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26일부터 이승만이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서울 시민들의 이동 금지 명령내리고 지만 도망간게 참 유명하죠.
18새끼.
이외에도 이승만의 악행들
반민특위 해체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약자로 1,000여 명의 반민특위조사대상자의 명단을 작성, 계속 조사작업을 진행했던 단체입니다. 그러나 행정부는 좌우충돌 및 사회여건 등으로 불안정한 시국에 사회지도급인사의 대량검거는 사회불안을 부채질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탄압하였고 급기야는 경찰이 반민특위 특경대(반민특위 사법경찰관리)를 습격하여 대원을 연행, 조사하는 등의 행패도 부렸고, 마침내 1949년 8월 22일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 폐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공소시효는 8월 31일까지로 제한되었음). 이로써 반민특위는 참다운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나머지 임무를 검찰에 넘기고 흐지부지 해산되었습니다.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두차례에 걸쳐 헌법을 고칩니다. 첫번째 개헌은 1952년에 있었던 발췌개헌(부산정치파동)으로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미 한차례 부결되었던 헌법개정안을 살짝만 바꿔서 경찰과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상태로 의결을 시킵니다.
그리고 사사오입개헌은 1954년에 있었던 개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규정한 헌법이었는데 당시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나타났다. 당시의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이었으므로 이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한 충분한 선은 136명이어야 했습니다(재적의원 2/3는 135.33…명이므로, 자연인은 136명이어야 함). 그러나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절사한다는 수학상의 사사오입(반올림)의 해괴한 논리를 적용하여 가결을 선포한바 있습니다.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에 있었던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위해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 시위진압 도중 경찰의 실탄발포로 최소한 8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어 4월 19일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4월 26일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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