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포 열차포
제2차 세계 대전중 독일군이 프랑스의 마지노 선을 공략할 목적으로 건조하였다가 대소련전 세바스토폴 공방전에 실전 투입한 괴물 열차포로, 실전에 직접 투입되어 사용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대포다.
정식명칭은 슈베어 구스타프. 독일어로 무거운(重) 구스타프 라는 뜻이지만 오히려 '도라'(DORA)라는 애칭, 혹은 도라 구스타프 열차포 라는 명칭으로 더욱 유명하다.
사실 원래 제작 목적은 독불국경에 늘어선 프랑스가 자랑하던 마지노 선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일반 야포탄으론 아무리 때려도 흠집이나 겨우 날 정도고 항공 폭격도 좀처럼 통하지 않을 정도였던 마지노 선이나 세바스토폴 요새같은 괴물들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이런 괴물을 들고 나오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거기다 당시 독일의 기술력으론 톨보이 , 그랜드 슬램 등 요새를 부술 정도로 크고 강력한 폭탄을 탑재할 중폭격기를 만들기 힘들었으므로 결국 열차포 개발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예상밖으로 광속 몰락한 덕분에(…) 이 포가 완성되기도 전에 프랑스전이 끝나고 말았다.
오로지 이 거포를 운용할 목적만으로 특수 제작된 철도차량에 의해 50여m 가까운 길이를 자랑하며 폭도 커서 혼자 움직이는데 2개의 평행 선로를 이용할 정도로 컸고, 그 거대한 철도차량 위에 35m 길이의 포신을 장비했다. 덕분에 구경 800mm 포탄을 최대 47km까지 발사할 수 있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고, 고폭탄을 쏴보니 크고 아름다운 버섯구름까지 만드는 흉악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 초월적인 구경만큼이나 전용의 800mm 포탄의 위력 역시 가히 규격 외의 괴물로서 4.8톤 고폭탄은 700kg 작약이 들어가있어 위력이 대형 항공폭탄에 필적했고, 80cm 철갑탄 사용시 포탄 내부에 채워진 250Kg 작약의 위력을 제외한 포탄 자체의 순수 운동에너지만 해도 1800MJ, 그러니까 약 18억J 이라는 말도 안되는 위력을 가졌다. 현대의 전차포들이 6~10MJ, 아이오와급의 16인치 주포가 262MJ임을 감안해보면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독일군 사이에서는 '큼지막한 버스'라고 불렸다. 간단히 말하면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열차에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대포를 얹어놓은 물건이다. 여기에는 기관차는 물론 대공포 화차도 추가되었고, 전용 철도가 필요했다. 또한 열차포 대다수가 비슷하지만 강력한 화포의 반동 통제 문제로 포의 좌우 사격각도 조정이 불가능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차포는 원형 철도 위에서 움직여서 방향을 바꾸는 식으로 운용되어야 했는데, 그나마 어지간한 열차포는 일반적인 단선철도 옆에 철도변환기와 원형 레일을 까는 정도로 운용이 가능(그래도 사전조치에는 1천 명 단위 철도전문공병과 1~2일의 시간이 필요했다)했지만 구스타프는 아예 일반 철도 이동 자체가 불가능해서 포를 조립하는 데 쓸 전용 철도선을 깔고, 그 위에서 포를 조립한 다음, 여기에서 원형 철도망을 추가로 연장해서 그 위에서 움직이게 해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진지구축작업만 3주가 소요된다. 게다가 포탄의 운동 에너지에 의해 발포 후에는 철로가 전부 구부러져 일일이 펴주어야 했다고 한다. 심지어 조작요원들에게는 특수 귀마개가 보급되었지만 귀마개가 무의미할 정도로 포성이 엄청났기 때문에 한 발 쏠 때마다 고막이 터져나갔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철도로는 이동은 커녕 조립조차도 할 수 없어서, 사실상 열차포라기보단 철도 설계 엔지니어를 사격통제장치로 쓰고, 철도와 건설노동자를 조준장치로 쓰는 대요새전용 초대구경 공성포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워낙 큰 포탄을 쓰는 관계로 포신의 수명이 매우 짧았다는 큰 단점이 있었다. 일단 50발 이상 사격하면 더 이상 의미 있는 수준의 명중을 보장하지 못할 정도였고, 그 이내라도 포탄 한 발을 쏠 때마다 조준이 심하게 흔들리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그 크기상 부품과 탄약을 제대로 조달하기 힘들다는 점과 조화를 이루면서 정확히 조준해서 일격에 명중시켜야 그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효율만 따지면 이러한 열차포를 한 대 만들고 운용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대형 항공폭탄을 운반할 수 있는 중폭격기를 여러 대 만드는게 더 효과적, 실용적, 경제적이었다. 아니면 미국이나 소련처럼 8인치 급의 중포를 다수 배치하거나.
상술했듯 프랑스가 망하면서 한동안 묻혀있다가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드디어 제 몫을 하게 된다. 소련 해군 흑해함대의 모항이자 이미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다져진 요새 중의 요새라 할 만한 소련의 세바스토폴 요새 공격시에 7톤에 이르는 철갑탄을 한발 쏘아 27m 천연암반을 관통해 안에 건설된 소련군 탄약고를 박살낸 것은 매우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 이견이 없지는 않은데,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명중당한 탄약고는 이미 내부의 탄약이 거의 소개되어 심각한 수준의 전력 저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통설로는 구스타프 열차포에 지급된 탄약이 철갑탄 1종류만 고작 48발 지급될 정도로 탄약이 적었다고 하나, 세바스토폴 공방전 말기에 고폭탄 5발도 추가로 보급되었다고 한다. 그 중 한 발이 시가지에 명중하자 너비 200미터, 높이 35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발생했고, 현장에는 폭 12m, 깊이 12m의 크레이터가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위력을 가진 포탄을 퍼부어도 소련군들을 전멸시키도 못했다. 애초에 구스타프 열차포를 포함한 요새용 중(重)포와 항공폭탄을 장착한 루프트바페들을 긁어 모아서 투입한 이유가 세바스토폴 자체가 크림 전쟁 이후 초중무장된 요새로 탈바꿈되고 거기에 더해 소련 흑해함대 함선들의 지원포격에 오데사 등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흘러온 정예병까지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군들도 엄청난 포격이 예정되어 있다는걸 알자마자 미친듯이 참호를 판 덕분에 주변 건물들이 죄 날아가는 상황에서 보병들은 버터낼수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말뚝을 박으러 온 독일 제11군을 상대로 시가전을 감행해 출혈을 강요하게 된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수백만 마르크를 들여서 1300톤의 대포를 만들어놓고 5년 동안의 전쟁 기간 동안 25번 발사한 거죠. 이 얼마나 비생산적인 일입니까?
- 이안 호그, 작가/무기학자.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비밀무기, 슈퍼 건>
이 기념할 만한 데뷔전 이후에는 줄곧 잉여한 생을 보냈다(…). 일단은 그 거대한 크기 덕분에 눈에 잘 띄는 표적이 되기 쉬웠고, 앞서 언급했듯이 부품은 말할 것도 없고 탄약도 제작 및 수급이 매우 힘들었다. 또한 포 자체의 조작요원만 250명에 달한 데다가 추가로 2,500명의 철도와 진지관련부대, 그리고 대공포 부대를 포함한 경호부대까지 따라붙는 그야말로 비효율과 인력낭비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 포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 필요한 필수 인력은 총합 4~5천 명으로, 대부분이 공병과 기타 철도 관련 기술자이기 때문에 사실상 1개 야전군급에서 굴릴 공병 및 병참유지관리 전문 병력이 이 포 한 문을 위해 돌려졌던 셈이다.
뭣보다 마지노 선 공격이나 세바스토폴 공방전 같은 특이한 대요새전이 아닌 밖에야 이런 괴물포가 필요한 일도 별로 없었다. 결국 어디 구석에 짱박히다가 이동했다가만 반복하다 1944년경 폴란드의 바르샤바 봉기시에 민간인들 머리 위에(!) 몇 발 더 쏘고는 얌전히 해체당하거나 혹은 독일군 자신의 손에 폭파 및 파기되어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나중에 일부 잔해를 연합군이 획득하기는 했으나, 이미 공군이 충실한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더 간편하고 위력이 훨씬 강한 지진폭탄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핵폭탄까지 제조중이었으므로 그냥 전리품 획득 수준에서 그쳤으며, 딱히 복원하지도 않았다.
포위 마지막인 7월 4일까지 3만톤의 포탄을 뒤집어 쓴 세바스토폴 시는 폐허가 된다. 구스타프는 이 때까지 실전에서 48발을 쏜 결과 포신이 완전히 마모되었다. 해당 포신은 그전에 테스트와 개발 중 250발을 쏜 상태였으므로 즉시 교체가 필요했다. 원래 포신은 에쎈의 크룹 사 공장으로 반송해서 재가공하면서 강선을 다시 팠다. 그 뒤 구스타프를 부품으로 분리해서 동부전선의 북부 구역으로 이동한 후 현장에서 재조립해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투입하려고 했다. 구스타프의 방열 위치는 레닌그라드에서 30km 떨어진 타이지 기차역 근처였으며, 공격이 취소됐을 때는 재조립과 점검을 마치고 완전한 작전 가능 상태였다.
공격은 취소되었지만 레닌그라드 근처에서 1942/43년 겨울을 보냈다. 그 후 1944년에 독일로 돌아가 수리 받았다. 다른 주장도 있지만, 1944년의 바르샤바 봉기까지 결코 쓰이지 않았다. 그곳의 폴란드 육군 박물관에 구스타프의 포탄 1발이 전시돼 있다.
이후 구스타프의 잔해는 1945년 4월 22일에 독일 동부 쳄니츠 남서방 50km 근처의 오이어바흐 북쪽 15km의 숲에서 연합군에게 발견된다. 잔해를 발견한 시점 이전에 독일군이 노획을 막고자 미리 파괴한 것으로 추측된다.
게르하르트 타우베의 저서에는 Schwerer Gustav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붙고, 야전에서는 흔히 Dora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이를 알 수 있는 자료중 하나로 세바스토폴에서 이걸 운용했던 제672중열차포대대의 부대마크에는 'Do'라는 글자가 적혀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최후에 대해서는 1943년 3월 17일에서 19일 사이에 시험장에서 4발의 포격을 실시한 후 동년 9월 경에 작센의 켐니츠와 가까운 아우어스발데 부근으로 이송된 후에 제672중열차포대대의 잔여 병력이 호위했다가, 종전이 가까워지고 미군의 진격이 임박하자 노획을 막기 위해 1945년 4월 14일부터 주요 부품을 폭파처리했다고 한다.
구스타프2
두번째로 생산된 대포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즉시 투입하고자 1942년 8월 중순 경 스탈린그라드 서쪽 15km의 설치 장소에 도착했으며, 분해 수송뒤에 야전에서 조립에만 3일간 250명이 동원됐다. 9월 13일에 포격 준비 상태에 들어갔지만 소련군의 포위망에 걸릴 것 같아 바로 후퇴했다. 또한 독일군이 기나긴 후퇴에 들어갔을 때 역시 2차대전 종전 전에 파괴되어, 슈베러 구스타프1이 발견된 얼마 후 서쪽에서 미군에게 발견됐다.
게르하르트 타우베의 저서에는 해당 대포는 Schwerer Gustav 2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붙었으며 1943년 2월 말까지 7발의 시험사격을 하였으나 실전에 투입되지는 않았다고 언급된다. 실제로 이 대포를 운용한 부대 명칭도 명확하지 않다. 실전에 투입했다면 당연히 이 대포를 운용한 부대의 명칭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 흔적이 없으니 결국 실전에서 운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 해당 대포는 시험사격후 뤼겐스발데에 보관되었다가 소련군의 진격이 가까워오자 1944년 8월부터 서부 방면으로 소개활동에 돌입했으며, 1945년 2월 경에는 Schwerer Gustav가 있는 아우어스발데로 이송중에 대포의 부품을 실은 3개 편성의 화차들이 오버리헤테나우, 마커스도르프-타우라, 람바흐-오버프로나 역에 정차된 채로 미군에게 공중정찰로 발각되었다. 뭔가 수상쩍은 거대무기라고 판단한 미국이 공군을 부르자 오비리히테나우 역에 있던 화차만 간신히 역을 떠나고 나머지는 역과 함께 방치되었고, 간신히 떠난 화차도 슈테겐툼자흐 부근의 철도 지선에 정차한 채로 주요 부품이 폭파되었다고 언급된다. 전후에는 파괴된 부품과 포신이 철도를 가로막아서 따로 철도를 부설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