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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유수한 역사전문잡지에 실린 글을 우리말로 옮겨보았습니다.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글이라 비교적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잠시동안 "나는 뗏분이다"라고 최면을 걸고 보면 더욱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은 검색하면 쉽사리 찾을 겁니다.
'중국신문사'(中新網) 사이트에도 이 글이 올라와있는데 원문과 관계없는 엉뚱한 그림을 올려놓았길래 덤으로 옮겨놓았습니다.
『歷史月刊』2006年 第225期 pp. 11~16 (臺灣 : 歷史智庫)
중국기병의 흥망성쇠
中國騎兵的興衰
高育紅
기병(騎兵)이란, 이름에서 떠오르듯이, 기마작전군대를 말하는데 그 장점은 강력한 기동력과 충격능력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기병을 가진 나라의 하나다. 중국의 경우, 춘추시대 이전에는 전차 위주였고 보병은 단지 보조역할에 그쳤다. 전차 수량의 크기가 군사력의 상징이었고 기본적으로 기병은 어엿한 병종(兵種)이 되지 못했었다. 이러한 진법(陣法)으로 전쟁을 벌리던 어느 무렵, 예컨대 周나라가 목야전투[牧野之戰]에서 상(商)나라를 쳐없앨 때, 상나라 군대는 주나라 군대보다 10배나 되었지만 상나라 군대 안에 포진해있던 노예가 배반을 하는 바람에 상나라 군대의 진형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마침내 엉망으로 지고 말았었다. 이 무렵의 전쟁은 대단히 답답했었는데, 군대는 열 몇 걸음마다 멈춰서서 거듭 대오를 정돈해야만 했기때문에 리듬이 굉장히 느렸다.
기병의 기원시대
중국역사가 전국시대로 들어간 뒤, 전쟁은 지난날의 틀에 박힌 전차전술 정면전으로부터 벗어나 재빠른 기동성을 살린 전투방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병은 어엿한 독립 병종으로서 나타났었고, 당시 각 큰나라는 모두 기병부대를 일으켰었다. 예를 들어, 진(秦)나라, 조(趙)나라 따위는 “전차가 1천대요, 기병말도 1만 마리 [車千乘,騎萬匹]”라고 불렸었다. 군대작전은 보병과 기병 위주로 점차 바뀌어 전차와 기병은 나란히 중시되었던 것이다. 가장 큰 개혁은 먼저 조나라에서 일어났었다. 땅덩어리가 북녁 자락에 자리한 조나라는 누번(樓煩), 흉노(匈奴) 따위의 소수민족과 이웃했기 때문에 그 변방의 걱정거리로부터 괴로움을 깊이 받았었다. 그러나 조나라의 전통적인 전차와 보병으로는, 북방소수민족이 재빠르고 날랜 기병작전을 벌릴 때, 퍽 불리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확 바꾸고 부국강병을 위해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은 나라 안에 “오랑캐옷을 입고 말을 탄채 활쏘기[胡服騎射]” 개혁을 단행했다. 그래서 군대 안의 전차병은 줄이되 기병은 늘렸다. 한족(漢族) 전통의 헐렁한 겉옷에 소매넓은 옷을 입지말고 북방소수민족식으로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도록 고쳐서 말탄채 활쏘기[騎射]를 쉽도록 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중원 각국에서 기병의 지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해서 군대 주력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나라 또한 이와 같은 강대한 기병으로 인해 전국 후기때 밀리터리면에서 진나라와 맞설 수 있는 강국이 되었었다.
陝西 咸陽 진시황릉 출토문물로 복원한 秦 기병. 안장만 있을 뿐 등자는 없다
전국시대에는 대대적으로 기병작전이 사용되기 시작했었다. 조나라는 보•기병으로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공격해서 “땅 1천리를 빼앗았고 [略地千里]”,이목(李牧)은 1만여 기병을 보•전차병과 섞어서 사용하여 흉노 10 여만을 무찔렀다. 진나라 또한 정예기병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진나라와 조나라간의 장평(長平) 전투에서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5천 정예기병으로 조나라 군대를 가로막아서 장평에서 조나라 군대 40 여만을 몰살시키는데 핵심작용을 했었다. 초한(楚漢)전쟁때도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의 기병에 맞서기위해 진나라의 항장 이필(李必)과 락갑(駱甲)을 교위(校尉)로 삼아 훈련시킨 기병을 이용했었고, 한신(韓信)이 배수진을 치고 조나라를 쳐부술 때도 2천 여 경기병을 이용하여 적군의 본진을 기습해서 전장의 형세를 즉시 역전시켰다. ‘서초패왕(西楚覇王)’이란 영화에도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걸고 싸우는 전쟁씬에서 1만 마리의 말을 치달리는 기병의 돌격이 분량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전국 및 진나라 시대의 기병은 말안장과 언치를 완비했었지만 등자는 없어서 마상격투전에서 퍽 불리했었다. 그래서 당시 기병의 주요무기는 활이였으며 기사(騎射) 위주로 전투를 치루었지 청동검이나 미늘창[戟]은 적게 쓰였다(내려찍을 때는 검이 편리했고, 꺽어 자를 때는 미늘창 위주였다). 아울러, 이 때는 전용마갑(전투마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구로 쓰였다)도 출현했었다. 당시 진나라군은 전차, 보병, 그리고 기병을 섞어서 부대를 편제했었는데, 안마용(鞍馬俑)을 보면, 주로 활을 쥐고 있고 소모(小帽)를 쓰고 있으며, 통이 좁고 팽팽한 바지에다 좁은 소매의 겉옷을 입고있으며, 짧은 갑옷[短甲]을 걸치고 짧은 가죽신[短皮靴]를 신고있어, 기사(騎射)에 편리한 옷차림을 하고있다. 이 시기에 지은 병법(兵法)에도 기병의 사용에 대하여 논술하고 있다.
기병의 발전시대
동•서한 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기병 발전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흉노 등의 유목민족과 전투를 치뤄야만 했었기 때문인데, 기병은 아주 빨리 짱짱해졌고, 군대 작전은 이전에 비해 기병이 전차병보다 더 중시되어 기병은 승부를 결정짓는 포스를 가지게 되었다. 한나라 무렵의 기병발전을 이야기한다함은 흉노 기병을 이야기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흉노는 북방의 유목민족으로서 모든 족속이 다들 활솜씨가 좋은 병사였는데, 한나라 초기에 흉노는 “활당기는 병사[控弦之士]”가 30만이나 되어 시시각각으로 한나라 왕조의 북부를 두드러지게 위협했었다. 흉노 사람은 전형적인 아시아식 경기병이었는데 이들은 유목민족으로서 날때부터 말등 위에서 성장해서 기사(騎射)를 잘했다. 게다가 이들은 기마술이 뛰어난데다 활기술이 굉장히 빼어났고, 보다 가벼운 가죽 갑옷만을 입고있어서 꽤 민첩했었다.
한나라 왕조는 흉노와의 전투에서 불리한 국면을 타개하여 확 바꾸기 위해 기병발전에 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한 무제(武帝)때에 이르렀을 때는 10만 기병을 운용하여 주력으로 삼아 출격할 수 있었는데, 흉노와의 몇 십년에 걸친 전쟁 동안에, 한나라의 명장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따위는 몇 만의 기병을 여러 차례 이끌고 우회하여 배후(혹은 측면)을 둘러싸서 적의 후방까지 깊이 들어가는 전법 따위를 채용하여 흉노를 크게 물리쳤다. 그 기원전 119년에 무제는 위청과 곽거병 두 사람에게 각각 5만 기병을 내주어 출격하게 하고, 보졸(步卒) 수 십만과 말 10만 여 마리를 군량운반을 위해 딸려보냈었다. 곽거병 부대가 흉노땅 깊숙히 2천 여리나 들어가 적군을 크게 쳐부수고 랑거서산(狼居胥山, 지금의 몽고에 있음)에서 승리를 고하는 제사를 지낸 뒤에 되돌아온 사건은 두고두고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 시대의 중요한 성취는 관마제도(官馬制度)의 확립인데, 한나라는 흉노에 맞서기 위한 기병을 발전시키려고 말 사육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나라 문제~경제 시기에는 이른바 “마복령(馬復令)”을 시행해서 부역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민간에 말 사육을 장려했고, 아울러 중앙과 지방에 말을 관장하는 기구를 설치했었다. 중앙에서는 태복(太僕)을 임명하여 관리하게 했고, 지방에는 마승(馬丞)을 설치하여 책임을 지게 했었는데, 이것들은 관원이 책임지고 말을 사육하여 군수용으로 비축하기 위함이었다. 이 제도는 한나라 초부터 무제까지의 시기에 40 여 만 마리나 되는 말을 마구간에 있게해서, 한나라가 흉노와의 전쟁에서 대량의 말 마리수를 소모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었다.
한나라 시대에 기병은 크게 발전해서 군대의 주력병종이 되어 전차의 지위를 대신하게 되었다. 병종 내에도 한나라 때는 경기병과 중기병으로 나뉘어있었다. 경기병은 기본적으로 갑옷이 없고, 무기는 활 위주였으며, 비교적 왜소한 전투말이 주어졌다. 중기병은 갑옷을 걸치고, 무기는 미늘창[戟], 창[矛], 그리고 둥근고리칼[環首刀: 환두도] 따위의 근접전투용 무기였으며, 적진에 돌격하여 허물 수 있도록 키크고 덩치좋은 말이 주어졌다. 한나라 시대에 제련기술이 두드러지게 발전함에 따라서 마상전투에 쓰기 좋은 고리손잡이-긴-철칼[環柄長鐵刀]이 많이 출현하였는데, 칼등이 두툼한데다 칼날끝이 날카로웠기때문에 찍어베는데 알맞아서 기병의 주요병기로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한나라 시대 기병의 주요무기로는 창[矛], 칼[刀], 미늘창[戟], 활[弓], 석궁[弩] 따위가 있었다. 이 시기의 기병은 기동병력의 전술을 발전시켰는데, 한나라 군대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장거리를 우회하여 적을 감싸 기습하는 작전을 대대적으로 채용했었다. 한나라 시대에 기병기술과 말 마리수가 흉노의 수준에 달했을 때부터 흉노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게 되었다. 한나라 군대가 보편적으로 철갑(鐵甲)과 강철칼[鋼刀]을 장비하게 되었던 무렵에도 흉노는 철을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살촉은 모두 소•말뼈 혹은 물고기뼈를 깍아 만들어져 있었고, 나라힘의 열세는 흉노 세력을 아시아로부터 쫓겨나는 국면을 만들었다.
기병의 전성시대
이 전란의 시대는 전쟁이 몹시 빈번했었다. 삼국역사는 굳이 말할 것도 없고 특히 16국 시대에 그러했었다. 남북조시기에 북방민족이 중원에 대량으로 들어오면서(속칭 오호의 중화 작란) 기병의 운용은 최고봉에 달해서 각 방(주로 북방)의 교전에서 기병이 대규모로 사용되었다. 기병은 전장의 중요한 병종이 되었고, 중국의 기병 또한 중기병의 시대로 발전되었다. 이 시기를 통틀어 보면 북방의 군사력이 남방보다 강했고, 북방 각국의 소수민족정권은 처음엔 군대가 모두 기병이던 것이 발전하면서 보병이 점차 늘어났지만 군대의 주력은 변함없이 기병이었고, 전쟁시에도 상당히 많은 기병을 동원하여 참전하였다. 예컨대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남하할 때 동원한 기병은 27만이었고,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가 송(宋)나라를 칠때는 기병 60만이 회수[淮]를 건너 장강(長江)을 직접 괴롭혔고, 양(梁)과 위(魏) 사이의 종리(鐘離)전투에선 위나라 군대 80만 중에 24만이 기병이었다. 이 시기 기병전의 규모는 앞시대를 멀리멀리 넘어섰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시기의 한가지 커다란 중요한 발전은 두 발을 디디는 등자의 발명인데, 중국에서 가장 이르거니와 세계에서도 가장 이른 이 등자는 서진(西晉)에서 출현하였다. 등자는 시대의 한 획을 긋는 발명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인류문명을 굉장히 크게 진전시켰다. 밀리터리상, 등자의 출현은 기병의 근거리격투전을 용이하게 만들었으며(칼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게다가 기병의 장거리 행군도 유리하게 만들어서 기병의 좋은 기동성과 강한 충격력이란 우수성이 더욱 효과를 발휘하게 했다. 서방에선 등자의 발명이 중세 서양식 중기병인 기사(knight)의 출현을 초래했다. 이 시기의 기병은 중기병 위주였다. 당시의 중기병는 사람과 말 모두 개갑(鎧甲)을 걸쳤서 중기병의 방호력은 비할 바 없이 강력해졌고, 보병의 입장에선 무지막지한 충격력을 받았다. 당시의 기병은 또한 장거리 무기로서 활을 갖추었고, 길이가 긴 병기도 갖추어 관통력이 보다 뛰어난 기병용 장창[長矛]이 대대적으로 사용되었으되 미늘창[戟]은 점차 퇴출되어 일종의 의장용 장식이 되고말았다. 짧은 칼[短刀] 또한 제식무기로 되었는데, 앞시대의 둥근고리칼[環首刀]에 비하여 이 시대의 칼몸[刀體]은 더욱 넓적해졌고 칼머리[刀頭]도 앞끝은 예리하고 뒤쪽은 비스듬한 마름모꼴[斜方形]으로 고쳐져서 실전에 보다 적합했었다.
수•당과 5대시기에 기병은 군대안에서 확고한 지위에 있었다. 이 시대는 기병과 보병을 나란히 중시했고, 나라마다 기병규모는 남북조 시기엔 미치지 못했지만 변함없이 중요한 포스의 한가지였다. 당나라는 무공(武功)으로 나라를 세웠거니와 태종
5대10국의 전란이 끝난 송•금(宋•金)시대에는 북방유목민족이 대대적으로 발돋움하여 한족(漢族) 왕조를 위협하였다. 이들 소수민족 군대의 정예는 주로 기병이었고, 기병의 발전이 재차 높은 파도로 밀려왔다. 먼저 송나라 왕조를 두고 이야기해보자. 송 왕조는 중국역사상 하늘을 찌르는 무공이 짱짱하지 못한 왕조 시절의 하나였다. 당나라 이후 5대시기에 발돋움한 소수민족이 서북의 말 생산지역(하투평원 등등)을 점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물론 송나라는 변방에서 말을 사거나 다른 물자를 말과 맞바꾸든지, 아니면 감목 등을 설치하는 방법도 사용했었다. 그러나 시종일관 기병의 수요를 채우지 못했고, 그래서 늘상 제대로된 강력한 기병을 가지지 못했었다. 남송(南宋)때는 더욱 엉망이어서 심지어 전전사(殿前司, 즉 황제 친위군[禁軍])마저도 기병의 5분의 1은 부릴 말조차 없었다. 송나라 시대에 고안된 전투행위 진법은 기본적으로 기병을 대규모의 보병 진영 주위에 배치해서 연합작전 혹은 측면엄호를 하게끔 꾸며져있었다. 예를 들어 송 태종(太宗)의 “됫놈밟아주기 완벽진법[平戎萬全陣]”은 주력을 전차와 연계한 보병으로 두어 중간에 밀집진세로 포진케 하고, 기병을 전후좌우에 배치하여 경계와 엄호를 떠맡으면서 적군의 기병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게 했었다. 송나라의 전법은 유럽의 초기 기병운용방식, 즉 방진을 친 보병을 주력으로 삼되 기병은 양측면을 튼튼히 하는데 써먹었던 방식과 닮았던 것이다. 사실상 이와 같은 진법에서 기병은 보병의 보조 포스였고, 적을 꺽어 승리를 챙기는 핵심 포스로 쓰인것은 보병진영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말 마리수의 부족을 어쩌지 못했음을 들추는 것이라 하겠다.
북방에서 차례차례 세워진 소수민족정권은 비교적 세력이 강대했었고, 군대는 기병을 주력으로 삼아 전쟁을 치루었었다. 요•금(遼•金)의 군대는 기병의 기동작전을 몹시 궁리했는데, 일반 군대안에서 모든 정규병사에겐 몇 마리의 전투마가 배치되어 있어서(요나라 군대는 정규군 1명당 말이 3마리였다) 기동력이 아주 강력했었다. 예를 들어 요나라와 송나라 사이의 유주(幽州)전투에서 요나라 군대는 현지의 평탄한 지형과 기병의 기동력에 의지하여 차례차례 송나라 장수 조빈(曹彬)과 반미(潘美)를 각개격파했었다. 금나라 병사 또한 야전에서의 좋은 기병 솜씨가 장점이었다. 금나라에는 유명한 “괴자마(拐子馬, 역주: 중기병끼리를 사슬로 연결하여 흩어지지 못하게 만든 기마부대. ‘괴자마’란 말 자체는 송나라측의 비칭이라고 생각된다)”가 있었는데, 전투를 치룰 때 보병군대를 정병(正兵)으로 두되 “괴자마”를 두 날개로 삼아 돌격하게 했고, 때문에 벌판에서 송나라 군대와 전투를 할 때 무척 우세했었다. 이 시대의 기병은 북방소수민족에 의한 기병 위주였는데, 이들의 전투행위에 쓰인 주요 무기는 활과 마도(馬刀)였고 또 낭아봉(狼牙棒, 역주: 곤봉 끝에 선인장 같은 쇠뭉치가 달린 무기) 따위의 특수한 무기도 있었다 (금나라 사람은 이와 같은 무기를 즐겨써서 당시 송나라 시대의 민요에 ‘저들한텐 금올술(金兀術)이 있다지만 우리한텐 악(비) 원수님이 있다네. 저들한텐 괴자마가 있다지만 우리한텐 마찰도(麻扎刀)가 있다네. 저들한텐 낭아봉이 있다지만 우리한텐 천령개(天靈蓋)가 있다네’ [他有金兀術, 我有岳元帥;他有“拐子馬”, 我有麻扎刀;他有狼牙棒, 我有天靈蓋]란 노래도 있었다). 당시의 기병은 경장차림으로 바뀌기 시작하여 두드러지게 방호갑[護甲]이 적어서 더욱 큰 기동력을 획득했지만, 나라마다 모두 중기병부대[重甲部隊]도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하(西夏)의 기병인 “평하땅 철새매암컷 새끼[平夏鐵鷂子]”는 전투력이 강력하기로 이름을 떨쳤었다. (역주: 서하의 보병을 두고도 송나라는 “횡산땅 발발이 새끼 [橫山步跋子]”라고 불렀었다)
오논강[斡難河] 강가에서 일어난 몽고민족은 기병전술을 前화약무기시대의 최절정 단계까지 발전시켰다. 이 시대의 몽고기병은 인간의 눈에 공포의 상징으로 비춰졌었다. 왜냐하면 장거리 기습, 선회•포위 등 기병의 우세함을 극한까지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몽고사람은 백호•천호제(百戶•千戶制)를 실시했으며, 전원이 모두 병사였으며, 군관(軍官)은 세습되었다. 그들은 “말에 오르면 곧 전투에 대비하고, 말에서 내리면 곧 떼지어 가축을 길렀다[上馬則備戰鬪, 下馬則屯聚牧養]”고 하는데,전쟁시에는 스스로 무기를 갖추고 무장을 꾸려 출정했으되 평상시에는 평범한 가축치기였단 말이다. 군대의 전투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몽고사람은 자주 대규모 에워싸기 사냥[圍獵]를 하여 부대를 단련했고, 아이들도 또한 어릴때부터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말탄채 활쏘기 능력을 키웠다. 여기에다 칭기스칸[成吉思汗], 무카리[木華黎], 수부타이[速不臺], 그리고 톨루이[拖雷] 등의 출중한 전술가의 지휘가 더해지자 몽고사람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일찍이 없었던 드넓은 땅덩어리를 정복했다. 동방에서는 송, 금, 그리고 서하를 쳐없앴고, 서방에서는 호라즘[花剌子模, 아프카니스탄]을 물리치고 러시아초원을 정복했으며, 서방연합군을 쳐부수고 곧장 다뉴브강[多瑙河] 강가까지 이르렀었다. 몽고의 대칸이 이 때 죽지않았다면 아마도 유럽 전역이 몽땅 몽고의 쇠발굽 아래 굴복[臣服]했을 터인데…….
몽고기병은 초강력 기동력을 가졌었다. 병사 한사람이 6마리 이상이나 되는 전투마를 갖추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어서, 바꿔 타며 달리면, 하루 낮에 100km나 전진할 수 있었다. 폴란드[波蘭] 원정에서 몽고사람은 우회전략을 펼쳤고, 그래서 이를 두고 유럽사람은 환상과 같은 기동능력이라고 말들하였다. 몽고기병의 주요 병기는 활이었다. 기사(騎射)에 노련한 몽고사람은 강궁(强弓)을 당길 수 있었으며, 몽고사람은 나무와 뼈를 혼합해서 만든 활을 사용했었다. 이것은 대단히 강력한 관통력과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어서 고속 기동중(혹은 말탄채 뒤로 활쏘기)에도 정확한 사격이 가능한 몽고사람은 근접전투 중에도 적에게 어마어마한 살상을 가할 수 있었다. 몽고사람은 스스로 무기를 준비하는 경우가 제법있었기 때문에 활과 마도(馬刀) 이외에도 사병은 자신이 즐겨쓰는 무기, 예컨대 장창[長矛], 낭아봉, 그리고 올가미 밧줄(繩套(lasso), 말 목에 거는 것이되 전쟁터에선 사람도 옭아잡을 수 있었다) 따위를 가지고 있었다. 방호구의 경우, 몽고사람은 가죽으로 만든 갑옷 위주였는데 가벼운면서도 보다 튼튼했었다. 철갑(鐵甲) 만큼 방호력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더욱 큰 기동성을 얻을 수 있었다. 몽고말 또한 평가할 만하다. 몽고말은 몸집이 작은 편으로서 몸집이 큰 아라비아말이나 아리안말의 빠른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몽고말은 적응력이 강하고, 변변찮은 먹이에도 잘 견뎌 쌀찌우기 쉬웠고, 수명도 길었다. 때문에 장거리 행군에 매우 적합했는데, 후방으로부터 보급을 기대하기 힘든 작전에서도 이런 말은 아무데서나 먹이를 구할 수 있었고, 초원지형에 있을 경우엔 하루에 50~100km나 행군할 수 있었으며, 1년 내내 부릴 수 있었다. 더군다나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몽고말의 어미말은 산유기에 300~400kg 만큼의 젖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는 장기간 원정에 따라 후방부터의 보급이 보장되지 못했던 몽고군의 중요한 먹을거리 출처였다(또 한가지 출처는 약탈이었다). 몽고사람은 유목민족이다. 이 사람들은 시리도록 추운 땅에서 태어나 자랐고, 열악한 기후를 굉장히 잘 견뎠으며, 필요한 물질조건도 아주 낮았었다. 그러다보니 일반 농경민족으론 도저히 견줄 수 없는 전투력을 가졌었다.
수•당부터 몽고시대까지는 중국 기병발전의 전성기였다. 특히 몽고사람은 기병전술의 혁명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몽고말이 내륙 한인(漢人)의 토종말을 대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변치않는 일이란 없다[諸行無常]. 송나라가 정식으로 화기(火器)를 늘어놓기 시작하면서 기병 쇠퇴의 서막이 열렸다.
기병의 몰락시대
명•청(明•淸) 이후 화기가 무섭게 발전했고, 전문적인 화기부대와 포병이 출현함에 따라 기병의 지위는 점차 떨어졌다. 명나라 이후, 지난날엔 주요 전략적 포스였던 기병은 나날이 사그라졌다. 명나라 시대의 기병은 주로 기타 병종과 어울려 전쟁행위를 벌렸는데 여기에는 화기도 배치되어 있었다. 명장 척계광(戚繼光)은 보병, 전차병, 그리고 기병이 어울린 일종의 합동작전방식 군영을 고안했었고, 또한 이 시기에는, 먼저 화기(화포와 화창[火槍])에 불을 지피고(화력 준비), 이어서 기병이 돌격하고, 보병이 뒤따라 전진하는 전법이 발전했었다. 유럽에선 나폴레옹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이와 유사한 전법이 발전해 나왔었다. 청나라 왕조에 이르러서는, 청나라 왕조는 스스로를 활과 말로써 나라를 세웠다고 여겼거니와 그 나라를 세울 때 여진(女眞)은 여전히 전통적인 의미의 기병이었던지라,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더군다나 화기를 그다지 크게 중시하지 않아서 결국 열강이 중국을 마음대로 욕보이는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당시는 이미 화기의 시대였고 기병의 지위는 더욱 낮아져 있었다. 기관총과 트렌치(참호)로 이루어진 진지가 전쟁에 나타나기까지 줄곧, 기병은 기본적으로 군대안에서 지위를 상실한 채 점차 밀리터리 무대에서 퇴출되고 있었다. 이후 장갑기계화부대가 나타나기까지 줄곧, 기병은 역사가 되어 단지 어느 경축 행사에서 사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중국기병의 발전사를 넌지지 바라보면, (중국은) 기병이 태어난 날부터 전세계를 리드했었다. 기병전술 및 그 무기장비의 발전부터 몰락까지야말로 중국 고대과학발전의 발걸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명나라 왕조의 보병 위주 군대가 기병 위주의 원나라 왕조를 물리친 일은 다름아닌 중국의 화기연구 및 응용의 대성취를 시원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명나라 시대에 그 군대의 화기 배치는 일본을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시의 유럽국가마저 넘어섰었다. 북경 어림군(御林軍) 중
2006년 6월, 심양세계도예박람회 기마전. 薩爾滸전투를 재현한 것으로 금나라군과 명나라군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중국신문사, 廖攀 찰영)
중국인민해방군 기병돌격대. (중국신문사, 李翔 찰영)
첫댓글 토목보의 변 이후 벌어진 북경 수비전에서 명나라군은 1천문 이상의 화포와 화총 2만정, 화창 11000정, 화전 44만개를 집중적으로 운용해서 에센이 이끄는 20만 오이라트군을 무찌르죠..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자료들 잘 봤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본문 말미의 ; " (중국은) 기병이 태어난 날부터 전세계를 리드했었다. 기병전술 및 그 무기장비의 발전부터 몰락까지야말로 중국 고대과학발전의 발걸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여기서도 동아시아 전체=중국이라는 사고방식이 여지없이 나오는군요. 중화주의... 자존망대 .. 상당히 거시기 하고 쩝 소리 나나... 아무튼 좋은 자료 보았습니다..^^
원의 기병이 어찌 니네 중국의 역사니? 이런.. 샹!!!ㅋㅋ
서양과 중앙아시아의 기병운용이 나오지 않은 것이 좀 그렇군요. 그리고 1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서양에서 기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것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조금.....
기병의 몰락을 너무 일찍 위치시키고 있네요. 청의 팔기군의 존재도 언급하지 않고 있고. 서양에서도 19세기에 나폴레옹이 '쿼러시어'라 불리는 신개념 중장기병을 앞세워 유럽을 제패했는데. 슬픈 희극으로 끝나긴 했지만 2차 세계대전때도 폴란드에선 기병으로 독일의 전차에 맞섰을 정도로, 기병은 생각보다 오랬동안 존속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