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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or Piazzolla - Adios Nonino
(아스토르 피아졸라 - 아디오스 노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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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or Piazzolla - Adios Nonino
Astor Piazzola interpreta "Adios Nonino" con la Sinfónica "Cologne Radio Orchestra" de Alemania. Extraído del documental "Astor Piazzolla: The Next Tango"
아디오스 노니노 아스토르 피아졸라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독일의 교향곡 "콜로네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함께 "아디오스 노니노"를 공연합니다. 다큐멘터리 "아스터 피아졸라: 넥스트 탱고"에서 발췌했습니다.
피아졸라가 돌아온 1960년 당시 아르헨티나는 날로 바뀌고 있었다. 페론 정권이 군부 쿠데타로 무너지고 그렇게 세운 정권이 또 무너지고, 탱고도 로큰롤과 포크의 인기에 치여 시들해지고 있었다. 피아졸라는 이 혼란기를 기회로 삼았다. TV 출연으로 인지도를 쌓았고, 카바레 대신 등장한 소규모 탱고 클럽에 출연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그의 팬과 안티 사이에 대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번은 TV 스튜디오에서 피아졸라와 그의 안티가 우연히 만나 시비가 붙기도 했고, 택시 기사가 '니 탱고가 탱고냐'며 승차 거부를 했을 정도. 그 와중에도 피아졸라는 티피카 악단,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에 이은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 퀸테토 누에보 탕고(새로운 탱고 5중주단, 이하 5중주단)를 새로 결성하고 활동에 나섰다. 1961년 하마이카 클럽에서 처음 공연을 시작해서 1962년 676 클럽으로 무대를 옮겨 공연을 하였는데, 청중 수는 들쭉날쭉했지만, 천천히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새로 주자들을 영입하여 옥테토 콘템포라네오(현대 8중주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실험이기 때문에 몇 달 활동하고 5중주단으로 돌아갔지만, 평은 좋았다. 이 무렵의 성공으로 지방 순회 공연도 다니고, 유럽 순회 공연도 기획을 하였다. 같은 해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작품인 '포르테뇨 탱고 풍의 3악장(Tres
movimientos tanguísticos porteños)'이 파울 클레츠키의 지휘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고 히르시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5년에는 아르헨티나 문화 홍보 차원에서 미국, 브라질을 방문하여 콘서트를 열었는데, 오히려 본국에서보다 평이 좋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함께 공동 작업하여 앨범을 내기도 하여 마침내 첫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클래식도 가끔씩 작곡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무렵부터 부부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피아졸라가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66년 두 부부는 별거하고, 이혼이 합법화될 때까지 사실상 이혼 상태에 있다가 1988년에 가서야 공식적
으로 이혼한다. 별거를 시작한 이후 피아졸라는 더 신이나서 합법 바람을 피웠고, 그 와중에도 별거 중인 아내와 밀당을 시도하면서 양다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사는 그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서 1966년부터 67년까지 2년동안 영화음악 두 곡을 제외하고 아무 작품도 쓰지 못했다. 새로운 반전은 1968년에 찾아왔다. 시인 오라시오 페레르를 만나 5중주단도 해체하고 함께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다. 오페레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María de Buenos Aires)'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작업을 이어갔지만 1968년 5월의 초연은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 4개월만에 막을 내렸고, 피아졸라는 빚더미에 올라앉는
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피아졸라는 새로 창작열을 얻고 5중주단을 부활시키고 6중주단도 새로 결성한다. 1968~69년에 관현악 편성으로 작곡한 '탕가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한 변주곡 (Tangazo: Variations on Buenos Aires)'이 미국 워싱턴 D.C.에서 초연되었다. 페레로와도 계속 함께 작업해 '바친의 젊은이', '광인을 위한 발라드' 등의 히트곡을 작곡한다. 특히 '광인을 위한 발라드'는 4달만에 15만장을 팔아치우고 전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린다. 이러한 활동은 1971년까지 이어졌고, 페레로와 함께 '전주곡 3부작'을, 단독으로 순수 기악곡인 모음곡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Cuatro Estaciones Porteñas)'를 작곡한다. 그러던 중 1971년,
피아졸라는 돌연 5중주단을 해체하고 유럽으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빡빡한 공연 일정을 명목으로 5개월간 파리로 여행을 떠난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새 앨범 '퀸텟을 위한 협주곡(Concierto para quinteto)'을 작곡하고, '콘훈토 9'(이하 9중주단)이란 9중주단을 결성한다. 이 밴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청의 지원을 받고 1971년 첫 해외 공연과 72년 앨범녹음을 하며 성장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시 정부와의 계약 이행을 위해 지방 순회공연을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1972년 4,5월에는 해외 연주여행을 떠나 이탈리아, 브라질에서의 공연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당시 피아졸라는 자신의 콘훈토 9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인 나
카르 협주곡(Concierto de Nácar para nueve tanguistas y orquesta), '바르다리토(Vardarito)', '더블 A의 비가', '숨', '3×4'12, '히피에게 보내는 송가', '40에의 오마주', '9 시리즈', '코르도바의 오마주' 등 명곡을 쏟아내는 등 리즈시절을 찍었다. 그러나 9중주단은 시청으로부터 지원이 끊기면서 와해되었고, 피아졸라는 다시 5중주단으로 복귀한다. 밴드의 와해, 복귀 후의 평론가들의 혹평,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돌아온 페론주의 정권으로 인한 혼란 등이 겹치면서 피아졸라는 정신적으로 흔들린다. 거기에 국내 무대도 줄어들면서 피아졸라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해외에서도 러브콜을 받는다. 하지만 애인 아멜리타의 반대로 이주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곡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거의 아무 작품도 쓰지 못하였고, 결국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다행히 목슴을 건지고 생명에도 지장이 없어 1972년 10월 퇴원하지만, 피아졸라는 이 일이 있은 후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Tine Thing Helseth - Libertango (March 8th, 2013)
(타이닝 헬세스 - 리버탱고 (2013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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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stor Piazzolla, arranged by Øivind Westby. Orchestra conducted by Halldis Rønning. From the 100th anniversary celebration concert for women's right to vote (in Norway), at Kilden Theatre and Concert Hall in Kristiansand, March 8th, 2013.
Stemmerettsjubileet, festkonsert i Kilden.
작사: 아스토르 피아졸라,
편곡: 오이빈드 웨스트비. 할디스 뢰닝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2013년 3월 8일 크리스티안산의 킬덴 극장 및 콘서트 홀에서 열린 여성 투표권 100주년 기념 콘서트(노르웨이). 스템메리트 쥬빌레에, 페스트콘세르트 킬덴.
피아졸라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후 이주를 결심한다. 1973년 이탈리아인 에이전트 알도 파가니와 계약 후 같은 해 3월 이탈리아 TV 출연을 시작으로 유럽을 주무대로 삼는다. 이 당시 방송용 소곡들을 주로 작곡하였는데, 그것들이 바로 '리베르탱고', '메디탱고', '트리스탱고', '비올렌탱고', '아멜리탱고' 등의 걸작이다. 그 외에도 브라질 순회 공연, 색소폰 연주자 제리 멀리건과의 공동작업 모두 성공하면서 피아졸라는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1975년에는 칸 음악제에서 '로큰롤은 한계에 달했다. 영국인들의 침략도 이제 끝이다.'라며 설레발을 쳤을 정도. 또한 에바 페론을 소재로 한 오페라를 기획했으나, 안타깝게도 어떤 영국인 양반이 초
대박 뮤지컬로 먼저 침을 발라놓는 바람에 시망. 그는 후에도 그 작품을 보고 재미있다고 호평하면서도 '내가 만들었으면 더 잘 만들었을거다'라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나…. 이탈리아 외에도 피아졸라는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등을 돌아다니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75년 로마시에서 황금금수상을 받는 등 영예를 누린다. 그러나 고국 아르헨티나의 정치 사정이 악화되면서 향수병이 도졌고, 분위기 전환을 위해 다시 이주를 계획한다. 그러나 영 좋지 못한 일이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오랜 세월 반 파트너, 반 연인 관계로 지내던 아멜리타와 결별한 것. 이 일로 피아졸라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고, 그녀의 이름을 딴 곡 '아멜리탱
고'를'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음악'으로 개명하고 그녀의 이름을 자기 앞에서 꺼내지 못하게 하는 등 그녀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다른 한 편으로 그의 오랜 맞수인 트로일로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그에게 헌정하기 위해 모음곡 '트로일로(Suite Troileana)'를 작곡했고, 이 작품이 그의 영화 음악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Il pleut sur Santiago)', '뤼미에르(Lumiere)'와 함께 그 당시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975년 중반에 들어서서 피아졸라는 다시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전자 음악에 도전한 것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의 전자음악과 재즈의 퓨전에 영향을 받은 그는 신시사이저와 전자 악기를 이용한 실험을 하였고, 1975년
9월에는 아르헨티나로 귀국해 새로 전자 8중주단을 결성한다. 신시사이저, 전자 오르간, 일렉 기타 멤버들을 포함하고 즉흥 연주를 허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 이 8중주단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보수적인 기존 팬들로부터 거하게 욕을 퍼먹기도 했지만,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피아졸라도 크게 만족했다. 이후 북미, 유럽을 돌며 연주와 창작에 전념하던 피아졸라는 1977년까지 전자음악, 락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500 모티바시오네스' 등의 명곡을 발표했지만, 1977년을 기점으로 다른 멤버와의 갈등 등으로 8중주단 역시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1978년에는 그 해 조국에서 거행된 월드컵을 위해 작곡을 하였으나 그 해 월드컵은…. 결
국 그 곡들은 모두 월드컵과 관계 없게 제목갈이를 해야 했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8중주단을 포기하고 5중주단을 새로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만들고 깨지고 만들고 깨고…… 새로운 5중주단은 전자음악을 버리고 다시 어쿠스틱한 실내악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안티가 많았지만 해외 반응은 성공적이었고, 5중주단 활동기 동안 '친친'네?, '비유야'등을 작곡하며 작곡가로서도 건재함을 드러냈다. 1979년 초연된 반도네온 협주곡 (Concierto para bandoneón y orquesta)과 1980년 초연된 반도네온과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가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1980년, 다시 해외 활동을 위해 파리로 다시 이주, 5중주단과 함께 유럽 순회 공연을 하는 등 공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80년대 후반에는 영미권 활동에 주력하여 몽트뢰,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여하는 등 여러 장르에서 환영받는 명실상부한 국제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5중주단을 거의 갈아넣다시피한 고된 일정을 소화, 88년 심장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즈음 5중주단도 해체하고 회복 후 6중주단을 다시 결성한다. 또…. 이 당시의 음악은 건강 악화의 영향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6중주단은 이전 못지 않은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90년대에도 그
러리라고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팬들도 믿었다. 1990년 7월 3일 그리스 아테네의 헤로데스 아티쿠스 야외 음악당에서 그리스 작곡가이자 지휘자 마노스 하지다 키스가 지휘한 크로마톤 오케스트라와 생애 마지막이 된 공연을 가진 뒤 파리로 돌아와 다음 공연을 준비하던 피아졸라는 8월 5일 샤워 중 뇌출혈로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어 쓰러졌고, 결국 급히 치료를 받은 뒤 귀국해 오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비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폐렴과 장출혈 등의 질환까지 겹치면서 1992년 7월 4일에 향년 71세로 타계했다. 장례 후 유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평화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끌었던 밴드의 일원이었던,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인 Daniel Binelli는 말했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표현하는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피아졸라는 반도네온으로 표현된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의 음악, 바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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