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 자료들-36-1. 위만조선의 역사와 한무제의 위만조선 침입
(왕검성 및 패수는 어디인가?)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위만조선의 역사와 왕검성 및 패수는 어디인가?
『사기』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조선왕 위만(衛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 요동 밖의 순찰지역)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한나라 연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의 옷을 입고는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나와 패수를 건너 진시황 진(秦)나라 영토였던 옛 비어 있는(秦故空地) 상하장(上下鄣: 낙랑군 雲鄣)에 거주하면서,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을 도읍으로 정했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 朝鮮蠻夷及故燕, 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참고: 연나라 전성기에 연나라가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는 것은 연나라의 진개(BC 311-279)가 진번조선을 공격하여 천여리를 점령하였는데, 그 땅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이었고, 이곳은 모두 예전에 고조선의 땅이었다. 진번조선은 한반도와 가까운 땅이 아니고, 진(秦)나라와 경계를 이룬 나라가 진번조선이었으며, 기준의 나라를 말한 것이다.
***참고: 위만은 BC 194년 번조선(番朝鮮)의 왕 기준(箕準)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운 사람이다. 사기에 조선왕 위만이라는 자(朝鮮王 衛滿者)라고 나오고, 위만이 천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었다고 했는데(魋結蠻夷服), 이는 위만이 본래 조선사람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개(BC 311-279)의 침략과 위만의 왕위에 오름(BC 194년)은 진개가 죽은 후 85년 후이므로, 연나라가 빼앗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은 모두 연나라에 빼앗겼어도 조선인이 주로 살았던 땅이다. 그러므로 위만도 이 지역에 살던 조선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그리고 점차 위만은 진번조선과 만이들을 복속시키고 예전의 연(燕)나라나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부하로 만들어 왕이 되었고, 왕검성(李가 말하기를 지명이라고 하였고,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을 도읍으로 하여 군사의 위엄으로 그 이웃의 작은 고을들을 공격하자 진번(眞番), 임둔(臨屯)등이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의 땅이 되었다.
(稍役屬 眞番朝鮮蠻夷 及故燕齊 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在樂浪郡 浿水之東) 以兵威侵 降其方小邑 眞番臨屯來復屬 方數千理)
〖집해〗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위소가 말하기를 옛 고을의 이름이다.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는데, 응소가 주를 달기를 지리지의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현의 동쪽에 있다.
(〖集解〗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凟縣 廣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臣瓚云 王儉城在樂浪君浿水之東).
- 위만의 손자 우거에 이르러 한나라의 망명자를 유인하니 그 수가 매우 많았다. 또 들어와 알현하지도 않고, 진번 이웃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이 역시 가로막아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한무제 원봉2년 한나라 사신 섭하가 우거를 달래고 타일렀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오는 길에 패수(浿水)에 이르러 배웅하러 나온 조선의 비왕(朝鮮裨王) 장(長)을 찔러죽이고 곧장 패수(浿水)를 건너 도망처서 요새로 돌어간 후 한왕에게 보고하니 한왕이 조선의 장수를 죽인 것을 잘한 일로 생각하고 힐책하지 않고 섭하를 요동군 동부도위에 임명하였다. 조선이 원한을 품고 병사를 일으켜 습격하여 섭하를 죽였다.
(傳子之孫 右渠(師古曰 孫名 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閑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 誘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朝鮮裨王長 送何至浿水 何人刺殺也 卽渡馳入塞 遂歸報天子曰 殺朝鮮長 上爲其名美 卽不詰 拜何爲遼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正意〕 入(塞) 平州楡林關也
〔正意〕 地理志云 遼東郡武次縣 東部都尉所理也 )
***참고: 섭하가 조선비왕 장을 찔러죽이고 도망친 새(塞)가 평주 유림관(楡林關)이라고 하였는데, 독사방여기요(讀史方與記要)에,
“유림관(楡林關)은 산해관(山海關) 서쪽 40里 지점이고, 일명 유관(楡關)으로 대저 번융(蕃戎)을 제(制)하여 요해(要害)에 웅거한 것이 실로 유주(幽州)와 평주(平州)사이의 천험(天險)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산해관 서쪽이므로 당산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XXX가 주장하는 청천강을 건너 도망칠 곳이 아니다.
***참고: 한나라 사신 섭하가 건너 도망쳐간 패수(浿水)는 북경 북쪽을 흐르는 조백하이고, 정의에 요동군동부도위가 있었다는 무차현은 검토가 필요하다.
- 이에 한나라왕이 죄수중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조선을 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은 제나라에서 나와 발해를 건넜는데 군사가 5만이었고, 좌장군 순제는 요동에서 나와 우거를 치니 우거 또한 군사를 내어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대항하였다. 누선장군이 제(齊)에서 7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아채고, 즉시 성을 나와 누선장군을 공격하니, 누선장군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누선장군 양복은 군사를 잃고 산속에 숨어서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하였다. 좌장군은 조선의 패수 서군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의 전황이 유리하지 않자 위산을 사자로 보내어 병력의 위세를 업고 우거를 타이르도록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를 보내고 말을 바쳤다. 조선군 1만 여명이 무기를 지니고 패수를 건너려 하자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가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기를 지니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이는가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 갔다. 사자가 돌아와서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주살했다. 좌장군이 패수 위쪽의 조선 군사를 물리치고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 역시 같이 모여 성 남쪽에 진을 쳤다. 우거가 성을 굳게 지키니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도록 끝나지 않고 지체되므로 옛날 제남태수로 있었던 공손수를 시켜 가서 치게 하고, 전군을 주어 급히 조선을 치게 하였다. 좌장군 등이 급히 조선을 치자 조선의 재상 노인, 상 한도, 니계의 상 참, 잔군 왕담이 우거의 항복을 모의하였는데, 우거왕이 듣지 않았다. 한도와 왕담과 노인은 모두 한으로 도망하였고, 노인은 도중에 길에서 죽었다.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發兵拒險 樓船將軍 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 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 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 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軍 未有利 及使衛山 因兵威往 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 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己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 誅山 左將軍浿水上軍 逎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 會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齊南太守公孫遂 往正之 謂使宜將以從事 遂至縛樓船將軍 幷其軍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 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啖(師古曰 尼谿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啖路人 皆亡降漢 路人道死)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