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요9:16절로 넘어갑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분쟁이 있었더니”
바리새인들은 소경이 눈을 떤 일보다 안식일에
대한 언쟁을 벌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두움의 사람의 문제이며 바로 어두움의 상징입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진리를 안다거나
그 사람이 생명의 복음을 받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교회법을 안 지킨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뒷전이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날 눈을 뜨게 했다고 시비를 겁니다.
이게 바로 육신이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사고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유대교 율법주의에 저촉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안식일 날에 그런 일을 했나 이게 바로 육신적인 사람이란 증거입니다.
건너뛰어서 요8:3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하십니다.
사람이 보게 되면 그 눈이 효력이 있어서 보고, 듣고 믿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보지 못하면 보지도 말씀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어두움으로 인해 멸망의 길로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느냐, 못 보느냐 이게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입니다.
만약 보이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합니다. 틀림없지요? 맞습니다.
살림에 있어 눈이 보배란 말이 있습니다. 내 눈이 성하면 온몸이
성할 것이요. 내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라.(마6:22-23)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것이 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하늘의 보화를 볼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알아야 합니다.
땅의 보화만 보는 사람은 하늘의 보화를 보는 눈이 감겨버린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도 찾을 수도 두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눈이 보배란 말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성령님은 온 땅에 보낸 눈이요 일곱 영이라고 말씀합니다.(계5:6)
따라서 성령을 받는 방법을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이 소멸되지
않기를 항상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성령님을 존중히 여기고 경외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나의 믿음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눈, 일곱 영, 완전한 눈이요 완전한 영이란 말입니다.
나를 발견하게 하고, 주변을 발견하게 하므로 성령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진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고, 우리의 능력이 되고, 우리의 지혜가 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왜 기도가 안 되고 나는 왜 찬송이 안 되고,
나는 왜 이렇게 말씀도 안 보이고, 나는 왜 전도도 안 되고,
나는 왜 무기력하고 자신감도 없고, 나는 왜 쉽게 피곤해 지고
부끄러움을 잘 타고 있는가?” 그것 뭐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성령님만 계시면 모든 것이 OK! 입니다. 모든 것이 다 된다는 말입니다.
요3장에서는 구원과 정죄가 같이 나옵니다.
그 다음 요9장에서는 구원사역과 심판이 나옵니다.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고, 보는 자를 소경되게 하려 하십니다(요9:39)
본다는 말은 바로 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관점과 하나님의 관점,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성경은 죄인인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을 같이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성경이 보입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이렇게 안 됩니다. 성령님의 내주역사가
아니고는 죄인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을 동시에 볼 수 없습니다.
성령님만이 내 관점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다시 내려다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여 계신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가정교사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세자 책봉을
받아서 왕세자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안다, 본다’는 말을 자기 관점에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기관점에 있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를 보지 못합니다. 자기 주관에 갇힌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못 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를 못 보기 때문에
늘 자기주장만 하고, 틀에 박힌 소리 밖에는 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관점은 교리 같은 전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오래하고 장로, 권사가 되신 분들 중에 늙은이
무릎 세우듯이 늘 자기관점에서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참 난감하죠.
그리고 교단의 전통을 지킨다든가, 교리적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도 자기관점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을 아무리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자기관점이 수건이 되어 그만 눈이 가려져서 안 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받아 자유를 얻으려면, 일단 죄와 육체에서
자유를 얻어야 하고, 그다음에 교리의 지식에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장로교단에서는 장로교에서 자유를 얻어야 하고, 침례교단은 침례교에서
자유를 얻어야 하며, 오순절 교단은 오순절교에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오순절교단의 목사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그분이 요즘은 장로교가 자기들(오순절 교단)의 성령론을 가지고
가서 공부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 오순절교가 생기고
성령님이 계셨구나 오순절교는 태초부터 있었구나 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늘 자기들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니 성령론이 풀리겠는가요?
칼빈은 성령론 학자라고 말들을 합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한번 보세요. 성령에 관하여 철저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에 대해서 강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이사이
구구절절에 성령님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가 증거한 말씀을 3년 정도 듣고 익히다가
하는 말이 목사님은 성령을 빼 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네 하더군요.
바로 그겁니다. 칼빈도 성령님을 빼버리면 칼빈의 지식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 40절을 봅시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맹인인 줄 모릅니다.
지금도 수많은 신학자들이, 목회자들이, 신앙인들이 자기는
맹인이 아닌 줄로 알고 있는 믿는다고 설치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참 제자가 되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주변을 한번 가만히 살펴 보세요. 말은 잘난 체 하고,
아는 체하고 똑똑한 체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 사람은 맹인이구나
하고 생각이 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수두룩합니다.
근데 소경하고 같이 있으면 우리가 답답합니다.
말을 해보고 답답함을 느끼면 맹인하고 같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맹인하고 눈 떤 사람과 싸우면 맹인이 우겨 늘 이깁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우리가 답답한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라든가
그 사람하고 의견이 안 맞아서가 아니라 맹인을 보고 있는 것만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참 답답해요. 차라리 내가 눈을 감고 다니는 것이
낫지 눈감고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람을 보면 내가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차라리 내가 그들을 업고 다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들은 다 보인다는 겁니다.
다 본다고 그리고 말씀을 듣고 은혜도 받고 다 한다는데 기가 막힙니다.
그 다음에 요8:41절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못 본다고 하면 될 일을 본다고
우기니 죄라는 말입니다. 소경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까지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바디매오와 같이 주여 불쌍히 여겨 보게 하소서 하면 눈을 떠서
삭개오처럼 주님 앞으로 달려가 집으로 모셔 들이고 구원을 받게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