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민속문화제 제 168호인 충효당은 재령이씨 입향조인 이애가 조선 성종 때 건립한 가옥이다. 충효당이라 편액된 사랑채와 정침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는 사당이 마련돼 있다. 가옥 배치는 ‘ㅁ’자형 건물로 사랑채 건물 사이 뒤편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조선 중기 사대부 가옥의 배치와 생활상이 잘 반영된 가옥이다.
오봉 권책의 종가집인 오봉종택은 안채와 사랑채인 오봉헌, 별도의 종자인 벽산정으로 구성된 규모가 상당히 큰 저택이다. 이 저택은 입향조의 내력 등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집으로 한옥 현대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는 시대를 앞서 간다고 할 수 있다.
우계종택은 재령이씨 영해 입향조 이애의 손자 운악 이함의 둘째 아들 우계 이시형(李時亨)의 살림집이다. 그의 호를 따서 우계 종택라 불려지고 있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 307호로 지정됐다가 민속문화재 제184호로 승격 지정됐다.
용암종택은 경북도 민속자료 제61호로 영조 4년(1728년)에 지어졌다. 원래 대문간과 안채 사이 마당좌우로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아기 주먹 크기의 파란 열매가 달린 사과나무 숲 사이로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골기와집들이 솟을대문을 앞세운 채 산자락에 기대어 초여름의 나른함을 즐기고 있었다.
흰 수염의 위엄을 갖춘 도포 양반네가 “어험” 헛기침하며 느긋한 걸음을 옮겨 사랑마루로 오르는 모습. 전통 마을 인량리 동구를 들어설 때 얼핏 스쳐갔던 환영이었다.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는 수많은 인재가 배출된 양반 마을로 ‘작은 안동’이라 불리기도 했던 영남의 대표적인 유향 중의 하나다.
인량리는 조선시대 영해부와 서쪽으로 10리를 상거(相距)하여 자리 잡고 있었던 명당으로, ‘팔성종실’ 곧 여덟 성씨의 종가가 모여 사는 마을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렇지만 여덟 성씨를 구체적으로 꼽아보라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들 이야기 중 합집합(合集合)은 재령이씨, 안동권씨, 대흥백씨, 무안박씨, 영양남씨, 영천이씨, 평산신씨, 함양박씨, 야성정씨, 신안주씨 등 열 개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중에서 어느 둘을 뺀 여덟 성씨만을 들어 ‘팔성종실’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옛 문헌에 명기된 바 없으니 어느 쪽이 옳은지 판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만큼 이곳이 유력 성씨의 종가가 여럿 모여 살았던 위세 당당한 마을이었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해 두기로 하자.
어쨌든 아무리 역사가 오랜 마을이라고 해도 인량리처럼 여러 성씨의 종가ㆍ종택들이 같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사례는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대부분 마을이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성씨가 모여 사는 동성촌락(同姓村落)으로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량리가 여러 종가ㆍ종택이 공존하는 마을이라는 특색은 갖게 된 것은 이곳이 사람이 살아가기에 매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일반 조건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점차적으로 이 마을에 입거(入居)한 유력한 가문들이 큰 다툼 없이 한 마을에서 더불어 살아갈만한 풍부한 생산기반이 있었던 것이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 ‘팔성종실(八姓宗室)’이 모여 사는 마을
인량리의 양호한 입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전통 지리서인 ‘산경표’에 의하면, 북에서 동해안을 왼쪽에 끼고 힘차게 달려 내려온 백두대간은 태백산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소백산ㆍ지리산을 향하여 그 머리를 서남쪽으로 틀어 돌린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 하나가 달려온 방향 그대로 저 멀리 부산 다대포 바닷가의 몰운대를 향하여 남쪽으로 뻗어가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낙동정맥이다.
바로 이 낙동정맥을 담장으로 삼아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이 하나의 지역적 구분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이 지역을 해변의 협소한 땅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포항에서 울진방면 7번 국도를 따라오노라면 곳곳에 넓은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지는데, 흥해, 영해, 평해가 그곳이다. 인량리는 바로 그 중의 하나인 영해평야를 생산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풍부한 해산물을 제공하는 동해 역시 그리 멀지 않은 점도 함부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인량리는 복수의 유력한 가문들이 공존할 수 있을 정도의 탄탄한 기반을 갖춘 천혜의 땅이었고, 그것이 이 마을을 ‘팔성종실’이 모여사는 마을로 만든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인량리의 옛 이름은 잉량화(仍良火)였다고 한다. 지명 끝의 ‘화(火)’는 곧 ‘불’, ‘벌(伐)’과 통하니 이곳이 넓은 벌판을 끼고 있는 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일찍이 삼한시대에 이곳에 우시국(于尸國)이라는 소국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후대에 이르러 마을의 지세가 낙동정맥의 한 봉우리인 칠보산을 거쳐 등운산으로 이어져 온 산줄기가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형국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고 앞으로 송천이라는 하천이 흘러가는 길지이므로, ‘나래골’, ‘익동(翼洞)’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그것이 음전(音轉)하여 ‘나라골’, 국동(國洞)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인량리에 유력한 성씨들이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흔적들이 오늘날 20여 채의 고택으로 남아 있지만, 거기에는 인량리 마을을 구성했던 종가들의 세월에 따른 부침이 반영되어 있다.
10개 성씨 중에는 그 세가 약해져 고택을 남기지 못할 정도로 마을에서 흔적이 사라져 버린 경우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융성을 거듭했던 가문은 분파(分派)에 의해 대종가 외에 파종가(派宗家)가 종택으로 지칭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세월에 따른 인량리 마을의 변화상을 알려주는 자료로는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젠쇼에이스케(善生永助)가 지은 ‘조선의 취락(朝鮮の聚落)’이라는 책자를 들 수 있다.
이는 조선의 특색있는 촌락을 조사하여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해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책이지만, 20세기 초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던 촌락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유용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 책에는 인량리를 송천을 건너 마주하고 있는 원구리와 함께 ‘특색있는 동족부락’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1930년대 초반 조사 당시의 인량리에는 재령이씨 35호 180명, 안동권씨 25호 130명, 영천이씨 20호 108명, 대흥백씨 8호 46명, 영양남씨 30호 158명, 기타 성씨 44호 125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재령이씨 종가와 안동권씨 종가는 자산이 중류 정도이지만, 나머지 종가는 빈곤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앞에서 팔성종실로 거론된 성씨 중에는 이 당시 이미 인량리를 떠난 성씨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현존하는 고택으로 종가를 남기지 못한 성씨도 생겨나게 되었다.
◆ 인량리의 재탄생
인량리에 현존하는 고택 20여 채 가운데서 국가 혹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은 9채이다. 먼저 충효당은 재령이씨 영해파 종택으로서 입향조 이애 공의 손자인 운암 이악 선생이 완성한 것으로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68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의 양상이나 구조가 조선시대 사대부가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건축물도 건축물이지만 대문채를 마주하고 종택의 서쪽에 이 집을 지은 이함 선생이 심었다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퇴계성리학을 계승ㆍ발전시킨 갈암 이현일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우계종택은 이함의 차남 우계 이시형의 살림집으로 건립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다. 현재까지 약 400여년 동안 재령이씨 우계파 종가로 보존되고 있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갈암종택은 원래 청송군 광덕리에 있었던 것인데 임하댐 건설에 따른 수몰을 피하여 1992년에 인량리로 이건하였다. 바로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 이현일 선생의 종택으로, 경북 기념물 재84호로 지정되었다.
오봉종택은 안동권씨 영해파 입향조 권책 공의 종택으로 경북 문화재자료 538호이며, 삼벽당(영천이씨 농암 이현보의 아들 이중량의 종택), 용암종택(선산김씨 김익중의 종택), 만괴헌(야성정씨의 고택이었으나 평산신씨가 매입), 강파헌(안동권씨 권상임의 고택), 지족당(인동권씨 권만두의 고택) 등도 선후를 조금씩 달리하는 조선 후기 양반가의 주택으로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 6ㆍ25 때 소실된 영양남씨의 처인당, 소호종택(소호 박신지의 종택), 원모재(함양박씨 박종산의 종택) 등도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으나, 고색창연한 자태를 뽐내는 고택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종가마을 인량리에서는 위세 높은 ‘대감님’의 불호령 소리도, 기품있는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고 청아한 음성으로 책을 읽는 목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양반들이 생명처럼 중시했던 봉제사ㆍ접빈객의 법도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량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 종가 고택을 이용한 고택체험 마을로 변신을 꾀하면서 전통테마마을 체험 명소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영덕군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해도 국내 관광객뿐 아니라 약 21만여명의 외국인들이 인량리를 찾았다고 한다. 유서 깊은 전통 마을 인량리의 새로운 도약이 기대된다.
이문기
경북대 역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