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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쿄 전자판의 ‘세이쿄 기프트’에 대한 소개
꼭 읽어주셨으면 하는 1년분의 지면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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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eikyoonline.com/summarize/seikyo_gift.html
연재 「히어로즈」에서는 역경을 이겨낸 세계 영웅들의 인생이나 말 , 그 삶의 자세를 통해 이케다 池田) 선생님이 준 지침(指針)에서 미래(未來)를 여는 힌트를 찾는다 .
Seikyo Gift (2024년 11월 10일 게재)
〈히어로즈(HEROES)역경(逆境)을 승리로 넘은 영웅들〉
제47회 베토벤
2024년 12월 28일
〈베토벤〉
무슨 일이 있어도 운명에 꺾여서는 안 된다.
생명을 천 배(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다!
‘교향곡(交響曲) 제9번’. 올해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걸작(傑作)이 초연(初演)된 지 200년의 마디에 해당한다. 최종 악장(樂章)의 ‘환희의 노래<환희의 송가(부제(副題) 합창)>’는 일본에서도 사랑받는 ‘연말(年末)의 풍물시(風物詩)’다.
‘난청(難聽)’이라는, 음악가에게 치명적(致命的)이라고 할 수 있는 과혹한 현실과 마주해 ‘제9번’을 완성시킨 베토벤.
고뇌(苦惱)를 뚫고 환희(歡喜)에 도달하라! - 악성(樂聖)의 혼(魂)의 울림은 지금도 민중을 고무(鼓舞)시켜 마지않는다. 어제로 35년이 된 베를린 장벽(Die Berliner Mauer)의 붕괴(崩壞)를 기념해 연주되었던 것도 이 곡이었다.
그는 엮었다.
“어려운 어떤 일을 극복(克服)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행복을 느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운명(運命)에 꺾여서는(짓눌려서는) 안 된다. - 오오, 생명(生命)을 천 배(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다.”
베토벤은 1770년 12월, 독일 본(Bonn)에서 탄생. 가수였던 아버지는 지독한 술꾼〈술고래(酒飲み[사케노미])〉이었고 일가의 생활은 가난했다.
아버지의 가열(苛烈)찬 음악교육도 있어, 어릴 때부터 재능을 발휘해 11세에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아버지 대신해 가계(家計)를 지탱하며 동생들을 돌보게 되었다.
16세 때,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폐병(肺病)으로 타계(他界). 실의(失意)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지만, 주위의 지원을 받으며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 ~1809)을 사사(師事)하기 위해 음악의 도시 빈(Wien)으로. 22세를 목전에 둔 1792년 11월의 일이었다.
그는 귀족의 저택에서 연주하고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계(生計)를 꾸렸다. 그런 속에서 다양한 곡을 만들며 ‘새로운 모차르트’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후년에 기록한 “이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 즉시 하라!”라는 말은, 순간(一瞬) 순간(一瞬)에 생명을 연소(燃燒)시켜 음악에 몰두(沒頭)한 자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대 후반, 인생 최대의 시련(試鍊)이 베토벤을 덮친다. 귀의 이변(異變)을 알게 되고, 점점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음악가에게 있어서 청력을 잃는 것은 ‘죽음(死)’과도 같다. 그는 세간(世間)에 알려지지 않도록 남몰래 치료를 계속했다. 어느덧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도 적어졌다.
많은 치료법을 시도한 베토벤이었지만 결과는 부진(不振)했다. 그래도 “나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작곡을 계속하며 민중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간다.
〈베토벤을 평한 로맹 롤랑의 말〉
세상으로부터 환희를 거부당한 인간이 스스로 환희를 만들어 낸다.
그것을 세계에 선물하기 위해서.
31세 때는 일상(日常) 대화에 곤란할 정도로 청력이 떨어져 있었다. 제자에게도 그 사실이 알려져 절망(絶望)의 늪에 빠진다. 1802년 10월에 쓴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ädter) 유서(遺書, Testament)’에는 난청(難聽)의 고통이 “절망(絶望)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나는 스스로의 생명을 끊었을 것이다.”라고 엮여져 적혀 있다.
하지만 그는 운명(運命)에 굴하지 않았다. 유서 속에서 “예술만이 나를 붙잡아주었다. 아아, 나는, 내 안에 있다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내기 전까지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다.” “인내(忍耐), 그것을 지금, 나는 나의 이정표(里程標)로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결의를 적었다.
유명한 교향곡 제3번 ‘영웅(英雄)’, 제5번 ‘운명(運命)’, 제6번 ‘전원(田園)’ 등이 유서를 쓴 지 몇 년 이내에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후에 베토벤은 “뛰어난 인간의 주(主)된 특징 - 그것은 엄한 역경 속에서의 인내(忍耐)”라고도 적어 남겼다.
난청 이외의 병에도 시달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가족의 죽음, 경제고(經濟苦)에도 시달렸다. 그런 속에서도 창작(創作)의 손을 쉬는 일은 거의 없었다.
40대 중반이 되자 보청기(補聽器)를 사용, 그 후에는 대화장(對話帳)을 이용해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되었다.
교향곡 제9번을 완성한 것은 만년(晩年)인 1824년. 귀는 이미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초연(初演)은 같은 해 5월, 빈의 극장에서 개최되어 베토벤은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지휘대(指揮臺)에 섰다. 연주가 끝나자 청중의 터질듯한 박수가 회장(會場)을 감쌌다. 앙코르는 실로 5회에 달했다.
‘제9번’의 초연 무렵부터, 베토벤의 몸은 현저(顯著)하게 쇠약(衰弱)해져 갔다. 사망하기 전해(前年)부터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몸 상태는 나아지지는 않았다.
생명(목숨)이 다할 때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계속 불태웠던 베토벤은 병상(病床)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겨우 조금 음표(音標)를 쓴 것에 불과(不過)하다.”라고. 그리고 1827년 3월, 56세로 인생의 막(幕)을 내린(닫은) 것이다.
베토벤의 생애를 쓴 작가로 알려진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마치 고민(苦悶) 그 자체인 것 같은 인간, 세상으로부터 환희(歡喜)를 거부(拒否)당한 그 인간이 스스로 환희를 만들어낸다. - 그것을 세계에 선물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불행(不幸)을 이용해 환희를 단련(鍛鍊)시켰다.”
〈베토벤을 통해 말한 이케다 선생님〉
인생은 산도 있고, 골짜기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고투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확신해 가는 것이다.
강성한 신심의 일념이 있는 한, 숙명도 반드시 사명으로 바꿀 수 있다.
이케다 선생님에게 있어서 베토벤은 청춘의 ‘마음의 벗’이었다. 은사(恩師)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의 사업 재건(再建)에 분주(奔走)했을 때는 스스로를 고무(鼓舞)하기 위해, 남자부(男子部) 제1부대장(部隊長) 때는 고민하는 벗을 격려하기 위해 ‘운명’을 들었다. ‘오사카투쟁(大阪鬪爭)’에서도, 구(舊) 간사이본부(關西本部)에서 레코드를 걸어 자신을 분기(奮起)시켰다.
제3대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61년 10월, 오스트리아를 처음 방문한 선생님은 빈의 중앙묘지에 서 있는 베토벤 묘비(墓碑)에. 1981년 5월에는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기념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0년 11월, 학회 창립 60주년을 축하하는 본부간부회에서, 후지교향악단(富士交響樂團)과 소카합창단(創價合唱團)이 ‘환희의 노래’를 피로(披露). 선생님은 스피치에서 ‘제9번’을 합창할 것을 제안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제9번’이 연주된 도쿠시마(德島)에서는 1994년 가을 ‘환희의 노래’ 합창운동을 전개해 3만5000여명의 동지가 참가했다. 규슈(九州)에서는 청년부가 같은 해 11월에 5만명, 2001년 12월과 2005년 11월에는 10만명의 ‘환희의 노래’를 실현시켰다.
종문(宗門)은 “환희의 노래를 독일어로 부르는 것은 외도예찬(外道禮讚)”이라는 등 어긋난 트집을 잡아 선생님과 학회(學會)를 비판했다. ‘제9’는 학회가 종문으로부터 ‘혼(魂)의 독립(獨立)’을 이루고 세계종교(世界宗敎)로 비상(飛翔)하는 상징이 된 것이다.
“왜 베토벤을 좋아하는가.”라고 선생님은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베토벤은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자신은 최고의 삶의 자세를 살고 있다고 자부(自負)했습니다. 그렇기에 황제든 권력자든 무례(無禮)하게 굴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중략)
귀가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음악가로서 치명상(致命傷)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100명이면 100명 모두 포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의 철학(哲學), 인생관(人生觀)의 훌륭함은 자신이 믿는 길을 그대로 관철(貫徹)한 것입니다.” (1984년 12월 21일, 도쿄소카초등학교 제4기 졸업기념촬영회에서의 스피치)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다.
“베토벤 자신, 고투(苦鬪)의 연속(連續)이었던 것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과혹(過酷)한 운명(運命)과 싸우는 자신의 사명(使命)에 긍지(矜持)를 갖고 있었다. ‘나는 작곡할 수 있다. 그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도’라고. (중략)
생명을 고무(鼓舞)시켜 마지않는 인류(人類)에 대한 선물(膳物)은 결코 순풍(順風)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역풍(逆風)을 맞은 고투에서, 그리고 불굴(不屈)의 뜻(志)에서 태어난 것이다.
인생은 산도 있고, 골짜기도 있다. 병이나 일의 고뇌(苦惱), 가정이나 인간관계(人間關係)의 갈등(葛藤), 장래(將來)에 대한 불안(不安) 등 고민(苦悶)은 끝이 없다. 하지만, 지금의 고투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확신해 가는 것이다. 강성(强盛)한 신심(信心)의 일념(一念)이 있는 한, 숙명(宿命)도 반드시 사명(使命)으로 바꿀 수 있다.”〈2022년 12월 28일자 본지 「수필(隨筆) ‘인간혁명(人間革命)’ 빛(光) 있으라」〉
‘제9번’의 초연(初演) 200주년을 기념해, 이달 1일부터 〈베토벤과 ‘환희의 노래’ 전(展)〉이 도쿄(東京) 하치오지시(八王子市)의 소카대학교(創價大學校)에서 개최되고 있다. ‘고뇌를 뚫고 환희에’ 이른(도달한) 인간 베토벤에게서 지금이야말로 배울 것이 많다.
[인용·참고(引用·參考)]
로맹 롤랑 저(著) 『베토벤의 생애』 카타야마 토시히코(片山敏彦) 번역(譯) 〈이와나미쇼덴(岩波書店)〉
메이나드 솔로몬(Maynard Elliott Solomon) 편(編) 『베토벤의 일기』 아오키 야요히(靑木やよひ)·히사마츠 시게미츠(久松重光) 번역(譯) 〈이와나미쇼덴(岩波書店)〉
루이스 록우드(Lewis Lockwood) 저(著) 『베토벤 음악과 생애』 츠치다 에이사부로(土田英三郎)·후지모토 이츠코(藤本一子) 감역(監譯), 누마구치 타카시(沼口隆)·호리 토모헤이(堀朋平) 번역(譯) 〈슌쥬샤(春秋社)〉
오키 미노루(大木実) 저(著)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사람들』 〈사·에·라쇼보(さ·え·ら書房)〉
배리 쿠퍼(Barry Cooper) 원저감수(原著監修) 『베토벤 대사전(大事典)』 히라노 아키라(平野昭)·니시하라 미노루(西原稔)·요코하라 센시(横原千史) 번역(譯) 〈헤이본샤(平凡社)〉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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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https://www.seikyoonline.com/article/5853983CF504478F6D4E9878EBFCA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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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