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영의 「밀과 보리」깊이 읽기 / 박남희
밀과 보리 유계영 밀폐용기 속의 씨앗이 나에게 알려준 것이 있다면 1. 마음은 축축하게 가꿀 것 2. 몸은 힘껏 개방할 것 3. 시간이 흘러가게 할 것 언제나 축축하고 열려있는 눈동자에서 사물이 태어나는 이유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만으로 발생하는 것은 없으므로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에겐 자신의 티셔츠 속에 고개를 처박고 고함칠 일도 없을 것이다 등허리에 꽂힌 시계초침을 뽑으며 나는 재빨리 늙어간다 씨앗 한 톨이 씨앗 한 톨보다 크게 폭발하는 것에 왜 아무도 놀라지 않는 것일까 ................................................................................................................................ 일반적으로 밀과 보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보라고 하면 쉽게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밀과 보리를 식용으로 사용할 때 밀은 일반적으로 가루의 형태로 사용하고 보리는 쌀처럼 알곡의 형태 그대로 사용한다. 그것은 밀은 쌀이나 보리와는 다르게 단단한 껍질로 쌓여 있어 쉽게 벗겨지거나 깎이지 않고, 껍질을 벗겨내도 식용으로 이용되는 알갱이가 너무 부드러워 쌀이나 보리처럼 알곡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어려워서 가루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습기가 있어야 발아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유계영의 시 「밀과 보리」는 밀폐용기 속에 들어있는 씨앗들(밀과 보리)이 어떤 환경 속에서 발아가 잘 되는지를 “1. 마음은 축축하게 가꿀 것 2. 몸은 힘껏 개방할 것 3. 시간이 흘러가게 할 것”등 세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유계영 시인이 밀과 보리를 단순한 대상이 아닌 의인화된 주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 시의 시적 대상인 ‘밀과 보리’를 단순한 식물의 차원을 넘어 화자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은유로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자는 2연에서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 이유로 “언제나 축축하고 열려있는 눈동자에서 사물이 태어나”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그러면 여기서 “언제나 축축하고 열려있는 눈동자”를 지닌 존재는 누구일까? 축축하다는 것은 감정이 메말라 있지 않다는 것이고 열려있다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편협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 시가 지시하는 대상은 일차적으로 시인에 가깝다. 더욱이 “공간과 시간만으로 발생하는 것은 없으므로//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에겐 자신의 티셔츠 속에 고개를 처박고 고함칠 일도 없을 것이다”는 진술을 참고하면, 이 시의 밀과 보리가 상징하는 주체를 시인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는 일차적으로 메타 시로 읽힌다. 하지만 ‘축축하고 열려있는 눈동자’나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 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해보면 ‘연인’도 이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사랑 시로도 읽힌다. 이 시에서 화자는 밀이나 보리가 자라는 모습을 “등허리에 꽂힌 시계초침을 뽑으며 나는 재빨리 늙어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등허리에 꽂힌 시계초침”은 무얼 상징하는 걸까? 밀과 보리 씨앗의 외관을 고려하면 씨앗의 중간에 세로로 나있는 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허리가 상징하는 젊음과 늙음의 시간적 계기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시를 단순히 곡식을 발아 시키는 과정이 아닌 메타시나 사랑시로 읽히게 하는 것은 이 시의 마지막 연 “씨앗 한 톨이 씨앗 한 톨보다 크게 폭발하는 것에/ 왜 아무도 놀라지 않는 것일까”라는 화자의 반문 때문이다. 시나 사랑은 공통적으로 작은 것을 엄청난 크기로 증폭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밀이 여러 겹에 싸여있는 신비롭고 말랑말랑한 존재라면 보리는 단단한 알갱이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속성이 공통적으로 시와 사랑의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 시의 다중 시적 성격이 드러난다.
―《아토포스》 2023년 여름호 ----------------------- 박남희 / 1956년 경기 고양 출생.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시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고장난 아침』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