삼킴을 당하고 말 것이다. 우리의 대적들이 자기 방식대로 우리를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혹은 스미스필드(식육 시장으로 유명한 런던시의 한 지구, 여기서는 살육의 장소를 상징적으로 나타냄-역자 주)가 조만간 다시금 화염에 휩싸일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위증자와······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중상은 지옥의 병기고로부터 끄집어낸 구형 무기이며, 아직도 두루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를 중상할 것이다. “개를 잡으려면 그 개가 미쳤다고 하라”(‘악명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한 번 낙인찍히면 끝장이다’는 뜻의 속담-역자 주).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호와의 백성은 개들이 아니며, 그들에게 붙여진 악명이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않는다.
“악을 토하는 자.” 그들은 치명적인 독설로써 의인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한다. 그들은 말할 때마다 저주를 토해낸다. 회심 전의 바울이 그러했다. 악을 토하는 자들이 지옥에 떨어져 저주를 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원래 모습이다. 핍박자들은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13.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13절.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영어 원문상의 표현은, ‘내가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 나는 실망했을 것이다’이다-역자 주.) 흔히 낙심은 허약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심지어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조차 낙심의 공격 앞에서 무릎을 꿇기도 했다. 믿음은 강심제를 영혼의 입 속에 넣어주며, 낙심을 막는 역할을 한다. 소망은 현재의 슬픔을 진정시키는 천상의 묘약이다. 죽어가는 자의 땅에서 산 자의 땅에서 누릴 공정한 몫을 고대하고 열망하는 것은 우리의 축복이다. 산 자의 땅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사악함을 몰아내시고, 거룩한 영들이, 그들간의 교제를 통해, 사람들 중에서 중상과 경멸을 당한 핍박받은 성도들을 매료시킨다. 우리는 보기 위해 믿어야 하며, 믿기 위해 보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해진 때를 기다려야 하며, 주님의 영원하신 선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써 우리 영혼의 굶주림을 달래어야 한다. 그 선하심은 조만간 우리의 잔치와 노래가 될 것이다.
14.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14절.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그의 문에서 기도로써 바랄지어다. 그의 발치에서 겸손하게 바랄지어다. 그의 상에서 봉사로써 기다릴지어다. 그의 창문에서 기대로써 기다릴지어다. 종종 탄원자들은 오랫동안 아첨하며 기다린 후에도 세상의 후원자들로부터 냉담한 반응만 얻을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후원자가 하늘에 계시는 자는 최대한 빨리 해결함을 받을 수 있다.
“강하고 담대하며.” 이는 군인의 좌우명이다.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며, 만일 우리가 왕이신 예수의 군사들이라면 우리가 필히 그것을 발휘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리하면 그가 너희 마음을 강하게 하실 것이다”(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임-역자 주). 그는 약한 부위에다 곧바로 회반죽을 칠하실 수 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그리하면 전인이 능력으로 채워질 것이다. 강한 마음이 팔을 강하게 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마음에 주시는 이 능력은 어떤 것인가? “순교자들에 관한 책”을 읽어보라. 그 영광스럽고 용감한 행위들을 보라.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러한 힘을 얻으라.
“내가 말하거니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임-역자 주.)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내가 말하거니와”라는 말을 통해 다윗은 자신의 시 내용을 개인적으로 보증하고 있다. 그 내용인즉 그가 영감받은 사람으로서 감동 상태에서 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증거이다. 사실 이 간략한 내용을 쓰는 자신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너무도 감미롭고 활력적이며 유익한 나머지,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것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말하거니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라벤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