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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2~165)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162>혁명가에서 매국노 된 왕징웨이(汪精衛), 암살 위기 7번 모면 |제163호| 2010년 4월 25일
▲일본에 투항하기 4년 전인 1935년 1월, 배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행정원장 왕징웨이(汪精衛·왼쪽 첫째)와 국민당 중앙위원 쩡중밍(曾仲鳴·왼쪽 둘째). 당시 외교부장을 아무도 하려 하지 않아 왕징웨이는 외교부장을 겸하고 있었다. 김명호 제공
일본은 군사와 정치를 병행해 중국을 침략했다. 점령지구마다 친일 정객들 중에서 일본의 대리인이 될 만한 사람을 선정해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베이징을 점령한 후 중국은행 총재와 재정부장을 역임한 왕커민(王克敏)을 내세워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난징에는 몰락한 정객 량훙즈(梁鴻志)를 수반으로 하는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수립했다. 상하이에도 시 정부를 출범시켜 건달 출신 목욕탕 주인을 시장으로 임명했다. 다들 굽실거리며 말들은 잘 들었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이 형편없었다.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인물을 물색했다. 국민당 부총재, 중앙정치위원회 주석, 국민참정회 의장, 국방최고회의 부주석을 겸직한 신해혁명의 영웅 왕징웨이(汪精衛) 정도는 돼야 전민항전(全民抗戰)을 선포한 장제스에게 맞설 수 있었다. 마오쩌둥에게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았다.
1938년 12월 18일 왕징웨이는 교통부 차장 쩡중밍(曾仲鳴), 선전부장 저우푸하이(周佛海) 등 최측근들과 함께 전시수도 충칭(重慶)을 떠났다. 월남의 하노이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충칭의 중앙당과 장제스에게 보내는 전보 형식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일본은 중국의 영토를 요구한 적이 없다. 군비의 배상도 요구하지 않았다. 일본과 전쟁을 계속하면 중국은 필히 망한다”면서 일본과의 선린우호(善隣友好), 경제제휴(經濟提携), 공동방공(共同防共)을 선언했다.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은 왕징웨이를 제거하기 위해 하노이에 특수 공작원들을 파견했다. 일곱 차례 계속된 암살의 막이 올랐다. 장제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왕징웨이는 컬럼비아가의 3층짜리 고급 빌라에 은신하며 측근들 외에는 접촉을 피했다. 왕의 거처를 확인한 암살단은 미남계(美男計)를 썼다. 미인계보다 돈도 덜 들고 성공 확률이 훨씬 높았다. 빌라에 근무하는 월남 여인이 덜컥 걸려들었다. 왕의 생활습관과 거처의 내부구조를 알아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왕징웨이는 아침을 신선한 빵으로 해결했다. 매일 아침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빵집에 배달을 시켰다. 공작조는 배달부를 매수해 빵에 독극물을 주입했지만 그날 따라 빵을 기다리던 왕징웨이는 과일로 아침을 때웠다. 첫 번째 암살 계획이 실패하자 월남 여인은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정보라도 들고 가야 잘생긴 중국 청년을 만날 수 있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욕실 수도관에서 물이 샜다. 왕은 원래 목욕을 싫어했지만 하노이의 더위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목욕을 했다. 공작조는 빌라에 수도관을 수리하러 가는 사람을 납치했다. 욕실에 진입한 공작원은 캔으로 된 독가스의 마개를 따서 욕조 밑에 설치했다. 완벽한 작전이었지만 경호원이 욕실에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두 번째도 성공하지 못했다.
1939년 3월 20일 왕징웨이는 경호원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하노이 교외로 유람을 떠났다. 공작조는 중간 지점에 매복했다. 그날 따라 월남 경찰들의 경호가 삼엄했다.
실패를 거듭하자 충칭 측의 성화가 불같았다. 직접 빌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3월 21일 새벽 수류탄, 경기관총, 도끼로 무장한 행동조가 빌라의 담을 넘었다. 경비견이 요란하게 짖어대는 동시에 월남 여인은 전기를 차단했다. 행동조는 경호원들을 몰살시키고 2층 4호실 문짝을 도끼로 부쉈다. 침상 밑에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엎드려서 뭔가 끄적거리고 있었다. 잠옷 차림의 여인은 창문에서 뛰어내릴 태세였다. 총성이 난무하고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중국 영사관으로 철수한 공작조는 충칭에 성공을 보고했다. 다음 날 신문을 받아본 공작조는 깜짝 놀랐다. 죽은 사람은 왕징웨이 부부가 아니었다.
쩡중밍은 왕징웨이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프랑스 유학 시절 파리에서 왕을 안 뒤부터 비서로 자처했다. 왕이 충칭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던 것도 쩡이 교통부 차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노이에 도착한 이후 왕징웨이의 신변을 염려한 쩡은 밤마다 왕과 침실을 바꿨다. 모든 자금을 관리하던 쩡은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수표에 서명을 했다.
1940년 3월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중국현대사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난징 국민정부(僞國民政府)’의 주석 겸 행정원장에 취임했다. 외부의 침략에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중국인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역사상 제1의 매국노로 전락한 젊은 날의 혁명영웅은 이후에도 세 차례나 암살의 위기를 모면했다. <163>소설가 루스어(陸士諤), 100년 전 상하이 엑스포 예언 |제164호| 2010년 5월 2일
▲1904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를 위해 서태후(西太后)는 황족 가운데 가장 민주적이던 푸룬(溥倫·앞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을 대표로 파견했다. 중국관 앞에서 서양 사람들과 함께서 있는 중국 대표단의 모습. 김명호 제공
중국은 세계박람회(엑스포)와 인연이 많았다. 1851년 5월 1일 런던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당시 템스 강변에는 영국 상인들이 홍콩에서 만든 중국 범선 치잉(耆英)호가 정박해 있었다. 구경꾼들이 줄을 이었다. 빅토리아 여왕도 치잉호를 찾았다. 배 안에는 영국인들에게 고용된 30명의 중국인 선원이 있었다. 이날 여왕은 변발을 늘어뜨린 시성(希生)이라는 선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성을 박람회 개막식에 초청했다. 영국은 황급히 중국관을 마련했다.
외국인들 틈에 끼어 개막식을 참관하던 시성은 감격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귀빈들 틈을 순식간에 뚫고 나와 여왕에게 경극 배우들처럼 멋진 인사를 선사했다. 사람들은 대청제국이 파견한 외교사절인 줄 알았다. 상하이에 쉬룽춘(徐榮村)이라는 동작 빠른 비단 장수가 있었다. 런던에 큰 시장이 선다는 소식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창고에 있던 비단 열두 필에 ‘영기호사(榮記湖絲)’라는 상표를 붙여 런던으로 보냈다. 엄선을 거듭한 최고의 품질이었지만 포장이 엉성해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최고의 오피니언 리더는 부인네들이었다. 이들의 입을 통해 원산지에서 온 비단이라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영기호사’는 금상을 받았다. 여왕이 직접 상패와 상장을 수여했다.
물건만 보내고 참석을 하지 않았던 쉬는 상장과 상패를 만져 보기는커녕 구경도 하지 못했다. 이후 박람회마다 청(淸)나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관심이 없었다. 중국에 와 있던 외국인으로 대표단을 구성해 참가시켰다.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청나라 정부는 닝보(寧波)세관원 리구이(李圭)를 파견했다. 리는 은 20만 냥에 해당하는 공예품·차·비단·도자기 등을 720개 상자에 싣고 상하이를 떠났다.
리구이는 세계박람회에 참석한 최초의 중국인답게 기록을 남겼다. “전 세계가 중국 상품을 필요로 한다. 듣자 하니 1∼2년 후 파리에서 또 박람회가 열린다고 한다. 계속 열릴 모양이다. 중국이 세계무역에서 일석이라도 차지하려면 상업계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참석시키는 것이 좋겠다. 나 같은 사람이 올 곳이 아니다. 전통적인 수공예품이나 특산품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공상업을 발달시켜야 국제사회에서 대접받는다.”
청나라 정부가 미국으로 보냈던 제1차 관비 소년 유학생들이 단체로 중국관을 찾았다. 리구이는 이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집 생각 나지?” “생각한들 소용이 있나요, 공부나 열심히 해 국가에 보답해야죠.” 리는 자신의 소감을 적었다. “소년들은 점점 미국화되고 있다. 변발을 감추기 위해 큰 모자들을 쓰고 날아오는 공을 방망이로 두들겨 패고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심지어 예배를 보러 몰래 교회에도 다닌다.” 리는 귀국 후 자신의 일기를 토대로 '환유지구신록(環游地球新錄)'을 저술해 지금의 총리 격인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에게 제출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리훙장은 직접 서문을 썼다. 1876년을 기점으로 서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년 후 열린 파리 박람회에 청나라는 주영국 공사 궈충다오(郭崇燾)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해 파견했다. 리훙장도 측근 마젠중(馬建忠)을 정치와 경제를 배워 오라며 딸려 보냈다. 궈충다오는 서구의 기술과 정치·교육제도를 칭찬하는 일기를 남겼다. 마젠중은 리훙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균세(均勢:세력이 균형을 이룬 형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우리가 천조대국(天朝大國)이라는 생각을 버리실 것을 권합니다. 여러 나라들과 공생해야 합니다.” 출품한 물건들은 그게 그거였다.
궈충다오는 귀국 후 곤욕을 치렀다. “서양 귀신에게 홀린 놈”이라며 놀림감이 됐다. 고향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집을 흉가라며 때려 부수려 했다. 마젠중은 가는 곳마다 매국노라며 손가락질을 당했다. 날아온 돌멩이에 직통으로 맞아 뒤통수가 깨지기도 했다. 보수 세력들은 미국에 파견했던 관비 유학생들을 가차 없이 귀국시켜 버렸다.
이 와중에서도 백일몽을 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1908년 톈진에서 발행하던 한 잡지에 “중국은 언제나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을까!”라는 글이 실렸다. 1910년 소설가 루스어(陸士諤)는 잡지 ‘신중국’에 상하이 푸둥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릴 것을 예언했다. 워낙 말 같지 않은 소리들이다 보니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다. 대신 정신병자 취급은 받았다. <164>|프랑스서 두부사업 성공한 리스쩡(李石曾), 중국 혁명의 자금줄 |제165호| 2010년 5월 9일
▲1930년대 초 상하이에서 세계문화합작회의를 준비하던 리스쩡(왼쪽 첫째)과 장징장(오른쪽 셋째), 차이위안페이(가운데), 우즈후이(왼쪽 셋째).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국민당의 4대 원로(元老)라고 불렀다. 김명호 제공
1907년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리스쩡(李石曾)은 콩(豆)에 관한 연구서적을 프랑스어로 출간해 중국 두부를 서방세계에 최초로 소개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자 파리 교외에 두부공장을 세우고 몽파르나스에 중국음식점 중화반점(中華飯店)을 열었다. 신문에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두부의 진미를 선보이겠다”는 광고를 연일 내보냈다.
리스쩡은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역임한 제사(帝師) 이홍조(李鴻藻)의 막내아들이었다. 19세 때인 1900년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유린하고 황실 정원 원명원(圓明園)을 폐허로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년 리스쩡은 “서태후가 황제를 데리고 시안(西安)으로 내빼자 원숭이처럼 생긴 서양인들은 모든 화풀이를 선량한 중국 백성들에게 해댔다. 대로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중국인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평소에 온갖 잘난 척하며 거드름 피우던 고관이란 것들은 묘한 재주가 있었다. 어느 구석에 숨었는지 하루아침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며 유학을 결심했다. 무능한 정부와 집안 배경이나 믿고 나댈 때가 아니었다.
리스쩡은 양무파(洋務派)의 영수 이홍장(李鴻章)을 찾아갔다. 보수파의 우두머리급에 속했던 아버지와는 의논을 해봤자 신통한 해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이홍장은 사사건건 자신을 걸고넘어지던 사람의 막내아들에게 해외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일러줬다. 리스쩡은 부친의 정적과 머리를 맞대고 미래를 의논했던 현량사(賢良寺)의 밤을 평생 잊지 못했다.
리스쩡은 이홍장이 가르쳐 준 대로 했다. 난쉰(南尋) 거부의 아들 장징장(張靜江)과 짜고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다는 쑨바오치(孫寶琦)를 매수할 계획을 세웠다. 쑨은 구워 삶기가 쉬웠다. 이홍장의 말대로 생긴 거 하나는 멀쩡했지만 천성이 너절하고 돈을 좋아했다. 젊디 젊은 리와 장을 대견한 듯이 바라봤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프랑스에 도착하면 공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공사관에 출근할 필요도 없다. 하고 싶은 걸 맘대로 해라”며 싱글벙글했다. 무슨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1년 후 두 사람은 쑨의 수행원 자격으로 중국을 떠났다. 외교사절이 아니면 출국이 불가능할 때였다.
서구인들은 아침마다 우유를 마셨다. 리스쩡은 고향에서 마시던 두유가 그리웠다. 치즈 덩어리를 볼 때마다 두부가 생각났다. 생긴 것들은 비슷했지만 어릴 때부터 소식(素食)을 해온 리는 우유와 치즈가 영 비위에 맞지 않았다. 외국어에 능했던 동향(同鄕) 후배 치루산(齊如山)에게 “우리 고향 농민들을 모집해 프랑스까지 인솔해라”는 편지를 보냈다. 중국 농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두부 기술자였다. 치는 두 차례에 걸쳐 허베이(河北)성 가오양(高陽)현 농민 40명을 이끌고 프랑스로 향했다. 리스쩡은 프랑스 여인 70여 명도 고용했다. 프랑스인들의 구미를 감안해 두부 코코아와 두부 커피를 출시했다. 두부로 만든 각종 간식과 캔으로 된 제품도 시장에 내놨다. 물건 대기가 바쁠 정도였다. 중화반점에는 두부요리를 먹으려는 프랑스인들로 항상 바글바글 했다.
리스쩡은 사업에 성공하자 본인도 잘 몰랐던 기질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친이 고관으로 있는 청(淸)왕조의 전복을 위해 쑨원에게 거액의 혁명자금을 지원하고 야학을 개설했다. 농민들은 모국어와 프랑스어를 비롯해 서구의 과학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어서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우즈후이(吳稚暉)와 함께 근공검학(勤工儉學)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부터 20년까지 10년간 17차에 걸쳐 2000여 명의 가난한 중국 청년들이 프랑스에 건너와 일하며 공부했다.
근공검학은 리스쩡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를 초래했다. 리펑의 부친 리시환, 저우언라이, 차이허썬(蔡和森), 덩샤오핑, 천이(陳毅), 리푸춘(李富春), 샹징위(向警予), 차이창(蔡暢), 녜룽전(聶榮臻) 등 당대의 전설적인 혁명가들을 배출했다. 그 모든 원인은 혁명과 전혀 상관 없는 두부였다.
두부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한고조 유방의 손자였던 유안이었다. 수천 년간 중국인들에게 가장 정감 어린 식품이다. 분쟁의 소지를 제공한 적이 없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165>장위안치(張元濟), 황제에게 개혁의식 불어넣은 ‘출판의 황제’ |제166호| 2010년 5월 16일
▲장위안치는 쑹칭링과 함께 중공의 통전 대상 1호였다. 신정권 선포 직전 상하이 시장 천이(오른쪽 끝)의 안내로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장위안치(앞줄 왼쪽 셋째)를 마오쩌둥이 텐탄(天壇)공원으로 안내했다. 이날 장은 마오에게 신정권 수립 이후에도 ‘상무인서관’ ‘중화서국’ ‘삼련서점’의 명칭이 존속될 수 있기를 청했다. 김명호 제공
장위안치(張元濟)는 25세 때 전시(殿試)에 합격했다. 6년간 경관(京官)으로 봉직하며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광서제(光緖帝)는 서구의 과학과 학술에 관심이 많았다. 툭하면 도서목록을 총리아문(總理衙門)에 건네며 구해오라고 했다. 베이징(北京)의 서점에는 황제가 원하는 책들이 드물었다. 조정(朝廷)의 대학자들에게 물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장위안치만은 예외였다. 황제가 찾는 책들을 거의 다 소장하고 있었다. 황제는 총리아문에서 구해온 책을 펼칠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결같이 같은 사람의 소장인(所藏印)이 찍혀 있었다. 장위안치라는 이름 석 자가 황제의 머리 한구석을 차지했다.
1898년 서태후(西太后)의 그늘에서 맥을 못 추던 황제는 개혁을 단행하겠다며 변법조서를 반포했다. 닷새 후 32세의 장위안치를 불렀다. 장은 신식 학교 설립과 각 분야의 인재 양성, 번역의 중요성을 진언했다. 젊은 황제는 간간이 한숨을 내쉬며 경청했다.
서태후는 청년 황제의 마지막 몸부림을 무산시켰다. 죽여야 할 사람은 죽이고, 쫓겨나야 할 사람은 내쫓았다. 동작 빠른 사람들은 해외로 도망갔다. 장위안치는 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갈 날을 기다렸다. 평소 장을 눈여겨 보았던 리훙장(李鴻章)이 돼지고기 한 접시를 들고 찾아왔다. “너는 영원히 관직에 등용될 수 없다. 상하이로 가라. 네가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남양공학(상하이 교통대학의 전신) 설립자 성쉬안화이(盛宣懷)에게 보내는 편지를 던지듯이 건네고 자리를 떴다.
감옥에서 풀려난 장위안치는 한동안 베이징 거리를 거지처럼 헤맸다. “큰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려 하지만 꿈에 취한 사람들은 깨어날 기미가 없다. 시신이나 다름없는 환자에게 온갖 약을 닥치는 대로 투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평생 서로를 믿고 지지하고 이해한 차이위안페이(蔡元培)도 “고향에 내려가 훈장질이나 하겠다”며 한림원(翰林院)을 걷어치웠다. 두 사람은 같은 날 전시에 합격한 동기생이었다. 이후 50여 년간 장은 정치와 담을 쌓았다. 신해혁명 이후 슝시링(熊希齡) 내각의 교육총장직을 거절하고 1949년 1월 대리총통 리쭝런이 제의한 국공평화회담 국민당 측 대표직도 거절했다.
상하이는 별천지였다. 신식 학교는 물론이고 온갖 학회와 신문, 잡지가 난무했다. 장위안치는 남양공학 부설 번역원 원장에 취임했다. 첫 번째 작업이 린수(林紓)가 번역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출간이었다. 이어서 총장에 취임했지만 오래하지 않았다.
1902년 장위안치는 4년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났다. “귀천을 가릴 필요가 없다. 지혜와 우둔함도 중요하지 않다. 노소를 불문하고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교육의 혜택을 받아야 잠자는 사자가 깨어난다. 책은 많아도 교과서가 없는 나라가 중국”이라며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 취직했다. 샤루이팡(夏瑞芳) 등 식자공 출신 인쇄기술자 4명이 5년 전에 설립한 출판사였다. 진사 출신인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식자공의 결합은 사람들을 의아케 하기에 충분했지만 두 사람은 1914년 샤가 암살당하는 날까지 12년간 한 번도 충돌이 없었다.
1936년 상무인서관은 이사회 의장 장위안치의 칠순 행사를 준비했다. 낌새를 챈 장은 기를 쓰고 반대했다. 본인이 싫다고 우겨대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차이위안페이, 후스(胡適), 마인추(馬寅初), 황옌페이(黃炎培) 등 당대 각 분야의 대가 21명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논문을 부탁했다. 단 한 사람도 거절하지 않았다. 모두 신사상으로 무장된 전통학자이며 신도덕을 실천하는 노신사의 장수를 기원하며 경전급에 속하는 논문들을 보내왔다. 한결같이 학자와 사업가의 장점을 갖춘 장위안치에게 경의를 표했다.
지난 100여 년간 중국은 정부나 개인 할 것 없이 부(富)와 강(强)만을 추구했다. 정말 부득이하고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장위안치는 달랐다. 출판을 통해 국민 교육을 충실하게 하고 중국 문명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책을 좋아하고, 찾아 헤매고, 소장하고, 편집하고, 출판했다. 장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중국 역사상 출판계의 제1인” “대변혁시기의 건설자” “중국의 지식인들을 오만하게 만든 장본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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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부가 혁명가들을 배출했다? 좀 과장된 분석인 것 같네.
암튼...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쓰다보면
덩달아 풍이 세어지자 보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