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떠오르는 일들
나이 드니 뜬금없이 옛날 일이 떠오르곤 한다. 건설회사 시절 정순태란 실장이 있었다. 그는 광주 학동, 서동, 진월동 아파트 현장 책임자로 광주 사업본부장이었다. 그런데 진월동 아파트 부지 매입에 의혹이 많았다. 원래 부지 매입은 말이 많다. 아파트 부지는 보통 몇 천평이라, 본부장이 그걸 매입하려면 수많은 땅 임자를 만나는데, 땅은 위치 따라 가격 다르다. 주민들은 판다 안 판다, 싸다 비싸다 말이 많고, 걸핏하면 민원 제기하여 물고 늘어진다. 보통 강심장 아니면 책임자는 부지 매입에 애간장이 녹아 골병이 들기 마련인데, 정실장 이 친구는 부지 매입을 금방 90% 끝냈다고 보고했으니, 그게 문제였다. 뭔가 해먹은 거 같다는 것이 중역들 생각이었다. 필지는 같은 필지라도 초기 매입 필지와 후기 매입 필지 가격이 다르다. 땅 주인이 사업 진척에 따라 값을 달리 부르기 때문이다. 그래 가격은 들쑥날쑥 제맘대로 지불된다. 정실장은 그동안 본사 올라오면, 직속 상무보다 먼저 사장실에 들러 사장과 얼굴 맞대고 뭔가 쑥덕쑥덕한 일이 많았다. 그러니 정실장과 사장이 진월동에서 해 먹었단 이상한 소문이 사내에 돌기 시작했다. 그래 그룹 감사실에 사건을 의뢰했더니, 감사실 직원이 무슨 수로 시간대 별로 부지 매입 현장에서 바뀌는 가격 추이를 알아내나? 결국 중역회의에서 징계 여부 논의 하다가, 인사 담당 상무인 나에게 결론 내리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나는 이 사건을 배당받자, 단칼에 정실장은 죄가 없다고 결정했다. 건설사의 수주나 부지 매입은 가장 까다롭고 중요한 업무다. 그건 다른 중역을 시킨다 해도 의혹 생기기 마련이다. 뭔가 콩고물이 생겼을 거란 질투심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대개 중역들은 인민재판식으로 비난을 해대기 마련이다. 다 돈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유능한 스탭 하나 죽이곤 한다. 건설회사는 현장 기술자도 기술자지만, 건설사 이익 대변하는 최고 기술자는 수주와 판매 기술자로 보아야 한다. 그 중 부지 매입은 까딱하면 색안경 쓰고 보기 쉽다. 이번 일에 잘못이 있다면 사장이 담당 상무 제치고, 정실장과 부지 매입을 결정한 데 있다. 그래 의혹이 증폭되었다. 그러나 그건 건설사 비자금 조성을 위해 간혹 있는 일이기도 하다. 보통 건설사는 매출 대비 10% 순익, 10% 비자금 조성이 공식이다. 이런 비자금 조성에 관여된 간부가 해고되어 외부에 까발리면, 회사가 휘청한다. 심지어 망한다.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지는 일 생긴다.
이렇게 살아난 정실장은 시간만 나면, '상무님! 제가 술자리 한번 모실게요. 광주 현장에 좀 내려와 주세요.' 은밀한 전화 하기 시작했다. 사장도 '김상무! 정실장이 민원 때문에 서구청 과장 만나는데, 본사 중역 한 명이 옆에 있어야 한다니, 내려가 보소.' 하고 권했다. 비리의 불똥이 자기에게 튀지 않도록 결정해준 고마움의 표시였다. 이참에 대접 한번 받고 오라는 것이다.
그래 음식 솜씨 좋기로 유명한 광주 모 요정에서 구청 과장과 셋이 만났다. 대한민국에서 합법적으로 아파트 건설현장 허가 낸 곳 하나도 없다. 전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관청의 묵인이 필요하고, 묵인에는 술 접대와 비자금 뿌려진다. 이 과정에서 누가 앙심 품고 고소 고발하면, 관련 공무원은 징계 파면되고, 공사는 중단되고, 공사가 중단되면 현장에 투입된 몇 백억 돈이 묶이고 회사는 엄청난 손해를 본다.
그런데 잠시 음식 기다리는 시간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스톱 판을 벌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정실장 이 녀석이 돈을 몽땅 따가는 게 아닌가? 광주 내려갈 때 나는 출장비라고 몇 십만 원 받긴 받았다. 그걸 이 녀석이 흔들고 피박 씌우고 어쩌고 하면서 살살 웃어가며 판마다 돈을 몽땅몽땅 걷자 나도 은근히 약 올랐지만, 손님으로 초대한 구청 과장은 어떻게 되는가? 이 자식이 비즈니스를 이 따위로 해서 나중에 회사가 큰 낭패 보는 건 아닌가? 내 출장비 뺏긴 것도 화가 치밀지만, 이런 걱정도 많았다. 그런데 술상 들어오고 아가씨가 들어오자, 정실장이 목소릴 낮춰 '이거 백만 원입니다. 아가씨들 팁 주세요' 나와 과장 앞에 봉투 하나씩을 건넨다. 아가씨들 보고는 보다시피 두 분에게 팁 값 백만 원씩 드렸으니, 알아서 잘 모셔보라는 수작이다. 그날 나는 정실장이 상관과 담당 공무원 둘을 다루는 솜씨 보고 이 친구 능력 알아줘야 한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그 후 정실장과 친해졌고, 나는 이 친구 이사 승진시켜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간혹 그는 서울 올라오면 대치동 노래방에 날 초대했다. 뽀빠이 동기 대전고 출신 배이사란 친구가 그 동네에 살았는데 풍류가 좀 있었다. 셋이 약속하면 정실장 배이사 부인도 합석하곤 했다. 두 사람 중 정실장 부인은 미모에 노래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언덕위에 손잡고 거닐던 길목도 아스라이 멀어져간 소중했던 옛생각을 돌이켜 그려보네. 나래 치는 가슴이 서러워 아파와 한숨 지면 그려보는 그 사람을 기억하나요, 지금 잠시라도' 그가 부른 <그 날>이란 노래가 지금도 생각난다.
그런 어느 날 정실장이 르네상스 호텔 뒤 일식집으로 날 불렀다. 매취순 몇 잔 들이키자 상황을 설명했다.
'며칠 전 아파트 짓고 있는 고향 포항 후배 만났는데, 그가 포항 변두리 부지 허가 문제를 날더러 부탁하더군요, 그런데 지번을 보니, 옛날 내가 사놓은 임야와 붙었더라고요. 그래 '오냐, 허가는 걱정하지 마라'고 했지요. 그 임야는 전에 내가 친구 세 명과 얼러서 샀는데, 그 후 내가 이 친구들 만나, 필요한 일 있다면서 본전에 조금 부쳐주며 그 땅 몽땅 내 앞으로 등기했어요.'
'그리고 아파트 짓는 후배 보고, '이 아파트는 인근 부지 2천 평을 사서 늘리면, 땅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용적률이 높아진다. 그 2천 평은 우리 집안 땅이다. 단지가 커야 상가도 잘 나가고 아파트 가치도 커진다. 건설계획 늘리자. 내가 책임지고 그 땅 제공하고, 허가도 낸다. 그 대신 앞으로 이 사업 우리 두 사람 동업하는 조건으로 하자. 아파트 준공되면 20평짜리 아파트 마흔 개만 내 거로 해달라. 그렇게 제의해서 후배 허락을 얻었십니다. 이제 이 정순태 사업가로 변신해서 첫 번째로 형님을 모시는 겁니다'
그러길래 이랬다.
'그럼 이제부터 정순태 사장이라 부르지. 그런데 아파트 마흔 개 가진 사람이 쩨쩨하게 왜 이래? 적어도 당장 아가씨도 부르고 20 평 아파트 한 채 값 여기서 몽땅 마시고 가야지.'
그렇게 마시고 그 후 나는 속초 A플라자 대표로 있을 때 포항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정순태 사장이 별세하셨다는 전화였다. 깊은 밤 너무나 허전한 마음으로 차를 몰고 속초에서 포항까지 내려갔다. 동해 바다에 뜬 어선의 불빛을 보며, '언덕위에 손잡고 거닐던 길목도 아스라이 멀어져간 소중했던 옛생각을 돌이켜 그려보네.' 그때도 그 노래가 뜬금없이 떠오르던 기억이 새롭다.
첫댓글 정순태 사장이 그립겠습니다.참으로 대단한 인물 이군요.그러나 김거사도 대단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