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년생 시절 기자로 일하면서 익힌 습관 중에 지금까지도 유용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얘기되는 무언가'에 흥미를 느끼는 감각이다.
예를 들어 봄에 피는 벚꽃은 아름답지만 너무 당연해서 조금 심심하다.
여러 지자체가 경쟁하듯 조성한 벚나무 가로수길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가을벚나무는 어떨까?
가을철 수목원을 찾은많은 탐방객이 개화한 가을밪나무를보며 기후변화를걱정하지만,
사실 기후변화와는 상관없이 가을에도 꽃을 피워서 가울벚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나무다.
나무의 독보적인 특성을 발견하고 나면 그 나무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다.
수목원의 계절도 마찬가지다.
한겨울 붉어지는 열매, 깊게 패이거나 벗겨지며 저마다의 특성을 드러내는 수피, 나무 전체의 수형...
흔히 '볼 것 없는' 계절이라는 오해를 받지만, 겨울은 추울수록 아름다운 나무의 특성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시기다.
그중에서도 겨우내 알록달록한 색채의 가지로 정원을 밝히는 말채나무는 단연 겨울정원의 주인공으로 꼽을 만하다.
말채나무는 층층나무과의 낙엽활엽수다.
봄에 돋는 뾰족한 타원형의 잎은 마주나는데, 4~5쌍의 잎맥이 나란히 나 있어 가지런한 인상을 준다.
5~6월 긴 수술이 돋보이는 흰꽃은 마치 푸른 잎 위에 흰 레이스를 수놓은 것 같은 독특한 질감을 준다.
꿀은 나비의 먹이가 되고, 열매는 새들의 먹이가 된다.
숲속에서는 빽빽한 말채나무 가지들이 소동물들의 은신처가 되어준다고 하니 다방면으로 미덕이 많은 나무다.
말채나무의 매력은 일년생 가지에 있다.
탄력이 좋고 잘 꺾어지지 않아 예로부터 말을 길들이는 채찍으로 썼다고 해 말채나무라는이름이 붙을 정도다.
말채나무가 정원수로 각광받는 이유도 그해 자란 어린 가지들이 겨울철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 등
다채로운 색상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정원수로 주로 사용되는 흰말채나무와 노란말채나무는 열매가 흰색이지만, 흰말채나무 노란색의 줄기를 가졌다.
붉은말채나무는 붉은가지와 검은 열매를 가진것으로 구분한다.
천리포수목원은 1973년 미국의 한 육묘장에서 최초로 흰말채나무를 들여온 이후
지금까지 28분류군의 말채나무를 정원수로 관리하고 있다.
2024년 한해의 마지막 금요일, 양손 가득 칼퀴와 삽, 전정가위를 든 가드너들이 겨울정원으로 모여들었다.
수목원 한가운데 자리한 351평 규모의 겨울정원 산책로를 따라 흰말채나무, 노랑말채나무, 붉은말채나무가
나란히 줄을 서 있다.
가드너들은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화단에 쌓인 말채나무 낙엽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그 위에 수십포대 분량의 바크(땅을 덮어주는 나무껍질 등의 천연 재료)를 깔아주었다.
시들었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말채나무 가지들을 잘라주고, 좁은 길을 따라 부산물을 모두 나르고 나서야
겨울정원을 정비하는 하루 업무가 마무리됐다.
'낙엽이 쌓인 모습도 자연스럽고 예쁜데 굳이 치워줘야 할까?'라는 의문은 금세 풀렸다.
낙엽보다 훨씬 짙은 고동색의 바크가 화려한 말채나무 가지와 어우러져 더욱 극명한 색상의 대비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정원이 전체적인 채도가 한껏 올라간 느낌이었다.
가지만으로는 자칫 허전할 수 있는 말채나무 아래에는 겨울에도 선명한 색을 유지하는 흑맥 문동과
오시멘시스사초를 심어 풍성한 볼거리를 더했다.
천리포수목원의 겨울정원은 과거 '씨앗밭(묘목장)이라고 불리던 공간에, 겨울에 아름다은 식물을 수집해
심은 것부터 시작되었다.
2018년 척박한 토양을 개량하고, 겨울정원에 어울리는 식물을 추가로 심는 작업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말채나무뿐만 아니라 멀리서도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납매, 가지끝에에서 세갈래로 갈라져 독특한 생김새의
꽃을 피우는 풍년화 등 다양한 겨울 식물들이 볼거리를 선사한다.
당연한 계절에 당연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것이 겨울정원의 매력인데,
그 아름다움이 부각되도록 식물의 장점과 미덕을 찾아주는 건 가드너의 역할이다.
겨울정원에서 큰 연못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 작은 나무 벤치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인 표찰이 있다.
'이 벤치는 1982년 5우러 31일에 씨앗으로 도입해자란 말채나무로 제작된 벤치입니다.
2020년 태풍 '마이삭'의 피해를 받아 도복되어 고사하였습니다.
태풍에 쓰러졌던 나무의 그루터기는 아직 남아있고,
잘린 나무의 한 귀퉁이에서는 새로운 말채나무 가지가 5년째 돋아 몸통을 키워 나가고 있다.
태풍이 휩쓰는 무더운 여름도,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는 혹독한 겨울도 당연한 듯 이겨낸다.
수목원 말채나무가 보여주는 자연의 마법이다. 황금비의 수목원 가드닝 다이어리 천리포수목원 나무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