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66
6월24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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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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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SbIcbJkrrc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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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단히 넘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서는 사제!>
오늘 우리 교우들은 무척 바쁜 날입니다. 사제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저희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시는 날인 동시에, 우리 인간의 죄악과 방황 때문에 상처입은 예수님의 성심(聖心)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행해진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성장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조사 결과는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사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대답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사제들의 지속적인 회심과 쇄신, 성화 없이 교회의 쇄신과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는 답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착한 목자로 살아가시는 사제들도 부지기수인데, 그런 사제들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사제도 어쩔 수 없이 근본적인 한계와 결핍을 지닌 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틈만 나면 대대적인 삶의 변화를 꿈꾸지만, 마음과는 달리 행동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멋진 모습의 착한 목자로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지만, 희망 사항과는 다른 초라한 스스로의 모습에 좌절도 많이 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따로인 모순된 삶을 살아가며 가슴을 치고 후회합니다. 한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나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신기루 같은 하느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예수성심대축일을 사제성화의 날로 지정하고 사제들을 위한 특별한 기도를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이 인간적 부족함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넘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서서 하느님께로 또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내공을 지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최우선적 선택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고, 하느님께만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은 또 다른 한 가지 지향을 두고 기도를 해주셔야 합니다. 통상 우리가 바치는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인간 측에서 하느님께 청하며,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기보다 하느님께 위로를 드리는 기도를 바쳐야 마땅합니다. 우리 인간의 부족함, 우리 인간의 죄악, 우리 인간의 배신으로 크게 상처입은 예수님의 성심께
송구한 마음으로 그분의 부서진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상호 통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흘러가야 하고, 다시 또 되돌아가야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이겠지요.
한쪽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에 불이 붙고, 밤잠도 제대로 잘 못 이루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조금도 그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짝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그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우리가 아무리 그분께 대들고 반역해도, 우리가 그렇게 배신을 때려도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의 불꽃을 태우고 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 성심은 우리의 반역과 배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에서 우리 교회가 탄생되었고,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습니다. 그 부서진 예수 성심에서 7가지 성사가 흘러나왔으며, 그 성사는 큰 강이 되어 메마른 사막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간절한 바람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 성심께로 기꺼이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퍼마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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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H1gl8uVG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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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성심을 본받으면 성화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더 자세히 보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방치합니다. 도대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맹수가 우글거리는 광야에 방치하는 것이 왜 사랑일까요?
우리는 가끔 버릇없는 아이를 감싸는 어머니를 볼 때가 있습니다. 왜 남의 애 기죽이냐고 되레 화를 냅니다. 그것이 사랑일까요?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자신을 무는 개까지도 감싸는 어머니를 나무랍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그 개가 다른 사람을 물게 될 것을 용인하는 범법자나 다름없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정말 누가 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물리면서까지도 잘해주는 주인일까요, 아니면 강 훈련사일까요? 강 훈련사는 개를 물속으로 끌고 갑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일단 살아야 하는 게 우선이 되어서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개에게 입마개도 하고 조금씩 개를 주인에게 의지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광야로 끌로 나온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아의 압제에서 구해주고 싶으셨습니다. 당신께, 혹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하는 백성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강 훈련사가 물속으로 개를 끌고 들어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의 척박한 곳으로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어깨 위에 그대로 있으려 하지 않고 본인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방치하신 것도 이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어깨에서 무슨 일에나 자신을 죽이고 순종할 수 있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성심입니다. 사랑의 목적입니다. 사제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나라 카리사마 대표 배우인 최민식 씨를 길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캐나다에 살다 와서 최민수 씨와 혼인한 강주은 씨입니다. 강주은 씨는 빚이 지금 시세로 30~40억 있는 최민수 씨와 결혼하여 힘겨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했던 최민수 씨에게 최대한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계속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지만 참았습니다. 한국말도 잘하지 못할 때라 만화를 그려가면서 소통해야 했습니다. 사고를 칠 때도 참아내며 그의 편을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결국 강주은 씨는 지금 연 매출 600억 상당의 홈쇼핑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재정적으로 안정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반면 최민수 씨는 월 40만 원의 용돈을 타서 씁니다. 기름값 하면 남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강주은 씨는 최민수 씨가 돈 개념이 없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광야를 선사합니다. 그래도 최민수 씨는 강주은 씨에게 어쩔 수 없이 순종합니다.
사람의 이기심을 없애려면 환경의 결핍을 주어서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자각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어서 기를 살려주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습니다. 구원을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선물하십니다. 당신의 결핍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궁핍과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물에 빠진 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장 자기가 사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못된 아이를 감싸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가 나에게 앙심을 품더라도 순종을 가르치는 게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어깨에서 꼼짝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주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기 전에 주님께 의지합시다. 그냥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아멘!” 하겠다고 고백합시다. 그래야 결핍 훈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종만이 살길입니다.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순종해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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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묵상하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냈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 다음 금요일에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오늘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여 지내고 있다. 사제들은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선포의 직무를 더욱 충실히 수행하며 성덕을 쌓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사제들을 위해서도 많은 기도를 부탁한다.
복음: 루카 15,3-7: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에제 34,16) 한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그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으며, 당신의 사랑을 인간적 현존을 통해, 인간적 마음을 통하여,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까지 열정적으로 사랑하신 착한 목자를 통해 보여주셨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은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다. 이성적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랑이다. 이성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하고 비판한다. 이성적으로는 옳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과 우정 관계, 형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과 그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들의 불의를 인정하고 공범자가 됨을 말한다.
이러한 이성적인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양 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자기를 따르지 않고 무리를 이탈해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이 목자의 행동은 이성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양에 대한 큰 사랑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논리적으로는 이러한 행동이 비판의 여지가 있고, 또한 하느님께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을 잃어버린 목자처럼 행동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7절) 하느님은 자비로운 사랑으로, 즉 이성적으로는 따질 수 없는 사랑으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도 구원하러 가시는 분이시다.
예수님 자신이 사랑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이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마음 역시 계산하시지도 따지지도 않으신다. 이성적인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 팔을 벌리실 뿐이다. 우리의 이성도 그 사랑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비이성적인 사랑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 아무 죄 없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에 내맡기는 것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보통 죄인들은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 그들을 너그럽게 보아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바오로 사도는 주장한다. 이성적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그가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누구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 사람은 죽음이 불가피할 때 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가 없으니까 죽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성적인 관점이 아닌, 지나치게 넘쳐흐르는 사랑, 자격이 jqt는 죄인들에 대한 자애의 관점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8) 예수님은 성체성사에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주신다.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죽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장 정신 나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축일은 바로 그 사랑을 충만한 믿음과 감사의 정으로 받아들이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바오로 사도는 이 믿음을 끌어내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10) 그 지나친 사랑 때문에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도 이성적이 아닌 열정적이고 어리석은 충만한 사랑으로 우리도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사랑을 살려고 결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이성적이 아닌, 정신 나간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셨다면 우리의 사랑도 그분의 사랑을 닮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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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처럼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4-7)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목자의 심정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나서 ‘애타게’ 찾아다닌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심정과 같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실감 나고, 공감하기가 쉽습니다.) 부모가 ‘잃은 자녀’를 애타게 찾는 것은 자녀의 안위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 부모의 마음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라는 말은, ‘잃은 양’ 하나 때문에 다른 양들을 모두 위험 속에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에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그냥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첫 번째로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하나가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아흔아홉과 하나라는 숫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도, 남아 있는 양도 하나하나 똑같이 중요한데, 남아 있는 양들은 지금 안전한 상태에 있으니 잃은 양을 찾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 사상의 반대쪽에 있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읽을 때, 또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할 때, 그 ‘잃은 양’이 ‘바로 나’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나만 혼자서 뒤처져 있거나 옆길로 빗나가 있다면, 그래도 예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구하려고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잃은 양’을 ‘그들’이나 ‘그’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잃은 양이 아니다.”라는 자만심에 빠져도 안 됩니다. 그런 헛된 자만심은 위선자들의 특징이고, 공통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는 아무도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두 번째로 강조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서 쫓아가는 목자의 모습은, 우리를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잃은 양’이 ‘길을 잃은 양’이 아니라 ‘스스로 목자를 떠나버린 양’이라면? 그러면 그 양은 결국 ‘끝나버린 양’이 됩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한다면? 스스로 자기 발로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회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세 번째로 강조하시는 것은 ‘기쁨과 슬픔’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되찾고 나서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양을 잃으면 크게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반대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크게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나는) 지금 하느님과 예수님께 기쁜 존재인가? 슬픈 존재인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말이 있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그 당시나 지금이나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자가 계시는데도 그것을 모르거나, 또는 외면하면서, 세속 일만 신경 쓰면서 살다가 지쳐버리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인류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많은 일을 하신 것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사는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은, 스스로 속죄할 능력이 없는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가엾게 여기는 그 마음은 곧 사랑입니다. 회개는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성심(마음)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성심 안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흐트러진 삶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지금, 세속 사람들은 ‘일상의 회복’만을 말하고 있지만, 신앙인은 회개를 말해야 하고, 회개를 실천해야 합니다. 만일에 회개 없이 일상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을 신앙생활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란, 죄를 뉘우치는 일을 포함해서, 삶 전체를 주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코로나라는 재난을, 그동안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는 계기로, 또 앞으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묵상하고 실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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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성령강림 대축일 때입니다. 평화방송에서 성령의 은사를 뽑는 ‘어플’을 만들었습니다. 이름과 세례명을 입력하면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오는 프로그램입니다. 저의 성령의 은사는 ‘지혜’였고, 성령의 열매는 ‘절제’였습니다. 사제인 저에게 꼭 필요한 은사와 열매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건강과 장수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청을 좋게 보셨습니다. 지혜를 주시고 덤으로 건강과 장수를 주셨습니다. 신학생 때 신부님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와 지식도 필요하지만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은 ‘판단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판단을 위해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급한 성격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많습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적도 많습니다. ‘절제’ 또한 제게 필요한 열매였습니다.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이고,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성화되어야 합니다. ‘사제 성화의 날’이면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2002년 ‘사제 성화의 날’이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저에게 ‘사목 체험’을 나눠보라고 하였습니다. 사제들 앞에서 체험을 나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배 사제들은 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료 사제들은 저의 허물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 사제들에게 모범을 보일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구장 신부님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본당에서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의 사목 체험은 교구 사목국에도 전해졌고, 사목국장 신부님이 함께 일해 보자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교구 사목국의 ‘교육담당 사제’로 3년을 일하였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구역장/ 반장을 위한 월례연수를 기획하는 것이었습니다. 미리 강사 신부님들을 섭외하면 되었습니다. 다행히 큰 무리 없이 3년간 월례연수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보람 있었던 3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한 성가가 있습니다. ‘예수마음’입니다.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잡아당기사 네 성심에 네 성심에 결합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차지하시와 네 성심에 네 성심에 보존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변화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바꿔 주소서.” 예수님의 마음은 아낌없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분에서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목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권한과 능력에서 겸손하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지만 그래서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으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심에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배반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침을 뱉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뺨을 때리며 모욕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셨고, 하느님께도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으로, 끝까지 믿어주시는 사랑으로, 고통과 수난까지 감수하시는 사랑으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결합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호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겸손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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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세리나 죄인과 같이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들이시고 가까이하시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루카 복음 15장은 세 가지 비유, 곧 되찾은 양(3-7절 참조), 되찾은 은전(8-10절 참조), 되찾은 아들(11-32절 참조)에 대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이야기로,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잃었던 당신 자녀를 다시 찾았을 때 느끼시는 하느님의 큰 기쁨을 전하십니다. 백 마리의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자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밤낮으로 길을 헤매며 애쓰는 목자,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고서는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그 마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심 안에 머물며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착한 목자,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심장마저 꿰찔리시어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예수 성심은 오늘도 우리를 당신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 예수님께서는 또한 성체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를 당신 생명으로 가득 채우시고 다시 살게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오늘 하루, 예수 성심과 하나 되어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따뜻한 마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세상의 모든 사제가 예수님의 성심을 닮아 주님의 착한 목자로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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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구 나기정 다니엘 신부님]
<예수 성심 대축일에 대해서>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마음은 알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자연의 어떤 사물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쉽게 헤아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속내를 잘 모르기에 서로 오해도 하고, 단순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여 편협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누구의 마음을 알고 헤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배워 닮을 수 있다면, 주님과 더 가까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이들은 자기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도 특히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는 봉사자, 곧 사제들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여러 가르침과 당신의 삶을 배우고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다.
온유와 겸손, 소외되고 작은 이들에 대한 봉사, 자기를 희생하는 생활, 잃어버린 양을 되찾으려는 깊은 사랑의 마음을 배우고 그렇게 사는 이들이다.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하는 사제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에게서 배우기에,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정하였다. 이날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에 감사드리고 예수님의 상처받으신 마음을 묵상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의미를 되살려 사제들이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채우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욱 닮으며, 복음 선포의 직무를 되새기고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도록 하려고 여러 행사를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 성심 대축일은 어떻게 지내게 되었을까?
중세 때 일찍부터 예수님의 성체께 대한 신심은 널리 퍼졌지만,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성심)에 대한 공경은 늦은 13세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17세기에 와서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이 보편화된다. 결정적으로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 수녀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축일 미사를 이때부터 봉헌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에 와서는 성령강림 다음 셋째 주 금요일로 축일이 지정되었으며, 20세기에 와서 오늘처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로 고정하였다. 또 1995년부터 이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이날에 말해주는 예수 성심의 신심은, 첫째 한없이 풍요로우신 성심께 감사드리는 일이다. "가장 작은 나에게 사도의 은총을 주셔서 이방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에페 3,9 참조)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 그대로이다.
둘째는 우리의 잘못으로 상처받은 성심을 통회의 마음으로 묵상하는 일이다. 아무 잘못도 없으시면서 "친히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골고타로 올라가 처형되신 것"(요한 19,17-18 참조)을 통회의 심정으로 묵상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래서 복음도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잘 설명해 준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기에, 고통받는 이들을 모두 멍에를 가볍게 해주시는 당신께 초대하시는 말씀(가해, 마태 11장),
아울러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심장이 창에 찔리어 거기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믿는 이들(교회)이 그리스도께 속해있다는 말씀(나해, 요한 19장),
잃었다가 되찾은 양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 목자의 사랑 깊으신 마음을 일깨워주는 말씀(다해, 루가 15장)을 들려준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인간의 속죄를 기억하고(본기도),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왔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교회와 성사와 구원이 나온 것을 선포한다(감사송).
이날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기억하는 축일이다. 그 거룩한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백 분의 일이라도 헤아린다면 효자 소리를 듣게 되듯이, 미약하지만 주님의 깊으신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헤아리도록 노력해 보자.
사랑의 마음에 대해 감사드리고, 충실하게 기억하고 넉넉하게 보답해 드리지 못하여 불편을 끼친 것을 기억해 보자.
또한 사제 성화의 날이므로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성덕을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마음으로 돕도록 하자. 그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오늘 이 시간에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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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선한 목자>
참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떠나는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5년 전 자원해서 칠레로 선교사의 길을 떠난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모처럼 귀국해서 휴가를 보내던 중 주교님의 명으로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떠나기 전날 대장암이라는 건강검진 결과를 통고받습니다. 출국을 취소하고 치료를 위해 수술과 항암 치료를 하고 있지만, 동창 신부의 걱정은 자신의 몸보다 선교지에서 친교를 이룬 주민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무서운 병마로 선교지에 가지 못할까 걱정합니다. 죽음이 눈앞에 도사리고 있지만 이미 하느님의 도구가 된 사제의 열정 앞에 그 치명적인 독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사제의 발길을 병마로 막아선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성심으로 무장한 그 열정은 더욱 커져갑니다. 다시 선교사로 보낼 수 없는 신부님을 대신해서 이제 막 군종 신부로 전역한 동창 신부가 그 길을 떠났습니다. 이 신부님이 실패하면 또 누군가 그 길을 갈 것입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사제들이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사제들도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을 착한 목자로 기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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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을 보고, 배우고, 키우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예수 성심 상본을 보면 하트 모양의 심장이 상처를 입은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마음의 상처, 가슴의 상처, 심장의 상처를 주님께서 입으셨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게 한 것은 우리 인간의 죄라고 하고, 그렇게 상처를 입으셨음에도 우리 죄인을 용서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이라는 것이 예수 성심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흩어진 양 떼를 하느님께로 모아들이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동가식서가숙하신 분이신데 그분을 우리 인간은 십자가에 못박고 가슴에 상처를 입혔지만 그분은 그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으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허망하게 끝난 줄 알았는데 그 상처로 우리 상처는 낫고 구원받았다고 베드로 서간은 얘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의 상처가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해주셨다는 말이고 주님의 상처를 보고 우리 상처가 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상처로 어떻게 우리의 상처가 낫게 될까요?
우선 주님의 상처를 보는 사람이 상처가 낫게 됩니다.
주님의 상처를 보지 않고 자기 상처만 보는 사람은
그 상처가 나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의 상처를 보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수백 번 우리를 위해 죽으셔도 상처가 치유될 수 없습니다.
내 상처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몰되어 있다는 것은 상처만 보고 치유를 보지 않는 것이기에 치유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의 상처를 보지 않고 이웃의 상처만 봐도 상처가 많이 치유됩니다. 그것은 나만 상처 입은 게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상처를 보게 되면 더더욱 치유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서 입은 상처를 주님으로부터 치유받는 것이고, 주님의 큰 사랑 까닭에 우리의 상처가 치유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엄마에게서도 비슷하게 상처를 치유받지 않습니까? 밖에서 상처받고 와서는 그 아픔을 엄마에게 다 쏟아붓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 상처 주는 짓에도 상처받지 않고 다 받아주고 치유해주는데 그것은 엄마의 그 큰 사랑이 당신이 받는 상처는 초월하고, 곧 당신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의 상처를 껴안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나의 상처가 이해받고 위로받는 것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엄마가 나의 상처에 호하고 따듯한 입김을 불어주고 약을 발라준다고 그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한 치유는 외부의 치유가 아니라 내 안에 치유의 힘이 생겨야 합니다. 면역력이 약해 병균의 침입을 받고 상처를 받을 때 면역력을 키워야 하듯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 엄마의 큰 사랑 보고 그 사랑을 배우고 키워야 합니다.
사랑이 상처를 초월하게 하는 힘이고 치유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큰 사랑을 기리는 오늘 우리는 상처받아도 상처받지 않는 예수님의 그 큰 사랑에서 우리 상처를 위로받을 뿐 아니라 그 큰 사랑을 보고, 배우고, 키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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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사제>
루카 15,3-7 (되찾은 양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사제>
사제는
하늘빛을 땅에 드리우도록
땅기운을 하늘에 들어 높이도록
그리하여 하늘과 땅을 곱게 잇도록
부르심 받음 사람입니다
사제는
여린 마음과 작은 몸으로
하느님께서 정성껏 빚으신
온 누리 보듬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한 몸 추스르기 버거워도
하느님 사랑 가득 담은
함께 사는 세상 가꾸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저 홀로 머물 울타리 허물어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 가득한
여리고 찢긴 거친 세상 담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홀로 거룩함의 꿈에서 깨어나
더러운 것 깨끗하게 하고자
온 삶 아낌없이 던지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하느님 손길 닿은 세상 모시되
세상에 짓눌리고 세상이 버린
하느님의 작은 이 품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살기 위해 벗을 희생시키지 않으며
벗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으라고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약하고 추하고 부족한 사람이기에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부끄럼 없이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몸과 마음에
핏빛 사랑의 상처 가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순간부터 끝 모를 마지막까지
앞서 가시고 함께 하시기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용기 내어 또 한 걸음 내딛는 이
바로 주님의 사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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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의 미어지는 마음>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가끔씩 제가 상대방 자리에 앉아서 저 자신이 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행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어떤 때는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좋은 쪽으로 대화나 행동을 이끌어주기에 어떤 때는 의식적으로 이렇게 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저 자신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선명하게 제 자신을 보았던 경우도 꽤 있습니다. 상대방의 귀와 눈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거짓말을 하거나 위선적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거짓말을 하거나 위선적인 행동을 할라치면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 제 자신과 상대방의 자리에 앉아서 주체인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객체로서의 제 자신이 충돌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은 이러한 체험을 자주 못합니다. 사제로서 살아가면서 이러한 체험들이 일상적인 것이 된다면, 형제자매들과 서로 다른 삶의 방식에서 오는 차이들을 극복하고 더욱 진솔하게 만날 수 있을 텐데,
알게 모르게 뱉어내는 권위적인 말이나 행동들을 자제하고 정말 흉허물없는 만남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서 저 자신을 돌아보곤 합니다.
복음 묵상을 하다보면 이러한 경우들이 가끔 생기지요. 그 내용이야 어쨌든 값진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만남에서 저만 말하고, 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인간적인 한계이겠지만,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 예수님께 드리는 제 말과 행동을 듣고 보는 체험은 이러한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게 해줍니다.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렇게 힘없이 죽어 가신 예수님께 뭐라고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어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을 봅니다.
겉으로는 분명 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만, 십자가에 달려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 축 처진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손이 찢어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두 팔이 힘을 줄 수밖에 없는 상태, 심장을 누르는 압박 때문에 마지막 숨 한번 고르게 내쉴 수 없는 상태에서 저만치 아래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보다는 예수님의 찢어지고 미어지는 마음을 더 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저만의 불온한 느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제가 느끼는 예수님의 이 찢어지고 미어지는 마음, 저를 향해 한숨을 내쉬시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제 안에 담고 싶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저와 예수님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며, 저에게 더 간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의 이 마음이 저를 움직여 제가 다른 이를 향해 쉼 없이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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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저는 사제수품을 앞두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사제생활의 모토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많은 경우 그분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말씀만 거창하게 선택하고는 실천 없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기도하며 갈망했던 순수하고 귀한 열정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기를 다시금 청해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한결같이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도 소중하지만 한 마리 잃은 양이 결코 그 비중이 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야 하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은 아흔아홉에 마음이 가있지만 예수님은 잃은 한 마리의 양의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사람은 질보다 양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양보다 질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잃은 양을 찾고야 맙니다. 그리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과 같습니다.
죄인이었다가 회개하는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선한 많은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 편히 계시지 않으시고, 한 사람의 죄인을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어떤 죄인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비록 나쁜 길에 들어섰을지라도 그를 두고 슬퍼하시며 안쓰러워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겠습니다.
잃은 양은 바로 사랑을 잊고 사는 나, 주님을 잊고 사는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회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과의 만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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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15,6)
<회개하는 죄인이 되자!>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사제 성화의 날', 곧 이 땅에 많은 사제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목을 할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사제들과 믿는 이들이 닮아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예수님 친히 이 세상에 드러내신 마음, 복음 안에 드러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예수님의 마음'은 '측은지심인 가엾은 마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약한 이들, 곧 가난한 이들, 병자들, 죄인들을 향해 있는 마음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되찾은 양의 비유)이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에제34,15-16)
"우리가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로마5,6)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15,6)
'되찾은 양의 비유'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마음, 곧 양 백 마리 가운데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시는 마음, 그 양을 찾아 나서시고 찾은 다음 매우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실 것이다."(루카15,7)
예수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는 회개하는 죄인이 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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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간은 부정적 경험을 많이 기억할까요? 아니면 긍정적 경험을 더 많이 기억할까요?
듀크 대학의 브라이언 섹스톤 교수는 이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부정적 경험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한 상태이면 긍정적이고 평범한 일을 인식하는 감각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피곤할 때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잠을 자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스트레스와 피곤을 잊게 됩니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Three Good Things’라는 프로그램이 나왔습니다. 일종의 행복 기록으로 그날의 멋진 경험과 그때의 감정을 적는 것입니다. 매일 세 가지씩을 기록하면 평소 무심코 지나쳤을 작은 기쁨과 소소한 기쁨을 인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스트레스와 피곤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좋은 일 3가지. 적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좋은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찰을 힘들어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습관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크고 대단한 곳에서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주님을 찾지 못한다면,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우리도 아닌 광야에 놓아두었다는 것은 그냥 방치해놓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서 방황하고 있을 때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만을 찾으면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늘 함께합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기억보다는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와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제로 지내는 예수 성심 대축일은 주님의 사랑 가득한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사랑받음을 강력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은 자기 역시 다른 이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실천하는 우리의 사랑을 통해, 주님 안에서 함께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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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십시오>
- 머무름, 찾음, 기쁨 -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예수성심을 공경하고 예수성심의 신비를 묵상하는 6월 예수성심성월의 절정을 이루는 오늘입니다. 예수성심은 그대로 하느님 성심입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난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성심과 하나될 때 만사형통萬事亨通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예수성심신심입니다. 자주 부르는 예수마음이란 성가 199장을 조용히 불러 봅니다.
“예수마음 겸손하신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하소서.”
수도원 십자로 중앙 ‘늘 거기 그 자리’에 서있는 예수성심상이 한결같은 예수님 사랑, 하느님 사랑을 보여줍니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환대하며 하시는 말씀이 바위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성심의 사랑만이 우리의 근원적 두려움을, 불안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의 빛만이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의 역사가 자못 깊습니다. 예수성심공경은 성경에 근거하고,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교회의 전통적 신심입니다.
초세기의 여러 교부들은 창에 찔린 예수님 심장에서 구원의 물과 피가 흘러내렸다고 해서 예수성심을 성령과 함께 초자연 은총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물은 세례를, 피는 성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믿었으며 이 둘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의 샘, 성사의 원천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1673년 12월27일부터 1675년 6월까지, 성녀 말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 수녀에게 70회 발현하시며 메시지를 주셨고, 그후 교황들은 이를 받아들여 공적 공경을 허락하였으며 마침내 교황 비오 9세는 교회 축일로 선포합니다.
예수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이고, 성체성사는 예수성심의 가장 완벽하고 탁월한 표현입니다. 성체성사는 제대상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고, 당신 자녀들을 영원히 살리고자 하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발현하신 예수님께서 말가리타 수녀에게 주신 특기할만한 메시지입니다.
“내 거룩한 마음은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너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내 성심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홍수를 퍼부어 성덕과 구원의 은총으로 그들을 부요하게 하고, 마침내 멸망의 구렁에서 건져내려 한다. 보라, 사람들은 이렇듯 사랑했고, 그들에게 이렇듯 많은 은혜를 베풀었건만, 이 무한한 사랑에 대해 오직 배은망덕만 당하는 이 성심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성심에 관한 역대 교황님들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희망을 둘 곳은 예수성심뿐이다. 우리의 모든 불행을 낫게 하실 이(비오9세), 위험중에 있는 인류의 유일한 피난처(비오10세), 모든 신심의 종합이요, 더욱 완전한 생활규범(비오11세)이 예수성심이다.”
이어 ‘성심의 교황’으로 불리는 비오 12세는 “예수성심신심이야 말로 매우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탁월한 방편이요, 현대 사회에 가장 긴요하고 적합한 신심으로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험있는 학교”라 불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그 방법을 알려 줍니다.
첫째, 예수성심의 사랑안에 머무르십시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영적 쉼터인 예수성심 안에 머물러 예수성심의 사랑을 관상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성심의 모범이자 대가입니다. 오늘 제2독서 로마서 말씀은 바오로의 예수성심의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아드님의 죽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그러니 예수성심의 사랑안에 머물러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는, 예수성심과 하나되는 성체조배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둘째, 예수성심의 사랑을 찾으십시오. 참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찾는 사람은 성체성사를 찾으며, 방황하는 형제들을 찾아 나섭니다. 이 미사중 아름다운 감사송이 예수성심의 정체를, 예수성심을 찾는 영혼의 모습을,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묘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흡사 어머니 교회에서 평생 영적 젖을 빠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참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찾아 해갈된 영혼들은 길잃어 방황하는 형제들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의 착한목자 하느님은 예수성심의 예표입니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붇돋아 주겠다.”
새삼 이런 사명을 위해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착한목자 하느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바로 아흔아홉마리 양들을 광야에 놓아둔채 잃은 양 한마를 찾아 나서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잃은 양은 물론이요 우리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셋째, 예수성심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잃은 양 한 마리리를 찾고 기뻐 환호하는 예수 성심의 기쁨은 바로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환성歡聲이자 하느님의 환성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을 절정을 보여주는 다음 복음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참 기쁨은 예수성심의 사랑과 하나되어 길잃어 방황하는 형제들을 주님의 교회 공동체에 합류시킴에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십시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예수성심의 사랑을, 성체를 모심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1.머무르십시오.
영원한 안식처인 예수성심의 사랑안에 머무르는 관상이 우선입니다.
2.찾으십시오.
자주 미사를 찾아 예수성심과 하나되는 것이요,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길잃어 방황하는 영적 난민難民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길잃은 ‘양 하나’가 아니라 대부분 방황하는 ‘양떼들’ 같은 현대인들입니다.
3,기뻐하십시오.
만남의 기쁨, 찾음의 기쁨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이 바로 은총의 샘, 기쁨의 샘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이, 기쁨의 사도가 되어 파견될 때 필시 찾음의 기쁨도 뒤따를 것입니다. 헤매는 많은 이들이 우리의 기쁨과 평화를 찾아 올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습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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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x5Blcnwo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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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 6)
마음의 주소를
찾는 시간이다.
예수 성심께
마음의 길을
다시 묻는다.
우리 삶의
중심에는
우리를
살게하시는
예수 성심이
계신다.
예수 성심은
끊임없이
사랑과 용서를
우리들에게
건네시며
베푸신다.
지극한 사랑은
지극한 정성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이시다.
마음은 열어야
마음이다.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은
서로를 헤아리는
진실된 마음이다.
깨어있는 마음은
잃어버린 양을
몸소 찾아 떠나고
위하는 열린
마음이다.
열려있기에
낮아지고
낮아지기에
서로를
아낄 수 있다.
예수 성심을
닮아가는 것이
참된 우리들
신앙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
우리의 본모습은
우리들
참된 마음에 있다.
우리들 마음을
기다리시는
예수 성심이시다.
예수 성심께
지쳐있는
우리 마음을
봉헌한다.
진실한 기도
참된 실천
이 모든 것은
예수 성심의
간절하신
마음이다.
간절하신 마음은
회개로
지극하신 마음은
독단과 편견
합리화를 겸손된
열림으로
거룩하신 마음은
새마음으로
바꾸어주신다.
끊어진 마음의 길
서로의 관계를
이어주시는
예수 성심이
우리를 아름답게
정화시켜 주신다.
예수 성심에서
길을 찾고
마음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에서
마음을 회복한다.
날마다
열리고
나누는
마음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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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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