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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지승(東事地乘)으로 보는 朝鮮의 領土 비교(比較) [제2편]
[東萊南馬島七百里 : 동래(東萊) 남(南)쪽 대마도(馬島)는 700리]
2023년 05월 02일
○ 전편(前篇)에 이어 계속(繼續)되는 설명(說明)입니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미수(眉叟) 허목【許穆 :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선생(先生)은, 17세기(世紀) 우리나라 역사상(歷史上)의 인물(人物)로 너무나 잘 알려진 분이시다.】
○ 記言 35권 원집 외편 : “동사(東事) 지승(地乘)” 편
(3) 記言本文 : 《樂浪有赫居世娑蘇廟。其嶼鹽田,絶影。出善馬。其外馬島七百里。: 낙랑에는 혁거세(赫居世)와 사소(娑蘇 혁거세의 모)의 사당이 있으며, 섬으로는 염전도(鹽田島)와 절영도(絶影島)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좋은 말이 나왔다. 그 밖으로 대마도(對馬島)가 7백 리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① 三國史記 新羅本紀 赫居世居西干 : 30년[B.C. 28) 04월 30일(음)] 조를 보면 :《樂浪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户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盗, 可謂有道之國. 吾儕濳師而襲之, 無異於盗, 得不愧乎.” 乃引還. : 낙랑인(樂浪人)이 장병(將兵)을 이끌고 침략해 왔다. 변경 사람들이 밤에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곡식도 한데에 쌓아 들판에 널린 것을 보고서 서로 말하기를, “이곳의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가히 도(道)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군사를 몰래 내어 습격하는 것은 도적이나 다를 바 없으니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병사를 물려서 돌아갔다.》고 하였다.
‘낙랑(樂浪)’이 ‘낙랑(樂浪)’을 쳐들어온다? 이건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이야기다.
② 三國史記 新羅本紀 儒理尼師今 : 14년[AD 37년] : 《十四年, 髙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 14년(37)에 고구려왕 무휼(無恤)이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000명이 투항해 오니 6부(六部)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낙랑(樂浪)’을 멸망(滅亡)시켰는데, ‘낙랑(樂浪)이 신라(新羅)’라는 말은,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이야기가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낙랑(樂浪)이 신라(新羅)였다는 말과 고구려(高駒驪)가 낙랑(樂浪)을 멸망(滅亡)시켰다는 것은, 이때 신라(新羅)가 멸망(滅亡)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도 신라(新羅) 이루 1천년(千年)을 영위(營爲)했다고 전한다. 귀신(鬼神)이 곡(哭)할 노릇?
➊ “낙랑(樂浪)”이 신라(新羅)인가? 계림(鷄林)인가? 사라(斯羅)인가? 혁거세(赫居世)와 그의 어머니인 “사소(娑蘇)”의 사당(廟)가 있다고 하였는데, 혁거세(赫居世)는 ‘큰 알(大卵)’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않았나! 이게 도대체 뭔 말인가?
➤ 世宗實錄地理志 慶州府 : 別號 樂浪 : “淳 化 所 定” 이라고 하였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高 麗 成 宗 所 定”이라고 하였으며, 〈隋, 唐書俱云 : 新羅, 漢樂浪地.〉라고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경주(慶州) 땅’은, ‘시골 한량(閑良) 출신(出身) 유방(劉邦)의 한(漢)’나라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그럼 그 이북(以北) 지방과 그 서(西)쪽 지방은 누구의 땅이었다는 이야기고, 삼한(三韓)의 땅이었다는 말은 귀 신(鬼神)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수서(隋書)나 당서(唐書)’ 모두에서 말하기를 :『당시(當時)의 신라(新羅) 경주(慶州) 땅은, 유방(劉邦)의 전한(前漢) 땅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따지고 자시고 할 일이 없다. 이걸 가지고 반도(半島)니, 동방(東方)이니 하는 해설(解說) 자체(自體)가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냐!!! 헌데 무슨 얼어 죽을 ‘큰 알(大卵)’이니, ‘여섯 촌(村)’이니, ‘반도(半島) 동남(東南)’쪽이니 하는 말은 뭔 소린가?
학계(學界) 인사(人士)들은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국민(國民)들을 우롱(愚弄)하는 재미로 한국사(韓國史)를 연구(硏究)하시며, 재단(財團)으로부터, 정부(政府)로부터 지원금(支援金)을 받아 먹고사는 존재(存在)들인가?
큰 알(大卵)을 깨고 나왔다고 했잖은가! 그 알(卵)이 ‘박’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박씨(朴氏)로 하였다는 말은, ‘하 심심해서 농담(弄談) 따먹기 한번 해 본 건가?’ 웃기는 자(者)들이다.
金富軾의 三國史記 : 新羅本紀第一 : 《始祖. 赫居世居西干 :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前漢 孝宣帝) 오봉 원년(五鳳 元年)【前漢孝宣帝,五鳳元年 BC57】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 :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하였는데,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였다. 즉 “거서간(居西干)”이란 『서(西)쪽에서 살던 왕(干=汗), 서(西)쪽에서 온 왕(干=汗)』이란 뜻이다. 또 그는 큰 알(大卵)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지 “사소(娑蘇)”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도대체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 논자(論者)들은 뭔 해괴(駭怪)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걸까?
『멀리 서(西)쪽 땅에서 온 ‘혁거세(赫居世)’라는 말을, 큰 알(大卵)에서 태어났다는 신비(神祕)함으로 숨기려 함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아예 숨길 수 없으니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붙여 놓았다.』그래도 양심(良心)은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程度)의 설화(說話)는 초딩들도 이해(理解)할 수준(水準)이다.
그렇다면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사기극(詐欺劇)이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박혁거세(朴赫居世)”란 말은 무언가? 그렇다면 ‘사소(娑蘇)’가 ‘박씨(朴氏)’와 혼인(婚姻)하여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낳았다는 이야기지만 어디에도 이런 기록은 없다.【聖母祠。在西嶽仙桃山。聖母本中國帝室之女,名娑蘇。早得神仙之術,來止海東,久而不還,遂爲神。世傳赫居世乃聖母之所誕也。故中國人讚,有“仙桃聖母娠賢肇邦”之語。: 성모사(聖母祠) 서악(西嶽)의 선도산(仙桃山)에 있다. 성모(聖母)는 본래 중국 황실(皇室)의 여자로, 이름이 사소(娑蘇)이다. 일찍이 신선되는 술법을 배웠는데, 해동(海東)에 와서 머무르며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고 드디어 신(神)이 되었다. 속설에, 혁거세는 곧 성모가 낳은 이라 한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이 지은 찬(讚)에, “선도성모(仙桃聖母)가 어진 이를 잉태하여 나라를 창건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고전번역원’의 그 주(注)에서 이르기를, 『‘사소(娑蘇)’ :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 일찍 신선술을 터득하였다. 해동(海東)에 머물러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아 마침내 신이 되었는데, 세상에는 혁거세(赫居世)를 낳은 어머니로 전해진다.』고 하였는데, 웃기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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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錢塘十萬氣蒸霞。金淡詩:“春在桑麻撲地家,錢塘十萬氣蒸霞。六年坐嘯能無愧?巾上靑天只隔紗。: 전당십만기증하(錢塘十萬氣蒸霞) : ”김담(金淡)의 시에, “상마(桑麻)에 봄은 짙고 땅에 가득 민가인데, 전당(錢塘)의 십만(十萬)은 기운이 노을 지네. 6년 동안 하는 일 없이 앉아 휘파람 부는 것 부끄러움 없으랴? 건 위의 푸른 하늘이 다만 얇은 비단 한 겹 차이나네.” 하였다.
전당(錢塘) : 항주(杭州) 전당(錢塘) 서호(西湖)가 있다고 한다. 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전당호(錢塘湖)를 수축하여 관개 사업을 한 것을 말한다. 보통 소공제(蘇公隄) 혹은 소제(蘇隄)라고 한다. 《宋史 河渠志 7》
이런 이야기는,《洛邑諸生十萬指,臨流祓禊肩相磨。: 낙읍(洛邑)의 여러 선비 10만 명이 흐르는 물에서 불계(祓禊)하니, 어깨 서로 닿았구나.》한 것과 연결(連結)되는 이야기다.
서호(西湖) 즉 전당호(錢塘湖) 일대의 양절(兩浙)을 지배하던 전씨(錢氏) 가문이 번창할 때에는 황금을 집에 쌓아 놓고 형석(衡石)으로 주옥을 헤아렸는데, 송(宋)나라가 일어나며 그들의 운세가 다하자 신첩(臣妾)과 같은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는 말이다. 원문의 향아(香兒)는 첩의 별칭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전당호에 군림하던 전왕(錢王)의 장관(壯觀)도 지금은 이미 없어진 것을. 집에 황금 쌓아 놓고 말로 구슬을 되더니, 운이 다함에 쪽지를 보내 부를 필요도 없어졌다네.〔君不見錢塘湖 錢王壯觀今已無 屋堆黃金斗量珠 運盡不勞折簡呼〕”라는 구절이 나온다.
➨ 박씨(朴氏)는, 신라(新羅) 전용(專用) 성씨(姓氏)가 아니다. 즉(卽) 자치통감(資治通鑑) 후한(後漢) 편의 ‘孝靈皇帝’ 광화 5년(182년) : 《板楯(판순)의 만족(蠻族)이 파군(巴郡)을 노략질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몇 년을 계속해서 토벌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판순(板楯)의 7성(姓)이란 “나(羅). 박(朴). 독(督). 악(鄂). 탁(度). 석(夕). 공(龔)”씨(氏) 등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진(秦) 때에 공을 세워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을 면제(免除)받았다고 알려진 부족(部族)들이다.”이곳에 ”박씨(朴氏)“가 있다.
즉 ”진(秦)의 망년(亡年)은, 기원전(BC) 206년(年)이다. 따라서 그 이전(以前)의 진(秦) 나라에 박씨(朴氏)가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이때는 신라(新羅)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理解)가 되는가! 신라가 없는데 어떻게 박씨(朴氏)가 있을 수 있겠는가!
➋ 경주(慶州)가 낙랑(樂浪)이라는 증거(證據)는 뭔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경주(慶州) 편의 군명(郡名)에서 말하는 “낙랑(樂浪)”이라는 근거(根據)나 고증(考證)은? 【郡名 : 辰韓·徐耶伐·斯盧·新羅·樂浪·鷄林·月城·東京·金鼇·蚊川】무조건(無條件) 그렇게 알아라! 인가?
金克己集:“東都遺俗,以六月望,浴東流水,因爲禊飮,謂之流頭宴.蓋以河朔避暑之飮,誤爲禊飮耳. : 김극기(金克己)의 문집(文集)에 : 동도(東都)의 풍속에 6월 보름에 동(東)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하고 계음(禊飮)을 하는데 이것을 유두연(流頭宴)이라고 한다’ 하였는데, 하삭(河朔)에 피서(避暑)하는 술잔치를 잘못 알고 계음(禊飮)이라 한 것이다.” 하였는데,
경주(慶州) 땅에 동(東)쪽으로 흘러 동해(東海)로 들어가는 하천(河川)이 있나? 위성지도를 놓고 확대해가며 살펴보면 :
ⓐ 경주(慶州)에서 북(北)쪽으로 안강(安康)에서 동(東)쪽으로 꺾여 포항으로 흘러 동해(東海)로 들어가는 하천은 있다.
ⓑ 그러나 경주(慶州)에서 동(東)쪽으로 흘러 동해(東海)로 들어가는 하천은 없다.
➤ 그렇다면 : “浴東流水, 因爲禊飮 : 동(東)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하고 계음(禊飮)을 하는데”라는 설명(說明)은 뭔가? 천지개벽(天地開闢)이 경주(慶州) 땅에 있었다는 이야긴가?
그렇다면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서 말하는 : 〈고구려(高駒驪), 백제(百濟)와 호각(互角)을 다투던 당시(當時)의 신라(新羅) 땅은, 「‘동서(東西)가 1 천리(千里)요, 남북(南北)이 2 천리(千里) 또는 삼천리(三千里)’[東西千里,南北二千里 : 橫千里,縱三千里, 東拒長人] 이고, 동(東)쪽에는 장인국(長人國)에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기록(記錄)은 어떻게 해설(解說)될 수 있나?
왜냐하면 “수(隋)와 당(唐) 조정(朝廷)은, “백제(百濟), 고구려(高駒驪), 신라(新羅)와 무려(無慮) 70 여년(餘年) 간을 치고받아 누구보다도 그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손바닥 보듯 했기 때문이다.” 사가(史家)라는 자(者)들이 정도(程度)의 지식(知識)도 갖추지 못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다시 묘지(墓地)로 들어갈 때다.
※ 형산강은 경주(慶州)지방에서 발원(發源)하여 북(北)쪽으로 흐른다.
形勝 : 《地多山險。隋書:地多山險。 又云:田甚良沃,水陸兼種。: 땅은 산이 험(險)한 데가 많다 수서(隋書)에, 땅은 산이 험한 데가 많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 전지(田地)는 매우 비옥하며 물에 심는 곡식과 마른 땅에 심는 것을 겸해 할 수 있다 하였다. 巨鎭雄藩。高麗李達衷表:“矧鷄林之巨鎭,爲鰈域之雄藩?” 山河秀異。徐居正記。: 거진(巨鎭)이며 웅번(雄藩)이다. 고려 이달충(李達衷)의 표문(表文)에, “하물며 계림(鷄林)의 거진이며 접역(鰈域)의 웅번이겠습니까.” 하였다. 산과 물이 빼어나고 기이(奇異)하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있다.》고 하였다.
《洛邑諸生十萬指,臨流祓禊肩相磨。: 낙읍(洛邑)의 여러 선비 10만 명이 물에서 불계(祓禊)하니, 어깨 서로 닿았구나.》하였다.
《혁거세릉(赫居世陵) 담엄사(曇嚴寺) 곁에 있다.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미추왕릉(味鄒王陵) 본부의 남쪽 황남리(皇南里)에 있다.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한다. 법흥왕릉(法興王陵)ㆍ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진흥왕릉(眞興王陵) 모두 본부의 서쪽 악리(岳里)에 있다. 선덕왕릉(善德王陵) 낭산(狼山) 남령(南嶺)에 있다. 효소왕릉(孝昭王陵) 본부 동쪽 분남리(芬南里)에 있다. 성덕왕릉(聖德王陵) 본부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있다. 헌덕왕릉(憲德王陵) 본부 동쪽 천림리(泉林里)에 있다. 흥덕왕릉(興德王陵) 안강현(安康縣) 북쪽에 있다. 김유신묘(金庾信墓) 본부 서쪽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김인문묘(金仁問墓) 경서원(京西原)에 있다. 김양묘(金陽墓) 태종왕릉(太宗王陵)에 배장(陪葬) 하였다.》
➤ 이렇게 많은 왕릉(王陵)이 “경주(慶州)” 주변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많은 왕릉(王陵)에서 “신라(新羅) 또는 경주(慶州) 또는 계림(雞林)이 바로 이곳이요”라는 한 구절(句節)의 문구(文句)라도 찾아내었는가? 모두 헛탕쳤잖은가! 지극(至極)히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경주(慶州)가 그 땅이 아닌데, 그 땅이 아닌 곳에서 어떻게 증거(證據)가 나올 수가 있겠는가!!!
진짜 웃기는 허상(虛像)들이요, 학자(學者)가 아닌 박수무당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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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염전도(鹽田島) : 자료(資料)가 검색(檢索)조차 되지 않는다.
➍ 절영도(絶影島) : 영도(影島)는 부산광역시 중구·동구·서구와 함께 부산광역시의 원도심(原都心)을 이루는 섬으로, 섬 전체가 부산광역시 영도구를 구성한다. 절영도(絶影島)라고도 불린다. 【사료 고종 시대사 : 1881년(고종 18년) 7월 29일 : 일본 아사히신문 : 조선정부가 일본 정부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거절함을 보도함 : 최근에 도달한 조선 부산포의 통신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하나부사(花房) 공사가 빌리고 싶다고 조선 정부에 교섭한 절영도[부산항의 일본인 거류지 앞에 있다.] 그것이 “대마도의 그림자를 끊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세속에서는 목도(牧島)라 칭한다.】그렇다면 그 이전(以前)에는 “절영도(絶影島)”라 불리지 않았다는 증거(證據)다.
➨ 해동역사 속집 제13권 / 지리고(地理考) 13 / 산수(山水) 1 /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 절영도(絶影島) - 동래부의 남쪽에 있다-
『대마도(對馬島) 700리』 : 부산(釜山)에서 겨우 50km 떨어져 있는 섬이다. 열도(列島)의 후쿠오카에서는 134km 떨어져 있다. ‘700리’라는 말은 최소한 280km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반도(韓半島) 부산(釜山)과 대마도(對馬島)까지의 실제(實際)의 거리보다 “6배(倍) 이상(以上)” 떨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700리’라는 말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와 대마도(對馬島)를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 근거(根據), 논거(論據)를 보자. 『한국(韓國) 편의 옛 고서(古書)들에 의하면 : 마한(馬韓)과 변진한(弁辰韓)의 남(南)쪽에는 “왜(倭)와 접해 있어 문신(文身)한 자(者)도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한반도(韓半島) 경상도(慶尙道) 남(南)쪽은 바다(海)【대한해협(大韓海峽)】가 아니라 “육지(陸地)로 이어져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동서(同書)의 제30권 잡편 / 변새 / 남해(南海)의 방수(防戍) : 《東萊南馬島七百里。: 동래(東萊) 남쪽에서 대마도까지 700리이다.》라는 기록(記錄)을 볼 수 있다. 이를 토대(土臺)로 보면 당시(當時) “17세기(世紀)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을 여실(如實)히 증명(證明)해주고 있다.
● ‘한반도(韓半島) 또는 조선반도(朝鮮半島)’니 하는 말부터 잘못된 것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전제(前提)하에 만들어진 땅의 이름(地名)이 아니던가! “반도(半島) 조선(朝鮮)” 이야기는 『20세기(世紀) 서세(西勢)와 그 하수인(下手人)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이 공모(共謀), 야합(野合)하여 만든 이야기책 이상(以上)도, 이하(以下)도 아닌 조작(造作)된 이야기일 뿐이다.』
이걸 애지중지(愛之重之)하던 대한민국(大韓民國) 역대(歷代) 정권(政權)과 친일주의자(親日主義者)들이 야합(野合)한 결과(結果)이며, 정부(政府)에서 시행(施行)하는 의무교육(義務敎育)이라는 명분(名分) 아래 만들어진 세뇌공작(洗腦工作)으로 확고(確固)하게, 공고(鞏固)하게 굳어져 가고 있을 뿐이다.
➨ 이건 누굴 탓할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그렇게 만들고,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冷靜)하게 판단(判斷)한다면 : ‘토착왜구(土着倭寇)’라는 말도 사실 웃기는 이야기다. “서력(西曆) 1948년 정부(政府) 수립(樹立) 이후(利後) 지금까지 대한민국(大韓民國) 대부분(大部分) 정권(政權)이나 일부 국민(國民)들은, 토착왜구(土着倭寇)와 무엇이 다르게 행동(行動)했는가?”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일까? 허나 오늘 우리의 현실(現實)을 보자. 과한 표현(表現)이 아니라 아주 적절(適切)한 표현(表現)이다. 국민(國民) 모두 각성(覺醒)하지 않으면 과거(過去)의 치욕(恥辱)이 되풀이될 수 있다. 그걸 원(願)하는 친일주의자(親日主義者)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日本)의 대부분(大部分) 정치인(政治人)들과 정권(政權)에서는, ‘한반도(韓半島) 통일(統一)’에 대해서만은 ‘결사적(決死的), 필사적(必死的)으로 반대(反對)’하며 방해공작(妨害工作)을 편다. 왜냐하면 일본(日本)으로써는 최악(最惡)의 수(數)이며, 일본(日本)으로써는 국가(國家)의 운명(運命)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정치인(政治人)들과 역대(歷代) 정권(政權)에서는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국가(國家)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한 ‘싱크 탱크’ 하나도 없다는 것일까? 충분(充分)하게 헤아리고 있지만 노출(露出)시키지 않는다? 이건 한참 오버다. 왜냐하면 “오늘의 ‘윤석열’을 보면 다 보이니 말이다” 즉 불릴만한 ‘싱크 탱크는 없다’는 뜻이다.
일본(一本) 정치계(政治界)는, 수년(數年) 또는 수십(數十) 년 이내(以內), ‘한반도(韓半島)’ 땅에, 급변(急變) 상황(狀況)이 발생(發生)할 것이며, 그때가 일본(日本)으로써는 과거(過去)의 패전(敗戰)을 만회(挽回)할 수 있는 적기(適期)라고 보며,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미군(美軍)과 함께 자위대(自衛隊)를 주둔(駐屯)시켜야 한다고 강력(强力)하게 그 밑그림을 그리며 추진(推進)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만 “한반도(韓半島) 통일(統一)”을 저지(沮止)할 수 있는 원동력(原動力)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 통일(統一)! 그것은 일본(日本)으로써 ‘최악(最惡)의 악몽(惡夢)이자, 국가(國家)의 안위(安危)와 직접적(直接的)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왜? 통일(統一)된 한반도(韓半島) 정권(政權)에서 안하무인(眼下無人) 일본(日本)을 그대로 두려 하겠는가? 그래서 열도(列島) 아이들은 필사적(必死的)으로, 결사적(決死的)으로 한반도(韓半島) 통일(統一)을 반대(反對)하며 공식적(公式的)으로 대놓고 말하는 것이다.
이 정도(程度)도 알지 못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정권(政權)은 자격미달(資格未達)이다. 바로 “윤석열 정권(政權)” 같은 경우(境遇)다.
“뭐가 통 큰 결단(決斷)이며, 뭐가 미래지향(未來指向)적이라는 말일까?” “윤석열”은 친일주의자(親日主義者)가 맞다. 그렇치 않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정권(政權)이야말로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을 위험(危險)에 빠뜨리는 최악(最惡)의 정권(政權)이랄 수 있는 것이다.
또 “000 중에 000 짓”을 하였다. 우리가 “자체(自體) 핵(核) 개발(開發)이 필요(必要)하다”는 것을 공개적(公開的) 대 놓고 흘리면 : 미국(美國)이나 일본(日本) 아이들이 가만히 있을까? 벌써 미국(美國)에서는 협박(脅迫)과 위협(威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진짜 ‘000’ 중의 최(最) 상급(上級) “000”다. 아니 어떻게 그런 ‘000’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즉(卽) 한국(韓國)이 핵(核)을 보유(保有)하게 되면, 일본(日本) 역시 핵(核)을 보유(保有)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건 미국(美國) 아이들이 일본(日本)의 핵(核) 개발(開發)을 용인(容認)하겠다는 것이며, 한국(韓國)에 대해서는 위협(威脅)을 가하며, 협박(脅迫)하는 것이다.
‘일본(日本)’에게 ‘통 큰 결단’을 할 게 아니라 : 아니꼽고, 더럽지만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의 생존(生存)을 위해 “미국(美國) 양키”들에게 ‘통 큰 결단’을 하고, 미국(美國)을 은밀(隱密)하게 설득(說得)시켜 핵(核) 개발(開發)과 보유(保有)할 수 있도록 야합(野合)해야 하는 것이다. “전(前)의 문재인 정권(政權)에서처럼 말이다.” 엉뚱한 ‘기시다’에게 ‘통 큰 결단’을 하고 얻어낸 것이 무언가? 뒤통수 한 방 제대로 맞고, 눈 땡이 뛰어나온 일 밖에 무엇이 있나?
“윤석열”의 모자란 그 말 한마디 때문에, 핵(核) 개발(開發)은 당분간(當分間) 물 건너간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정치초보(政治初步)나 정치(政治) 아마추어, 능력(能力)이 검증(檢證)되지 않은 무능력(無能力)한 자(者)가 지도자(指導者)가 되면 나라와 국민(國民)들은 “개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무슨 얼어 죽을 “국가 최고 지도자”라는 말을 대 놓고 하는 건가? 그럼 “국가 지도자”는 어디로 사라졌냐? 국가(國家) 지도자(指導者)가 대통령(大統領)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국가 최고 지도자’라는 말은 왜 갑자기… …바이마르 헌법 아래의 독일 공화국이나 프랑스 제5공화국에서처럼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라도 만들겠다는 것인가? 누구 맘대로… …웃기는 놈들이다.
‘핵(核) 개발(開發)’과 ‘미국(美國)의 설득(說得)’ 건은 결국(結局) 다음 정권(政權)으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독자(獨自) 핵(核) 개발(開發)과 보유(保有)’는, 한반도(韓半島) 생존(生存)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불가피(不可避)한 선택(選擇)이다. “중국(中國), 북한(北韓), 러시아, 일본(日本), 미국(美國)”이라는 호전적(好戰的)인 나라들에 둘러싸인 남한(南韓)으로써는 그 외(外)의 방법(方法)이 없다.
특히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은 잠재적(潛在的) 적국(敵國)이 될 공산(公算)이 크며, 또한 그렇다. “윤석열”의 일본(日本)을 향한 “통 큰 결단”은 크게 잘못 선택(選擇)된 것이고, “미국(美國)”을 향해 “통 큰 결단”이 필요(必要)했고, 상응(相應)하는 대가(代價)를 조용하게 은밀하게 받아냈어야 했다. 『초보(初步), 아마추어, 무능력(無能力)의 삼박자가 함께 어우러져 최악(最惡)의 외교(外交) 참사(慘事)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리석은, 무능력(無能力)한 지도자(指導者)는 나라를 말아먹는다” 평생(平生)을 검사(檢事) 신분(身分)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생(平生)을 검사(檢事) 입장(立場)을 벗어나지 못한, 오직 피의자(被疑者)만을 상대(相對)해 본 “윤석열”이 무슨 정치(政治)를 할 수 있겠는가?
이건 이미 예견(豫見)됐던 일이다. 검증(檢證)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結局) ‘보수우익(保守右翼) 언론(言論)’들이 만들어낸 허수아비 영웅(英雄), 일그러진 짝퉁 영웅(英雄)의 허상(虛像)을 보고 선택(選擇)한 국민(國民)들의 잘못이다.
선택(選擇)한 것은, 48.6%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유권자(有權者)들이다. 선택(選擇)에는 상응(相應)하는 책임(責任)이 뒤따른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주워 담는 일은 누가 할 건가? 결국(結局) 5,500만 국민(國民)들이 고통(苦痛)을 감수해야 하고, 차기(次期) 정권(政權)에서 고통(苦痛)을 나눠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5,500만 국민(國民)들에게 좋은 경험(經驗)이 되었을 것이다. 겨우 1년도 되지 않은 정권(政權)의 결말(結末)이다. 이건 국민(國民)들에게 다시 없는 좋은 교훈(敎訓)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교훈(敎訓)을 얻고도 그 교훈(敎訓)을 깨닫치 못하는 무리들에게는 미래(未來)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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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記言本文 : 《交州 淮陽府 東界。古獩貊之地。自沃沮至句麗南境沙海千里其西貊。多山土瘠。其種菽,麥,大秬,小秬。平原種稻蓄積。海濱鬻魚,鹽。多大澤。食螺蛤。海岸多竹箭。峽中絲,麻,林,漆,蔘,歸,群藥,紫檀。貊俗癡騃少嗜欲。尙廉恥。同姓不相娶。중략(中略). : 교주(交州) 회양부(淮陽府)의 동쪽 경계는, 옛 예맥의 땅인데, 옥저에서 고구려까지이고 남쪽은 모래바다[沙海] 천리(千里)에 접하였으며, 서쪽은 맥 땅인데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하다. 나는 곡식은 콩ㆍ보리ㆍ굵은 기장ㆍ잔 기장이며, 평원에서는 벼를 심어 축적하였고, 해변에서는 물고기와 소금을 팔았다. 큰 못(大澤)이 많다. 고둥[螺]과 대합[蛤]을 먹었다. 해안 지방에서는 죽전(竹箭)이 많이 났고 산협(山峽) 가운데에서는 사(絲)ㆍ마(麻)ㆍ임(林)ㆍ칠(漆)ㆍ삼(蔘)ㆍ당귀[歸]와 여러 가지 약재(樂材) 및 자단(紫檀)이 산출되었다. 맥 땅의 풍속은 어리석고 기욕(嗜欲)이 적으며 염치를 알아, 같은 성(姓)끼리는 혼인하지 않았다. 중략(中略)》고 하였다.
➊ 《남(南)쪽은 모래바다[沙海] 천리(千里)에 접하였으며》: ‘모래 바다(沙海) 일천(一千)리’라고 불릴만한 바다가 강원도(江原道)에 있다? 동해안(東海岸)의 ‘모래 바다’로 유명세(有名稅)를 떨치던 곳이 곧 명사십리(明沙十里)다. 헌데 무슨 얼어 죽을 ‘모래 바다 천리(沙海千里)!’
명사십리(明沙十里) : 《함남 원산시 갈마반도(葛麻半島)의 남동쪽 바닷가에 있는 백사장. 바다 기슭을 따라 흰 모래톱이 10리(4km)나 이어지고 있어 명사십리라고 한다. 안변의 남대천(南大川)과 동해의 물결에 깎이고 씻긴 화강암의 알갱이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사해(沙海)가 천리(千里)!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는 면적(面積)이요, 지세(地勢)다.
이는 곧 한반도(韓半島)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證據)다.
➋ 《큰 못(大澤)이 많다 : 多大澤》: “多” 자(字)는 명사(名詞) 앞에 붙어 “많음”을 나타내는 글자다. 따라서 『대택(大澤) 즉 큰 못이 많다, 큰 호수(湖水)가 많이 있다』는 뜻이다. “반도(半島) 땅 전체를 통틀어도 대택(大澤)은 없다.” 는 것을 알면, 위에서 말하는 땅은 “교주(交州)는 고사하고 반도(半島) 땅일 수 없다.” 는 확실(確實)한 메시지다.
➌ 《자단(紫檀)이 산출되었다》 : [출처(出處) : 나무위키 : 자단(紫檀)] : 보통 인도와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콩과 황단나무속의 상록수이다. 중국 남부의 광동성, 운남성, 해남성을 비롯해 대만, 인도 남부,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 아열대에 분포하는 상록 활엽교목으로 40m까지 성장하며 붉은색의 아주 단단한 목질을 가지고 있다. 심재는 자색에서 짙은 붉은 빛을 띄는 갈색을 띄며, 검은색 수지층으로 인해 가공이 어려운 편에 속하나 나뭇결의 아름다움 때문에 가구나 악기 제작 시에 가치가 매우 높은 목재로 평가된다. 재단할 때 나는 장미향 때문에 장미목(로즈우드)이라고도 불린다. [출처(出處) : 나무위키 : 자단(紫檀)]
자단(紫檀) : [국어대사전] : 콩과의 상록 활엽교목. 높이는 10미터 이상이며 잎은 어긋나고 겹잎으로 원형 또는 넓은 타원형이다. 나무껍질이 자줏빛이고 여름철에 누런 꽃이 총상(總狀) 화서로 핀다. 재목은 건축, 가구 따위의 재료로 쓴다. 인도 남부에서 스리랑카에 걸쳐 분포한다. [국어대사전]
자단(red sandal wood 紫檀) [대한건축학회 건축용어사전] : 콩과의 상록낙엽활엽교목. 인도 및 스리랑카가 원산. 대만 · 필리핀 등지에 분포. 재목이 단단하고 심재는 암홍자색을 띠며 아름답고 구조재 · 가구재 · 장식재로 쓰임. 학명:pterocarpus santalinus.
“자단(紫檀)은, 한반도(韓半島)에서 자생(自生)하는 식물이 아니다”라고 설명(說明)한다. 이걸 어떻게 설명(說明)할 수 있을까?
기언 제28권 하편 / 산수기(山水記) 태백산기(太白山記) : 山出蔘,苓,芎藭,當歸,群藥,蔓生柏,瑰材,紫檀,桑實三寸。誌言東海三寸椹此也。: 태백산에서는 인삼(人蔘), 복령(茯苓), 궁궁(芎藭), 당귀(當歸), 군약(群藥), 만생백(蔓生柏), 괴재(瓌材), 자단(紫檀), 세 치의 오디가 나오는데, 지리지(地理誌)에 동해의 삼촌심(三寸椹)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담헌서 외집 10권 연기(燕記) / 기용(器用) : 。其花梨,紫檀,降眞,烏木,沉香之屬。出自南徼外。只供貴家翫器而已。棕櫚亦南產。: 화리(花梨)ㆍ자단(紫檀)ㆍ강진(降眞)ㆍ오목(烏木)ㆍ침향(沈香) 같은 나무들은 남쪽 변방에서 생산되는 것인데, 이것은 다만 귀한 집의 완기(翫器)로서만 쓰인다. 종려(棕櫚) 나무도 역시 남방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남방(南方)이란 중국(中國)의 남방(南方)을 뜻한다.】
성호사설 제3권 / 천지문(天地門) 울릉도(鬱陵島) : 朝廷遣武臣張漢相徃審之南北七十里東西六十里木有冬栢紫檀側栢黄蘖槐椵桑榆無桃李松橡禽獸有烏鵲猫䑕水族有嘉支魚穴居巖磧無鱗有尾魚身四足而後足甚短陸不能善走水行如飛聲如嬰兒脂可以燃燈云扵是 : 조정에서 이에 무신 장한상(張漢相)을 울릉도로 보내어 살피게 했는데, 그의 복명에, “남북은 70리요, 동서는 60리이며, 나무는 동백ㆍ자단(紫檀)ㆍ측백ㆍ황벽(黃蘖)ㆍ괴목(槐木)ㆍ유자ㆍ뽕나무ㆍ느릅나무 등이 있고, 복숭아ㆍ오얏ㆍ소나무ㆍ상수리나무 등은 없었습니다. 새는 까마귀ㆍ까치가 있고 짐승은 고양이와 쥐가 있으며, 물고기는 가지어(嘉支魚)가 있는데, 바위틈에 서식하며 비늘은 없고 꼬리가 있습니다. 몸은 물고기와 같고 다리가 넷이 있는데, 뒷다리는 아주 짧으며, 육지에서는 빨리 달리지 못하나 물에서 나는 듯이 빠르고 소리는 어린아이와 같으며 그 기름은 등불에 사용합니다.” 하였다.
※ 자단목(紫檀木) : [사진출처(寫眞出處) : 나무위키]
(7) 記言本文 : 《朔方。沃沮之地。或曰置溝婁。在蓋馬。東濱於浡海。北自挹婁。南至獩貊千餘里。其俗質樸。強悍嗜利。尙弓馬。其利魚,鹽,絲,麻,皮革,銀,石,琉黃。北方多善馬。沃沮有三種。曰東沃沮。曰北沃沮。曰南沃沮。: 삭방(朔方 함경도)은 옥저 땅으로,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한다. 개마(盖馬)에 있는데 동(東)으로는 발해(浡海)에 닿아 있고, 북으로 읍루(挹婁)에서 남으로 예맥까지 천여 리가 된다. 백성들의 습속은 질박하나 강건하고 날래며 이해(利害)에 밝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특산물로는 어염(魚鹽)ㆍ사(絲)ㆍ마(麻)ㆍ피혁ㆍ은(銀)ㆍ석(石)ㆍ유황(琉黃)이 있다. 북방에는 좋은 말이 많다. 옥저는 셋이 있는데, 동옥저ㆍ북옥저ㆍ남옥저이다.》
➊《개마(盖馬)에 있는데 동(東)으로는 발해(渤海)에 닿아 있고 : 在蓋馬。東濱於浡海》하였는데, 여기의 “발해(浡海)는 발해(渤海)”와 같은 말인가? 또 발해(勃海)는 뭔가?
개마(蓋馬)는, 『백두(白頭)를 즉(卽) 개마대산(蓋馬大山), 곧 백두산(白頭山)』을 말한다고 전해지는데, 그렇다면 『옥저(沃沮)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는데, 옥저(沃沮)의 동(東)쪽에는 발해(浡海)라는 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즉(卽) 오늘날의 ‘동해(東海)를 발해(浡海)라고 했다’는 것인데, 이게 맞는 말인가? 그럼 “발해(渤海)의 동(東)쪽에 있어 해동(海東)이며, 곧 반도(半島) 땅이라는 이야기는 뭔가?” 이게 도대체 뭔 말인가?
열도(列島) 아이들과 ‘이’ 바다의 명칭(名稱)을 두고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동해(東海)”와 “일본해(日本海)”라고 말이다. 무슨 “발해(浡海)”라는 말일까?
➋ 위의 기록(記錄)을 이해(理解)하려면 후한서(後漢書)를 보아야 한다. 《後漢書 / 東沃沮 :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1],東濱大海:北與挹婁,夫余,南與濊貊接.中略.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駒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東)쪽에 있는데, 동(東)쪽은 대해(大海)이다 : 북(北)쪽에는 읍루(挹婁)와 부여(夫餘), 남(南)쪽에는 예맥(濊貊)과 접해 있다. 중략(中略)》하였는데 여기서 주목(注目)할 것은, “후한서(後漢書)의 주석(注釋)”이다. 즉(卽),
➨ 즉(卽),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다. 그 산(山) 즉(卽) 개마대산(蓋馬大山)은 지금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곧 왕험성(王險城)이다. : 注[1]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注[2] 夾音狹.》라고 한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說明)한 내용(內容)이다. 후한서(後漢書)를 주석(注釋)한 인물(人物)은 누군가? 당(唐) 고종(高宗)의 아들이었던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이다. [唐章懷太子李賢注 : 章懷太子李賢(655年1月29日-684年)字明允,一字仁,唐高宗李治第六子,也是武則天第二子。在其兄李弘死後,一度被封為太子,之後被廢為庶人]
사가(史家)들은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를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이 주석(注釋)한 것으로 인하여 더 높게 평가(評價)한다고 말한다.
➨ 여기서 우리가 또 주목(注目)해야 할 특이(特異)함은,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의 묘(墓)에 그려진 ‘삼족오(三足烏)’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상징적(象徵的) 동물(動物)을 묘사(描寫)한 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 고구려(高駒驪)의 고분벽화(古墳壁畵)의 특징(特徵)이다. 당(唐)의 실체(實體)가 의심(疑心)스러운 것이다.
더불어 “당(唐)”이란 나라는, 고구려(高駒驪)의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서는 고구려(高駒驪)인들보다 더 정확(正確)하게 파악(把握)했던 나라였다는 것을 상기(想起)해 봐야 한다. 수(隋)로부터 당(唐)에 이르기 끼지 무려(無慮) ‘70여 년’ 동안 고구려(高駒驪)를 침공(侵攻)했던 사실(史實)을 보면, 그들은 고구려(高駒驪)의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어도 다 보인다고 할 만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를 주석(注釋)한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은 바로 이러한 “당(唐)”나라의 태자(太子)“였다는 사실(事實)을 알아야 한다.
이런 주석(注釋)에 대해 누가 감히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논(論)할 수 있겠는가! 조작(造作)하고 왜곡(歪曲)하는 것은 후인(後人) 사가(史家)들이 하는 짓이다. 그러함에도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는 기록(記錄)이 생생하다. 어쩔까?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지만 :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고 한 것은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여러국가(諸國家)들이 반도(半島) 땅이 아닌 ‘1만(萬) 5 천리(千里)’ 서(西)쪽으로부터 그 동방(東方) 땅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해 주는 기록(記錄)이다.
7세기(世紀)에 만들어진 주석서(注釋書)의 내용(內容)을 누가 “틀리다, 아니다, 오류(誤謬)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7세기(世紀)의 그 인물(人物)들이 방위(方位)조차 구분(區分)하지 못했을까? 태양(太陽)이 동(東)쪽에서 떠오르고, 서(西)쪽으로 지는 것은 자연현상(自然現象)으로 변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리석은 후손(後孫)들의 능력(能力) 없는 후손(後孫)들의 하소연이요, 푸념일 뿐이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이 백두산(白頭山)이라면 당연(當然)히 평양(平壤)의 서(西)쪽에 있어야 하고,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천산(天山)이든 총령(葱嶺)이든 또는 금산(金山 : Aitai, 山)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실제(實際) 그렇다. 이게 중요(重要)한 거다.
또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해주고 있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옛 조선(朝鮮)의 여러 국가(國家)들은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 땅으로부터 그 동방(東方)에 걸쳐 토착(土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➌ 『발해(渤海)』란 말은 : ‘산해경(山海經)의 해내서경(海內西經) 본문(本文)’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게 ‘발해(渤海)’를 칭하는 최초(最初)의 기록(記錄)일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산해경(山海經)의 본문(本文)과 주석(注釋) 편을 보면 : 해내서경(海內西經)에서는 발해(渤海)[(海內西經:河水出東北隅,以行其北,西南又入渤海,又出海外,即西而北,入禹所導積石山]라고 했고, ‘해외북경(海外北經)’의 주석(注釋)[海外北經:禹所積石之山在其東,河水所入. 注釋 : 海內西經云:河水出東北隅,以行其北,西南又入勃海,又出海外,即西而北,入禹所導積石山.即積石山也.其方位在西]에서는 ‘발해(勃海)’가 쓰였다.
➍ 또 수경주(水經注) 에서는 “발해(渤海)”라고 하였다.[河水 : 山海經曰:河水入渤海,又出海外,西北入禹所導積石山.山在隴西郡河關縣西南羌中.余考群書,咸言河出崑崙,重源潛發,淪于蒲昌,出于海水.]
➎ 회남자전(淮南子傳)에서는 : “발해(渤海)”라고 하였다.[河水出崑崙東北陬,貫渤海入禹所導積石山,赤水出其東南陬,西南注南海丹澤之東,赤水之東弱水,出自窮石,至于合黎,餘波入于流沙,絶流沙,南至南海]
➏ ‘북사(北史) 대진국(大秦國)’ 편에서는 : 《大秦國,一名黎軒,都安都城,從條支西渡海曲一萬里,去代三萬九千四百里。其海滂出,猶渤海也,而東西與渤海相望,蓋自然之理.》라고 하였다.
어떤 경우(境遇), 어떤 명분(名分)을 가져다 놓아도 『고전(古典) 속의 “발해(渤海)”는 오늘날의 북경(北京) 남(南)쪽 바다일 수 없다.』 더불어 그것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자료(資料)가 없다. 오직 20세기(世紀)의 작품(作品)들이다.
➐ 기언(記言) 별집(別集) 8권 / 서(序) / 送呂汝魯接慰倭人序 : 왜인(倭人) 접위관(接慰官)으로 가는 여여로(呂汝魯)를 전송한 서 : 《天嶺呂君。早年以詞賦擢魁科。爲朝右人。頃年被譴逐於窮北之雉城。雉城在貊北二千里肅愼之墟。旣危愁窮。抑傍陰山。登臨浡海。中略 : 천령(天嶺) 여군(呂君)이 젊은 나이에 사부(詞賦)로써 과거에 장원하여 조정의 높은 지위에 있더니, 지난해에 견책(譴責)을 받아 아주 북쪽 지방인 치성(雉城 지금의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쫓겨 갔다. 치성(雉城)은 맥국(貊國) 북쪽 2천 리에 있다. 숙신(肅愼)의 옛터이다. 그는 이미 위태한 시름에 억눌리어, 음산(陰山)에 올라, 발해(渤海)를 굽어보기도 하였다. 중략(中略)》하였다.
➨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에 의하면 : “치성(雉城)”은 “함경도(咸境道) 경성(鏡城)의 고호(古號)”라고 했으므로, 『이곳으로부터 2 천리(千里) 남(南)쪽에 맥국(貊國)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옛 선인(先人)들의 기록(記錄)에서 말해주고 있는 지형지세(地形地勢)와 한반도(韓半島)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기로 하자.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 中宗 25)】에서 말하기를 : 경성(鏡城)에서 서울(京 : 漢城)까지 “1704”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맥국(貊國)”은 “한양(漢陽)=한성(漢城)”에서 남(南)쪽으로 300리를 더 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곳이 어디쯤 될까? 충청도(忠淸道) 천안(天安) 이남(以南)으로 내려가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附言)하고픈 것은, 맥국(貊國)은 춘천(春川)이니 강릉(江陵)이니 한다. 그렇다면 이곳으로부터 2천 리(千里)에 치성(雉城)인 ‘경성(鏡城)’이 있게 되는데, 2천 리(千里)를 따라가 보면 : 오늘날의 러시아[Russia] 땅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 서울에서 740km】 북(北)쪽 땅에 닿는다. 이게 뭔 희한(稀罕)한 일인가?
‘치성(雉城)=경성(鏡城)’이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땅의 지명(地名)인가?
※ 춘천 전 맥국거성과 궐지[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맥국(貊國) 터 [출처 : 홍선생]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에서 서울(漢陽=漢城)까지가 1,704리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 남(南)쪽 300리 정도에 “맥국(貊國)”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춘천(春川)이 맥국(貊國)이었다”는 말은 뭔가? 하 심심해서 농담 따 먹기 하는 건가?
➤ 경성(鏡城)에서 『음산(陰山)에 올라 발해(渤海)를 보았다는 것이다』 꿈(夢)도 아니요, 상상(想像)도 아니다. 『견책(譴責)을 받고, 치성(雉城: 鏡城)으로 쫓겨나오니 울분(鬱憤)에 찬 ‘여여로(呂汝魯)’가 ‘음산(陰山)에 올랐고, 발해(渤海)를 굽어보았다’는 것이다』 이걸 반도사(半島史)에서 어떻게 해설(解說)할 수 있는가? 이건 수백(數百), 수천년(數千年)을 회귀(回歸)하고 또 회귀(回歸)해도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자! 위의 사진(寫眞)을 보자. 향토사학(鄕土史學)과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의 무서움을 충분(充分)히 이해(理解)할 수 있으리라 사료(思料)된다. 이게 오늘날의 대한민국(大韓民國) 현실(現實)이다. ‘토착(土着) 왜구(倭寇)’의 천국(天國)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誇張)된 말이 아니다.
치성(雉城)은, ‘함경도(咸境道) 경성(鏡城)의 고호(古號)이다’라고 하였다. 이걸 어떻게 설명(說明)할 건가? 한반도(韓半島) 동북(東北)쪽 모퉁이에 “음산(陰山)과 발해(渤海)”가 있다고 할 텐가?
그렇다면 “발해(渤海)의 동(東)쪽 해동(海東)은 어딘가?” 그곳이 동국(東國)의 땅이 아니었던가!
서력(西曆: AD) 1,656년,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저자(著者) : 유형원(柳馨遠)】총서(總序)에서 이르기를 : 《惟東國一隅連陸,三面阻海,東西一千里,南北二千三百里。: 우리나라 동국(東國)은 한 방면이 대륙(大陸)과 이어지고 삼면(三面)은 바다로 막혀 있는데 동서(東西)가 1,000리이고 남북(南北)이 2,300리이다.》하고 하였다.
이건 당시(當時)의 중조(中朝) 즉(卽) 조선(朝鮮) 황제(皇帝)의 직할통치(直轄統治) 구역(區域)인 “기내(畿內)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 이게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땅인가?
○ 『한국인(韓國人)에게 역사(歷史)는 있는가?』 누군가가 한국인(韓國人)들에게 외친 말이다. 오죽하면 이런 말을 외쳤을까? 과거(過去)의 치욕(恥辱)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과거(過去)의 치욕(恥辱)을 상기(想起)하며, 그것으로부터 교훈(敎訓)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2023년 05월 02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