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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660년 신라와 백제는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을 했습니다. 황산벌 전쟁입니다. 이 당시 전쟁의 상황은 객관적으로 보면 신라가 훨씬 유리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참여한 신라군의 수는 5만 명이었고, 백제군의 수는 5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쟁은 백제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습니다. 왜냐하면 승리에 대한 절박함이 백제군이 훨씬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 신라 장군은 16세의 어린 소년 관창이라는 화랑을 홀로 적진으로 보냅니다. 관창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금방 포로가 되었습니다. 백제 장군은 어린 소년이 나라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 싸우러 왔다. 그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으로 풀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자기 자식 같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관창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또다시 적진으로 돌진해 왔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돌아온 것은 그의 잘린 머리였습니다. 이것을 본 신라 군인들은 격분했고 마침내 그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이 화랑 관창의 이야기는 대다수 한국 사람들이 압니다. 그 이유는 임전 무퇴 정신을 상징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임전 무퇴 전쟁에 임해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는 뜻의 사자성어입니다. 한국 군대는 1400년이 지난 지금도 군인 정신으로 임전무퇴 정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싸움이든지 이런 절박함을 가지고 임해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일상으로 보냄 받은 선교사라는 주제로 사도행전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라고 주님께서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곳으로 갔는데 가는 곳마다 그곳에는 영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영적 싸움에서 어떤 모습으로 바울은 싸움에 임해야만 했을까요?
임전 무퇴의 정신으로 영적 싸움에 임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군사라면 순교를 각오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신앙해야 한다.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의 모습은 우리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으로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고니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4절을 보면 이 당시 이고니오네 분위기가 생생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서 들어는 유대 사람의 편을 들고 들어는 사도의 편을 들었다.
무엇을 말합니까?
무리가 갈라져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영적으로 싸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이고이오는 복음 때문에 영적인 싸움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이 싸움은 심각한 사태로 발전합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의 관음들까지 합세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물리적인 소요 사태로 발전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6절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알고 루가오니아 지방에 있는 두 도시 루스트라와 더베와 그 건방으로 피하였다 피했다고 합니다. 피했다. 이 단어를 다르게 번역하면 도망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도망갔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의 모습, 사도 바울의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왜 피한 것일까요?
복음을 위해서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우고 그래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할 것 같은데, 왜 피해버린 것일까요?
우리가 이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면 바울을 통해 보냄 받은 자의 삶을 배우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결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은 왜 그곳을, 왜 고난을 피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바울은 왜 이고니온에서 끝까지 싸우지 않고 루스드라로 피해버렸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평소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8절과 9절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말입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함으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바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했습니까?
바울은 평생 율법을 공부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이 지향하는 하나의 목표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다스리는 나라,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에게 축복이 주어지는 나라 그 나라였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다스리면 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누구입니까?
이 메시아는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진정한 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가문도 학벌도 명예도, 심지어는 영적 자존심까지도 다 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자랑하며 살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메시아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바울이 이고니언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실제로 순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이 돌멩이를 들고 와서 바울을 칩니다.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비극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면 후대 사람들은 그를 영웅적 순교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마치 관창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순교자가 되었겠지만 바울을 향해 가지고 있던 그 주님 세상의 통치자, 그 주님의 계획은 일그러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 하여금 그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오, 루스드라와 드벤은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바울이 일찍 순교했다면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이 퍼질 수 없었고, 그렇다면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갈라디아서, 또 이 갈라디아서의 확장판인 로마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훗날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여기서 둘 사이에 끼었다는 것은 복음 때문에 순교하는 것과 계속 살아남아서 사역하는 것 그 둘 사이에 끼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순교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살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당신들에게 유익이 있다. 주님이 이것을 원하신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3절에서 이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고을로 피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고난을 무조건 피하고 도망다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총지휘하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뜻이 있어서 제자들을 각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아직 다 이루지 못했는데 박해가 있으면 피하라는 겁니다.
주님의 뜻을 이룰 때까지 피하라고 합니다. 영적 싸움의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 뜻, 내 자존심보다 주권자의 뜻을 우선적으로 살피라는 겁니다. 주권자의 뜻을 살피다 보면 내가 비겁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처럼 말입니다.
무슨 사도가 되어서 돌멩이가 무서워서 도망을 쳤냐 사람들은 쉽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자존심에 상처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것,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그것보다 주님의 뜻이 더 중요합니다.
땅 끝까지 가야 한다.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게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또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 옮기도록 한 것은 전략적 재배치입니다. 복음 전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라. 그 뜻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거기에서도 줄곧 복음을 전하였다. 옮겨간 그곳에서도 주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보냄 받은 그곳에서 우리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정든 고국을 떠나서 이곳 독일 땅으로 왔습니다. 독일로 온 데에는 그 이유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유학을 위해서 오신 분도, 직장 때문에 오신 분도, 혹은 피치 못할 사연으로 이곳으로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언어의 장벽을 만났습니다. 문화적 차이를 경험합니다. 이방인이라는 소외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내가 내 나라를 떠나서 왜 이곳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하는가 그런 질문이 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혹시 내가 그 한국을 그 한국에서의 고난을 피하고 피해서 도망 온 결과가 이곳에서의 내 삶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의 삶은 결코 도망이나 패배가 아닙니다. 우리의 주권자께서 우리를 보냈습니다. 여기에 길이 막혀서 또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망이 아닙니다. 전략적 재배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내시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보내신 분, 나를 보내시는 그분, 그분이 무엇을 위해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시는가 그분의 뜻을 살피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살필 때 찾아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질문입니까?
주님은 어떤 때에는 이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골로 피하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곳에서는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길이 막히거든 피하라 그러고 어떤 곳에서는 길이 막혀도 죽도록 충성하라 그럽니다.
언제 피해야 하고 언제 충성해야 합니까? 그것을 분별하는 기준은 뭡니까?
여기 사시는 우리 성도님들도 오늘 성경 이야기에 그 똑같은 문제를 만날 것입니다. 때로는 일상에서 혹은 직장에서 내가 무시를 당하고 있다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런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내가 이곳에서 순교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과감히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가 그런 질문이 생길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 학생들의 경우 어학을 준비하고 학교 입학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2년이 넘도록 노력했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면서 체류 비자는 계속해서 옥죄어 옵니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이곳이 주님이 보내신 곳이 맞나 내가 주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이곳으로 온 것인가 주님의 뜻이 맞다면 이곳에서 내가 끝까지 버티고 인내해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길을 막으심으로 다른 곳으로 가라고 이해하고 진로를 바꿔야 되는가 그런 고민들을 하실 것입니다.
아마 이곳에서 오래 계신 분들은 오래 계셨던 분들은 진로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면은 한국에서 사람들이 쟤 실패하고 돌아왔어 실패자야 그렇게 말할 것 같은 느낌이 막 밀려옵니다. 우리 가족이 어떻게 생각할까 내 친구는 어떻게 생각할까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경우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분명한 기준은 내가 세웠던 그 목표가 내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였는가 그것을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가 특정 학교에 들어가는 것, 특정 직장에 들어가는 것, 그것을 목표로 삼아버리면 내 사전에는 후퇴는 없다. 나는 죽든지 살든지 거기 들어갈 때까지 버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 그 학교가 그 직장이 그 사람 삶의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학교 들어가라고 우리를 이곳으로 보냈을까요?
직장에서 일하라고 보냈을까요?
우리는 목표와 목적을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약 바울이 이고니온을 복음화하는 것이 내 삶의 목표다. 나는 이 목표를 이루기까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바울에게 이고니온은 목표가 아니라 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고니온으로 보낸 것은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나라 그 뜻을 이루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목적이고, 이고니오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고니온이라는 도시가 아니라 복음 자체였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고이온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에 있어서는 수단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적은 바꿔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4장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나셨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헤롯 왕이 무서워서 갈릴리로 도망친 것입니까?
세례 요한처럼 자신도 잡힐까 봐 겁이 나서 도망친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때가 될 때까지 물러나신 겁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가 왔습니다. 십자가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때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때가 되자 주님은 두렵지만 피하지 않았습니다. 정면 돌파합니다. 주님을 잡으러 로마 군인들이 왔습니다. 그때 주님은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 그렇게 말씀하면서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갑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 뜻이 분명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우리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마련해 두신 계획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막으시고 때로는 우리의 인생을 우회하도록 만들면 우리는 낙심합니다. 내가 정한 이때에 이루어져야 되는데, 이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낙심합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정한 이 때를 목적으로 삼아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뜻대로 안 되면 왜 내게 이렇게 하실까? 왜 내 삶은 이렇게 꼬이기만 할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바울이 이곤이온에서 자신의 계획대로 대성공을 거두고 그곳에 머물러서 복음을 전했다면 루스드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학자들에 따르면 이 루스드라는 벽지 마을이라고 합니다. 조용한 벽지 마을입니다. 촌동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교육받지 못했고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루스트라는 복음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거점을 정해서 선교를 했던 이 바울의 선교 전략에는 맞지 않는 도시입니다. 바울은 그 루스드라에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곳이온에서 실패한 것처럼 밀려나고 그 루스트라에 갔을 때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장애인이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영적 아들이자 평생의 동력자인 디모데를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바울이 도망간 것처럼 보이는 그 루스라가 사실은 하나님의 사명의 영토를 넓히는 곳이었고, 최고의 동력자를 만나 복음을 이어갈 수 있는 그런 길을 발견한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던 때에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학교,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민 생활에서 여러 가지 문제로 마치 사방에서 우겨 싸는 것 같은 그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치 마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셨다면 반드시 뜻이 있습니다. 내 계획, 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합시다. 하나님의 목적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때로는 돌아가게 하고 때로는 막히게도 하십니다.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결코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뜻을 위해서 피했습니다. 자신의 주권자인 그분,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그분의 원하심에 순종하기 위해서 피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목표, 내가 생각한 타이밍, 그것을 내려놓고 통치자이신 주님의 목적에 우리 삶의 목적을 맞추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시간표에 내 시간표를 맞췄으면 좋겠습니다. 그랬을 때 바울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루스트라에서 많은 복음의 열매가 맺혔고요. 그리고 바울이 죽었을 때 바울을 뒤이어 복음을 전할 디모데라는 영적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전진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우회해야 할 것인지 그것을 고민합니다. 이때가 그때인지 아니면 기다려야 할 것인지 고민합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께 목적을 맞춥시다. 그분의 계획에 맞추어 가면 그분께서 더 높은 은혜로 우리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