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6일 [연중 제15주일]
마태오13,1-23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깊게 보고자 하시는 말씀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군중들에게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귀’가 당신의 비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태 13,34 참조).
예수님은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이해하기 쉬워지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마태 13,13 참조).
예를 들어 꿀이 없는 세상에 꿀을 맛본 사람이 있다면 그 꿀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 꿀은…. 마치 꽃처럼 향기롭고, 태양처럼 따사롭고, 사탕처럼 달곰하며, 엄마 품처럼 포근한 맛이 납니다.”
비유는 이렇듯 이미 다른 차원의 것을 경험한 사람이 자신의 체험까지 오게 만들기 위한 수단입니다.
마치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어떤 섬에 그들이 문명의 세계로 나아올 수 있도록 놓아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말씀이고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자신들의 세상보다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이 더 유익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리를 건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해석하려 들지 말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아무 쓸모 없는 황무지와 같은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게으른 두 아들에게 엄청난 크기의 땅을 반씩 나누어 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받은 땅속엔 내가 공평하게 나누어 묻어 둔 나의 모든 유산이 있단다.
그것을 찾아내어 행복하게 살아라.”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두 아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각자의 땅을 열심히 팠습니다.
하지만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고된 노동 끝에 아버지에게 속았다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는 땅을 헐값에 팔아 방탕하게 소진하였습니다. 결국 병에 걸려 외롭게 죽어갔습니다.
둘째는 달랐습니다.
역시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땅을 파다가 밭의 돌을 다 걷어 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씨앗을 뿌리니 엄청난 수확을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황무지이지만 비옥한 땅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돈도 많이 벌었고 행복한 가정도 꾸렸습니다.
왜 아버지의 말에 대한 두 아들의 생각이 달랐을까요?
첫째는 비유 말씀을 해석하려 들었고 둘째는 비유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어떤 말씀을 해석하거나 분석하려는 시도는 내가 그 말씀을 한 분 위에 선다는 뜻입니다.
더 똑똑한 사람이 덜 똑똑한 사람의 말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을 귀가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말씀을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이들은 자아를 긍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아는 뱀입니다.
뱀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뱀이 요구하는 ‘가져라’, ‘먹어라’, ‘높아져라’라는 명령이 행복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반대되는 하느님의 요구는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 “이리 나와라!”(요한 11,43)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문밖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길과 같은 사람은 자아를 긍정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은 들었다가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가시밭과 같은 사람은 돈 걱정 때문에 결국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부모님 말씀에 순종할 줄 압니다.
그 말씀만이 자신을 어른으로 성장시켜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믿기 때문에 부모의 말을 분석하기보다는 순종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십일조 봉헌’이 신앙인으로서 들을 귀가 있다는 첫 번째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서부터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봉헌하면 가시밭과 같이 될 일은 없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주님의 가시밭이었기 때문에 멸망하였습니다.
나무토막에 계속 불을 지피면 그 안에 있든 물이 빠져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 내면의 안 좋은 욕구들을 솎아내기를 원치 않으면 아무리 성령의 불이 내리더라도
그 사람 안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려는 마음을 갖읍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6일 [연중 제15주일]
마태오13,1-23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오래전 아무것도 모르면서 형제들과 이런저런 농사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뙤약볕에 일하다 보니, 지나가던 동네 노인들이 수시로 멈춰서시고는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여.’라며 훈수를 뜨시는 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때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풍성한 수확에 기뻐도 했지만, 투자한 모종이나 줄기 값도 못 건진 때는
속도 많이 상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우리 한명 한명을 눈여겨보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끽하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라고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평생 울적하게 살면서,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얼마나 슬퍼하실까? 걱정입니다.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는 씨앗 자루를 손에 들고 작년 추수 이후로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채 널려 있는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립니다.
다음에 쟁기질을 합니다.
씨앗의 운명은 쟁기질이 끝난 후에 결정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에서는 아무런 수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굶주린 새들이 즉시 날아와서 쪼아 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 역시 해가 떠오르면서 오래 가지 않아 메말라 죽어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덤불이 훨씬 더 빨리 자라면서 연약한 싹을 질식시켜 버리기에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라는 놀라운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 한 알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우선 작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씨앗 안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기보다는 발아되기를,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기를, 썩어 없어지기를, 그래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일>
(2023. 7. 16.)(마태 13,1-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18-23).”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신앙인의 신앙생활 모습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는, 믿기를 거부하고 구원받는 일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2) 이 비유는 마지막 심판 때의 상황에 대한 비유입니다.
지금은 ‘좋은 땅’이더라도 중간에 변절하거나 타락하면 나쁜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심판 때에 ‘나쁜 땅’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좋은 땅이었다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나쁜 땅’이더라도 회개해서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좋은 땅’으로 심판대에 선다면, 그 사람은 ‘좋은 땅’입니다.
3) 이 비유는 신앙인들을 네 종류로 분류한 비유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가운데에서 몇 가지를 대표적인 예로 든 것뿐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네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종류대로 분류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편견과 차별로 이어지고, 남을 함부로 심판하는 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4) ‘내 안에’ 좋은 땅과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이
모두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동시에 ‘내 안에’ 공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좋은 땅이 드러나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길, 돌밭, 가시덤불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5)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길이 될 때도 있고,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될 때도 있고, 좋은 땅이 될 때도 있습니다.
좋은 땅이었다가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이 되기도 하고, 정신을 차려서 다시 좋은 땅으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태로 끝나는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내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회개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교만한 일입니다.
마지막에 회개할 시간이 있을지 없을지는 전적으로 주님의 권한에 달린 일입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태평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 ‘나중에’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는 자만심과 방심도 어리석은 교만입니다.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이라는 말씀에서 ‘깨닫지 못하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깨달음’이 아니라,
‘실천하지 않으면’이라는 뜻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고, 또는 믿는다고 말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는 경우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 2,17).” 라고 말합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 즉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는, “마귀에게 말씀의 은총을 빼앗긴다.”인데, 믿는다고 생각만(말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는 것은 마귀가 바라는 대로 사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떠나서 마귀 편에 서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21절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다.” 라는 말씀은,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 있지 않다.” 라는 뜻인데, 성당에서는 신앙인 같은데, 세속 생활을 할 때에는 전혀 신앙인 같지 않게 사는 것을 뜻하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환난이나 박해 때에 금방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돌밭’이나 ‘길’이나 사실상 같은 경우입니다.>
22절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처음에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또는 처음에는 믿는 대로 실천한다고 하다가,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생각이 신앙생활을 잘하려는 생각보다 더 커서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바람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초심을 잃어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걱정할 일들이 생겨서 걱정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도 숨이 막힐 정도로 걱정만 하고 있는 것은
믿음을 잃어버린 모습이고, 그것은 잘못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믿는다면, 걱정할 일이 생겼을 때
주님께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옳고, 믿음과 기도로써 걱정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