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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골이야 오늘도 영하 7, 8도를 기록했지만 매서운 추위가 조금 누그러진 것이 완연하게 느껴집니다. 영하 10도 아래로 뚝 떨어졌을 때는 숨을 들이마시면 코가 아리고 볼이 얼얼하게 느껴졌는데 그때의 매서운 차가움에 비하면 한결 포근한 것 같습니다. 이런 산골에 살고 있는 나에게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묻더군요.
사실 이런 산골에 살면서 추위 때문에 문제가 없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할 것입니다. 편의점에 출근을 했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컨테이너 안은 차가운 바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난로는 불이 꺼져서 싸늘하게 식어있고 이불을 깔아둔 바닥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을 담아둔 그릇도 꽁꽁 얼어붙었고 양말을 신고도 컨테이너 바닥은 깜작깜작 놀랠 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집니다. 그러기에 서둘러서 장작을 들이고 불을 피우지만 한 시간쯤은 지나야 비로소 온기가 돌기 시작하지요.
이런 추위는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하는데 아침 출근 때,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번 추위로 벌써 세 번이나 문제가 생겼기에 그때마다 보험회사의 긴급출동 서비스를 불러야 했습니다. 한 번은 읍내의 카센터까지 견인을 해서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차가 있지만 추위만 닥치면 손을 놓고 쳐다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회사의 고객센터로 전화를 해봤습니다. 무슨 좋은 대책이라도 일러줄까 기대했는데 고작 서비스센터로 연결해주더군요. 서비스센터의 대답도 걸작이었는데, 문제가 있으니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게 분명하니 정비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는 운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날이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데 점검해서 부품을 하나하나 교체해 보자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평상시에 잘만 운행할 수 있는 차의 부품들인데도 괜히 돈 들여서 교체하고 비용은 제가 부담하라는 말입니다. 돈에 여유가 있다면 부품 교체가 아니라 아예 차를 교체하고 말지 왜 시간 낭비하면서 성가시게 고객센터로 전화를 했겠어요?
내 차는 기아자동차에서 나온 1999년식 카렌스 엘피지 차량입니다. 카렌스는 아직도 시판되는 기종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능이 개선되어 겨울의 시동 문제도 해결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카센터의 말에 의하면 겨울의 시동 문제는 구형 엘피지 차량의 고질적인 문제라서 부품을 교체해도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고 강추위에는 속절없이 또 문제가 발생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구형 엘피지 차는 영하 10도 아래에서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 '불량품'이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출시 당시에는 좋은 차라고 광고를 했겠지만 성능이 개선된 지금의 차와 비교하면 말입니다.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회사 측에서 도움은커녕 엉뚱한 말로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인상을 받게 되니 조금 서운했습니다. 좋은 회사라면 세월이 지나도 자신의 제품에 대해서 책임과 정성을 다할 테니 말입니다.
겨울은 한참이나 남았으니 앞으로 날씨는 더 추워질 것이고 이 산골은 영하 10도가 아니라 20도 아래로 뚝 떨어질 날들도 많을텐데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래서 요즘 나에겐 큰 숙제가 하나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할 테니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엄숙하고도 신성스러운 일 일 텐데 한낱 차의 생명이라 한들 쉽기야 하겠습니까? 산속에서 살면서 욕망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면서 당장은 불편해도 참고 살아갈만했는데 이런 문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돈이 없고 가난하다는 것이 때로는 이렇게 큰 불편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그 답도 존재하는 것이 세상 아니든가요? 자신에게 닥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한 단계 더 발전하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저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차와 집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차지만 나를 세상으로 묵묵히 데려다 주었고 어떤 혹사에도 군말 없이 자신의 성능대로 책임을 다해 왔거든요. 또 컨테이너 집일지라도 산속에서 나를 기다리는 유일한 보금자리가 그 집이니까요.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월든이라는 호수 옆에 손수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폭이 3미터에 길이가 4.5미터에 지나지 않았기에 방 하나 정도의 작은 집이었습니다. 집을 짓는데 필요한 통나무는 근처에서 나무를 벌목했고 벽을 만들 판자는 낡은 판자집을 하나 구입해서 옮겨왔습니다. 인적이 끊긴 호수의 외딴곳에 있는 그의 집은 대학 기숙사의 일 년 치 방세 정도가 들었는데 지금의 돈으로 환산해도 500만 원은 넘지 않았습니다.
그 집 외부는 남들에게 좋게 보이기 위한 어떤 장식도 하지 않았기에 태풍이 불어도 날아갈 것이나 신경이 쓰일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작고 소박한 집이었지만 책을 읽고 사색을 하면서 혼자 살아가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자신의 집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돈과 시간을 쏟아붓고 있습니까? 소로우는 3월 말경에 도끼 한 자루를 들고 호숫가로 들어가서 7월에 입주를 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돈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을 때, 그는 다른 것에 열정을 쏟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록 그 집이 작고 조금은 불편하고 소박할지 모르지만, 그의 삶에서 더 소중하고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산속에서 컨테이너 한 칸을 집으로 꾸며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폭 3미터에 길이 6미터의 사무실용 컨테이너로 시중에서 250만 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데 양옆으로 창문이 달려있습니다. 구입한 후에 내부의 바닥은 단열재로 더 보강을 했고 장작난로도 하나 들였습니다. 자재를 구입해서 부엌도 달아내었고 싱크대도 직접 만들고 페인트로 칠을 했습니다. 이렇게 완성한 집인데 부엌의 지붕은 양철지붕이고 난로의 연통이 컨테이너 밖으로 불쑥 튀어나와서 바람이 조금만 거세게 불어도 바람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러니 태풍에 부엌의 지붕이나 연통이 날려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것 외에는 그다지 신경 쓰일 일은 없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에 비해서 말입니다.
인적이 끊긴 외진 산골이지만 고요하고 적막하며 바람소리며 빗방울 소리에 잠을 깨기도 합니다. 또 새소리와 곤충들의 작은 울음소리도 가깝게 들려옵니다. 그렇게 자연과 더없이 가깝지만 방음이나 단열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열악하고 다소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서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사색을 하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대로 지낼 만하기에 동쪽 산등성이 위로 달이라도 떠오르면 소나무 가지에 걸린 달이 만들어 내는 풍경에 가끔은 도취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요즘은 추운 겨울입니다. 흐르는 계곡물도 꽁꽁 얼어붙었고 새들도 겨울을 나려고 따뜻한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니 이 산골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난로를 피우는 일이 필수적이지만 얼어 죽기야 하겠어요? 사람은 지적인 능력을 가졌기에 주어진 환경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적응하면서 잘 살아가니 말입니다.
그동안 틈틈이 장작도 준비해서 쌓아두었고 겨울을 나기 위해 양식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가끔씩 찾아오는 혹한에도 그다지 큰 어려움 없이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겨울을 이겨내고 꽃이 피어나는 봄을 맞이한다면 자신이 대견스럽지 않겠어요? 그래서 요즘 매서운 추위가 몰려오면 가끔은 전쟁에 나서는 전사같이 야릇한 희열을 느끼게 되기도 하나 봅니다.
겨울을 컨테이너 집에서 난다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잘 지어진 값비싼 현대식 집이 아니라도 잘 살 수 있다는 증명이며 돈과 안락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문명의 거대한 물길에서 벗어나도 문제가 없다는 상징 같은 것 말입니다. 폭풍우를 이겨낸 과일이 가을 햇살에 탐스럽듯이 나 또한 세상에 자신감으로 당당할 것 같습니다. 세상 어디에 던져놓아도 두려움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는 당당한 자신감 말입니다.
이렇게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힘들게 살아갈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배불리 먹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나태하고 안일하게 살아도 생명의 유지와 연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보다 큰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삶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동물과 차별되고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생명체가 지적인 활동을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단순한 생각에 머물지 않고 차원 높은 사유를 하면서 스스로 지혜로운 길을 찾고 지혜로움을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을 가진 동물들 위에 설 수 있었고 근육의 힘이 약하고 딸려도 자신의 힘보다 수십 배나 큰 힘을 지닌 코끼리도 길들이고 부릴 수도 있었습니다.
지적인 능력이 없는 인간이란 도대체 원숭이와 다를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오싹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천벌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사색과 사유를 통해서 지혜롭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신이 내린 축복에 틀림없습니다. 지적인 능력이란 너무나 고귀하고 찬란해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영롱한 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고귀한 지적인 능력을 우리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맛있는 음식이며 향락에 젖게 하는 술이나 안락함과 편리함을 위한 집과 자동차들, 또 사치스러운 옷이며 겉치레를 위한 화장품이며 성형수술까지. 이러한 노력들에 비해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활용하고 높이기 위해 우리는 무슨 노력을 했던가요?
인간의 지적인 활동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작품은 바로 책에 분명합니다. 책은 허기진 배를 부르게 하지는 못하지만 지혜와 용기와 인간의 열정이 고스란히 들어있었습니다. 또 책 한 권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했고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경이롭고 놀라운 일인가요? 음성으로 듣는 말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책이란 것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책을 멀리하고 가벼운 읽을거리로 지적 능력을 소모시켜버립니다.
그런 독서 취향은 결과적으로 시력을 감퇴시키고 혈액순환의 장애를 가져왔고 또 아까운 삶을 낭비시킨 것 외에 무엇을 더 했겠습니까? 책을 멀리하면 지적인 활동은 물론이고 지혜로움에서도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최근에 어떤 영상을 보고 분개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영상은 최근에 일왕의 생일파티가 열렸던 서울의 어느 호텔 앞이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손에 들고 시위를 하는 장면도 보였고 경찰들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조금 더 특별한 것은 중년 여인이 입구에 서서 호텔로 진입하는 승용차를 향해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과거의 한일관계를 떠올리면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에서 일왕의 생일파티라니 도대체 말이 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분개하고 욕설도 하겠지요.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과거에 얽매여있는 한에는 결코 밝고 자유로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겠어요?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역사에는 분명히 우리의 잘못도 있었습니다.
또 일본이나 한국과 중국이라는 땅덩어리는 이동하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이동하면서 섞이고 교류되었습니다. 한국 땅에 살고 있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핏줄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민족이니 나라니 하는 개념은 집단 이기주의의 소산이며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은 지구 상의 어느 곳이라도 정착해서 정붙이고 살아갈 수 있지 않겠어요?
중국을 보면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왔고 또 오랜 세월을 이민족의 지배도 받아야 했습니다. 지금의 중국은 침략과 지배와 핍박의 산물이지만 모든 것을 끌어안고 포용하는 거대한 바다와 같지 않습니까?
바다는 어느 강물만 골라서 받지 않고 흘러드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여 오늘도 맑고 푸르기만 하듯이 중국도 마침내 중화민족의 국가로 우뚝 서지 않았는가요?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지킬건 지켜가면서 말입니다.
한편으로 다른 나라의 침략이나 지배가 아닌 내부의 지배세력의 폐해도 많았습니다. 가령 그다지 불가피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큰 돈을 들여서 4대강 사업을 펼쳤습니다. 수억 년의 자연이 만들어 놓은 물길을 막고 뒤틀어 놓은 큰 공사였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심대로 틀어놓은 그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원래대로 복귀하려는 활동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이기에 장마철이나 태풍으로 홍수가 날 때면 그것 때문에 피해도 입고 또 허물어진 시설을 복구시키느라 예산을 낭비하고 사투를 벌여야 하겠지요. 잃게 되는 것에 비해 얻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이와 같이 알게 모르게 저질러지는 잘못된 정책들로 인해 빚어지는 폐해들이 지나간 과거를 향한 증오보다 더 심각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 사이에도 증오는 결코 용서와 화해의 길로 또 자유롭고 멋진 미래로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간단한 사실도 지적인 사유 없이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의 먼지가 신성한 생명을 얻었고 그것도 지적인 능력을 부여받았는데 너무 작은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겠지요.
어제는 오후부터 눈발이 휘날렸지만 자고 일어나서도 그렇게 많은 눈이 쌓이지 않았더군요. 아침에도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있었기에 하늘에는 구름이 많았지만 밤에는 맑아진 하늘이 드러날지 모르겠습니다.
맑은 밤하늘에는 언제나 영롱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적인 영역도 그런 별과 같이 세상의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음에 틀림없겠지요?
저는 오늘도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고요한 산속에서 고독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독서를 하고 또 사색과 사유의 시간을 갖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짧은 시 한수로 마음이 그윽해지고 가슴이 촉촉해지지 않든가요?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는 못하겠지만 꽃과 같이 그윽한 향기와 아름다움을 안겨주면서 말입니다.
세상에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맑고 영롱하며 손에 잡히지도 않으면서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줍니다. 집착하거나 구속하지도 않고 더없이 자유로우며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세상의 욕망을 초월한 성스러운 그 무엇을 상상해 보세요.
한낱 먼지에서 생명을 얻어 잠시 다녀가는 지구가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하게 또 눈부시게 찬란한 모습으로 다가올 그 존재를 말입니다.
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