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발낙지 / 정재규
짜디짠 바닷물과 갯벌 속에 뒤엉켜
필사적으로 삶을 이어가는 운명
때로는 태양 빛을 몰래 훔쳐보며
끓어오르는 힘을 모으나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입맛에 주눅 들고
갯벌을 휘젓는 어부들의 손끝이 매서워
미끌미끌한 몸뚱이는 땅속 깊이 파고든다
갯벌에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녹초가 된 세발낙지의 벅찬 숨소리가 가득하다
그래도 갯벌 깊숙한 흙속에서
겨우 참고 목숨을 부지했건만
처연한 모습으로 식탁에 올라와 있다
접시에 긴 다리를 바짝 붙여보지만
나무젓가락 사이에 끼어진 채 돌돌 뭉쳐져
입 속에서 일생을 마감하는 처연한 삶
갯벌 속에서 유영하던 강인한 힘은
사람들의 입속에서 힘겹게 녹지만
인간의 눈빛에 짓눌려 잡혀온 세발낙지는
온몸을 비틀며
있는 힘을 다해 갯벌로 달려간다
-- 시집 『마음에 선을 긋는다』 (도서출판 지혜) (근간)
* 정재규 시인
전북 김제 출생, 전주교육대학교 졸업 및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및 문학교육 전공
1996년 『文藝時代』 등단
시집 『나비는 장다리꽃을 알지 못한다』 『마음에 선을 긋는다』
현재 무정초등학교 교장
부산시인협회․부산문인협회․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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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여우가 물가에 다가가 물속을 들여다보니까, 수많은 물고기들이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너희들은 왜 그렇게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거니?”라고 여우가 물었다. “우리들의 목숨을 노리는 수많은 포식자들이 무섭고 두렵기 때문이지요?”라고 물고기들이 대답했다. “물속이 그처럼 무섭고 두려우면 물밖으로 나오렴! 내가 너희들의 목숨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보살펴 줄테니?”라고 여우가 제안을 했다. “여우님, 그처럼 어리석고 우매한 말씀을 하지 마세요. 한평생 살아온 물속도 알 수가 없는데, 우리들이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라고 물고기들이 대답을 하고, 모두들 다같이 여우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렸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의 한 대목을 내가 내 기억력을 토대로 해서 재구성해본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만큼 무섭고 두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물소와 영양과 사슴과 누떼 등의 초식동물이 보이지 않으면 사자들도 벌벌벌 떨게 되고, 푸르고 푸른 초지와 강물이 없으면 초식동물들도 벌벌벌 떨게 된다. 부모형제들이 없어도 벌벌벌 떨게 되고, 수많은 경쟁자들과 적들이 나타나도 벌벌벌 떨게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먹이사슬의 바다’에 내던져진다는 것이고, 삶이 상승곡선을 그릴 때에는 ‘희망의 찬가’를 부르게 되고, 삶이 하강곡선을 그릴 때에는 더없이 처량한 ‘슬픔의 비가’를 부르게 된다.
삶과 죽음은 먹이사슬의 바다에 있으며,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정재규 시인의 [세발낙지]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짜디짠 바닷물과 갯벌 속에 뒤엉켜/ 필사적으로 삶을 이어가는 운명”에 지나지 않으며, 언제, 어느 때나 “필사적인 몸부림으로”“녹초가” 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백수의 왕인 사자와 호랑이의 말로는 더없이 끔찍하고, 이 맹수들은 그토록 짧고 끔찍한 생애가 무섭고 두려워서 더욱더 그처럼 사납고 잔인하게 모든 짐승들의 생명을 찢어발기는 지도 모른다.
원수를 만나도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괴롭다. 산다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며, 기껏해야 “온몸을 비틀며/ 있는 힘을 다해 갯벌로 달려”가는 [세발낙지]의 운명에 지나지 않는다. 세발낙지의 운명은 저주받은 운명이며, 그 어떤 구원의 손길도 미치지 못한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고,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다른 생명체를 먹는다는 것이다. 먹는 자가 먹히는 자가 되고, 먹히는 자가 먹는 자가 된다. 사는 것은 기쁜 일이 되고, 죽는 것은 슬픈 일이 된다. 살고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일이지만, 그러나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들은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모든 생명체들은 이 ‘저주받은 운명’, 즉, ‘세발낙지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입맛에 주눅이 들고, 타인들의 입속에서 일생을 마감하는 처연한 삶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세발낙지, 즉 우리 인간들의 고향은 ‘먹이사슬의 바다’이며, 우리가 우리의 저주받은 운명을 이끌고 돌아가야 할 곳도 ‘먹이사슬의 바다’이다. 세발낙지는 세발낙지의 운명을 벗어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보고자 그토록 몸부림을 쳤지만, 그러나 그는 ‘저주받은 운명’, 즉, 결코 그 ‘먹이사슬의 바다’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발낙지]의 운명은 시인의 운명이고, 시인의 운명은 모든 생명체들의 운명이다.
이 ‘저주받은 운명’, 즉, ‘먹이사슬의 바다’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먹이사슬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해버리는 것이다.
산다는 것도 기쁜 일이고, 죽는다는 것도 기쁜 일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하여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졌고, {악령}의 끼릴로프는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신은 과연, 당신의 불운과 당신의 죽음을 더없이 즐겁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한국인은 미국인 앞에서 꼼짝 못하고, 미국인들은 대자연(죽음) 앞에서 꼼짝 못한다. 삶과 죽음 앞에서도 만물이 평등하고, 무서움과 두려움 앞에서도 만물이 평등하다.
- 반경환 (시인, 평론가) 명시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