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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줄이 타는 일본: 일본 공안위원장 “일본군 위안부 확실히 보상해야”/일본인 “한글은 지적 혁명… 인류 자산으로 보존해야” | | | 경제사회뉴스 |
3 | / | 2010.10.29 13:53 |
<김수경 기자 muse@asiatoday.co.kr>
{ⓒ '글로벌 석간 종합일간지' 아시아투데이}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41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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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한글 전도사’ 노마 히데키 씨… “한글은 지적 혁명… 인류 자산으로 보존해야”
“소리를 문자로 만든다는 발상 혁명 말곤 설명 안돼 민족주의 입장 떠나 보편적으로 알려야 한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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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뉴스네요...
아부하느라 이것들이 정신없군요..
히토야마가 복귀하느니 어쩌니해서 좀 걱정했는데..
위안부배상은 남쪽이 아니라 통일조선에 원하시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겠고,
우수한 한글을 배우면서 살겠다.. 즉, 앞으로는 잘 모시겠다 라는..
하지만!! 죄값은 받아야 하느니라.. ^^
에노크님 푸틴 총리 딸 결혼 분석글에 "일본을 강조한 것은 조만간...." 부분을 보구 일본측엔 특별 동향이 있나 하고 찾아 보았더니.... 이런 기사가 쏟아져 나오더군요. ^-^
정확한 분석력!!!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ㅡㅡ;; 뒷걸음 치다 쥐잡은 격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쪽바리 족속들은 반드시 결산 !!!!!!!!!
촛불시위때 청와대 뒷산에서 반성했다는 자의 그 이후의 행태을 보면 왜놈들의 습성을 알수가있지요..^^*
청와대 뒷산에 가보니 눈물자국은 없고 땅콩껍질만 잔뜩 깔려 있더라구요^^*
맞아요 쥐박이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니까요 일본인이니까 그렇게 잔인한 것이죠
정말 쥐박이 보면 일본인이 어떤지 알수 있죠
당연합니다..통쾌합니다..형님나라 덕분에..새시대를 살아가는군요..
물경 1경엔을 내놓고 다음에 철저한 죄과를 치루고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법을 갈켜주마!
강인한 힘의 근원은 이러한 환희들을 맛 볼 수 있는 "짱" 인 거네요. 또 감사!
아부는 나중에
아무리 그래도 결산은 해야함,, 피는 피로써~
죄값을 돈으로만? 어림없는 수작.....아....위대한 조선.........이렇게 선열들의 한이 풀리어 가다니요..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소리가 들리고, 하늘의 문자가 기록되고... 개천절의 의미, 새 시대의 흥이 살아납니다.
판세가 불리하다 싶으니 이제서야 이 지롤을 떠네요.
쪽바리들은 핵베낭을 어께에 매고 살아갑니다 공화국 허락없이 내려놓을수 없습니다 뒈질 맛이지요...해서 살길찿자고 알랑질 허는겁니당 . 껍데기 벗겨야지요 ,쪽바리추종세력까지..송두리체,,,
일본에겐 용서는 없습니다..역설적으로 세계의 대결을 기획하게 할 단초를 제공하여 승리를 목전에 두게 한 업적(?)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민족의 역량일 뿐....그들은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원죄로부터 수백년 아니 수천년동안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부떨어도 결산의 그날은 숨통을 죄여온다.
쪽바리들은 조선인의 노비로 3대까지 일을 시켜야 합니다,
일본인들도 영원히 원시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쁜짓 안하죠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그 쪽바리와 다를바 없습니다.확실한 반성과 정확한 보상, 그리고 그에 걸맞는 지위를 주면 됩니다.궁지에 몰리면 쥐도 공격 합니다. 대외적으로 대승적 차원에서
그들을 지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감정적인 태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최고 사령관님 께서 이렇게 오래 인내와 기다림을 모든 세계인들에게 주시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렇게 하심 아니겠으요?
그분의 마음을 우리가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다만 만인이 그의 사상과 정신을 받아들이고 깨끗하고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 아니까 하네요
뷰터님도 말씀하시는거 보면 성인공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잘 굴러 간다면 저도 좋겠읍니다
그러나 세상은 무조건 용서한다고 잘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할때 제대로 응징을 할때
사람들이 잘못 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요즘에 법이 너무 악한자에게 관용을 베풀고 용서를 하기 때문에 법을 우습게 알고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이것도 다 유대인들의 술책이죠
단군시대때도 남의 것을 훔치면 그 집종이 되고 살인을 하면 똑같이 사형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읍니다 단군시대때도 살인자와 똑같아서 법을 엄격히 한게 아니라 봅니다.
저는 일본인과 유대인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을 두렵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응징해야 한다 봅니다.
일본인들도 우리 민족에게 해온 역사를 보면 유대인 못지 않게 악랄한 놈입니다
우리가 반공교육때 받은 빨갱이 같이 악랄한 자가 유대인과 일본놈들이죠
또 일부라 변명할지 모르나 지난 역사를 보면 알수 있읍니다.
일본인과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지은 죄를 물어서 영원히 원시인으로 살게 해도 과하지 않다 봅니다
악한자들은 글도 못쓰고 읽지 못하게 하는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서나 이롭다 봅니다
왜냐하면 악한자들이 갖는 능력은 어린아이가 칼을 들고 있는 것과 같아서 남도 해치고 남도 해치니까요 그런면에서 유대인들과 일본인들에게는 글도 읽지 쓰지 못하게 하는 원시인으로 살게 하는 것이 더이상 나쁜짓을 방지하고 인류평화를 위해 좋은 일이라 봅니다
일본인과 유대인들은 능력만 있으면 남을 침략할 기회만 노리는 자들입니다
이런자들의 능력을 빼앗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세계를 위해서나 좋은 일이라 봅니다
그런면에서 일본인과 유대인들은 원시인으로 살게 하는것이 본인이나 세계를 위해 좋은 일이지
우리가 너무 과한게 아니라 봅니다
반성을 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거 아닙니다 반성을 하고 뉘우치더라도 죄으 댓가는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다만 앞으로 뉘우침으로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더이상 벌을 받지 않고 착한일을 한다면 하늘이 복을 주겠죠
일본인들과 유대인들이 저지른 죄를 보면 그들의 씨를 말려도 지나친게 아니라 봅니다
다만 인간적으로 차마 그럴수 없으니 원시인으로 살게 하자는 것이죠
원시인으로 산다고 불행하고 물질문명에 산다고 행복한거 아닙니다.
그러니 원시인으로 살게 한다고 과한 벌은 아니라 봅니다.
그들이 앞으로 영원히 인류에 끼치는 악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영원히 원시인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아니면 아예 씨를 말리던지 그것이 진정으로 인류를 위한 길입니다.
한글창제(1446년반포)후, 경술치욕(1910년)전까지
한글을 자그마치 460여년간 사용하여 왔다면,
3~6개월이면 쉽게 터득되어지는 한글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미테이션 해방(?)후에도 20여년이 지나도록 문맹률이 높았던 것일까?
오렌지로 발음하면 양키족속은 알아듣지를 못한다고 세 치 혓바닥을 놀린,
"모모(某某)"라는 숙대교수로서 양키증후군에 걸려 "어뤤쥐"전도사로 겸업을 해오다가
현재 전국의 시.도가 운영하거나 민간에 위탁하여 운영되는 도서관에서
다문화체험/다문화강좌/다문화교사 등등의 프로그램을 가동시키며
전 국민의 잡탕문화화 전 국민의 잡종화의 기초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작태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이런 매국노 친미종자들의 문화분탕질 행위와 혈통혼탁화 기도의 전초라고 판단되고 있다.
물론 순수하게 문화접촉과 문화교류를 통해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상호국가에 대한 문화를 널리 이해하고 우호적인 차원에서 발전시키는 행위들은
딱히 비난할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허나 이를 빙자하여 생활보호대상에 처한 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전폭적인 문화지원은 고사하고 점심끼니를 거르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급.배식 지원도 삭감을 하고 있는 마당에,
심지어는 소위 무늬만 중산층에서 소득감소와 비정규직의 급증세로 인한
불완전한 고용을 당하여 차상위계층으로 전락하고 있는
사회각층에서 노출되고 있는 소득격차 및 조세.분배정책의 불균형체계로
그늘진 곳에서의 삶을 버겁게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저소득층에 대한 문화적 예산지원과 배려정책은
갈수록 의도적으로 방치되어 남의 나라 일처럼 요원하게 느껴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다문화 망국정책 및 은밀하게 추진되는 혼혈화정책에 투여되는 예산의 집행 금액도
전국적으로 통계를 내어보면 기실 몇 천억대에 이를 것으로 사료된다.
요즘 tv 매체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나 각종 광고방송 등을 보노라면 거의 상품광고 및 공익광고에서 조차
10 개 중에 6~7건은 외국인이 등장한다. tv채널도 10개 중에 6~7개가
외화내지는 다문화 망국정책에 편승한 동남아국가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방영물로 도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문화교류를 벗어나 문화침탈 현상으로 규정된다.
동식물과 파충류 곤충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 영토에 이름도 모르는 외래변종들이 수입되어
토종들을 초토화시키는 현상과 다문화 짬뽕 혼혈화 정책과는 그 색깔과 냄새가 일맥 상통한다고 본다.
게다가 우리 고유의 말과 글을 제쳐놓고 중고등 교육과정의 과목들을 하나 둘 씩 슬그머니
양키 개족속놈들을 동원한 원어민의 마스크를 쓰고 등장하는 문화파괴자들이 전달하는 서양개족속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거나 이에 동조 내지는 더 나아가 흠모까지 하는 된장족속들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그냥 아이들답게 키우는 방식을 초월하여 아예 스파르타식으로 오로지 대학입시와 영어지상주의를 목표로 방과 후의 아이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동네아이들과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게하여 살갑게 사람답게 인간답게 삶을 공유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소중한 인적.무형적 재산이 될 수 있는 문화적, 예능적, 체험적인 상호교류를 통한 인성과 인격형성에 아주 중요한 과정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풋풋한 인간다움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교육의 최종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고력을 누구보다도 부모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통일의 그날 , 정신없던 동포들이 제정신을 찿고 제 자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문화침탈로 진행되어 그 가속도가 붙으면 문화적 침략과 문화적 정복으로 연결되어지는 현상이 세계사와 문화인류학의 흐름에서 그러한 현상이 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을 우리는 제국주의국가들의 침탈과 식민지화와 정복전쟁을 통해 확연하게 검증하여 왔다. 쪽바리들의 강제통치 36년을 초월한 문화말살적 침탈과 왜곡이 100여년 넘게 진행되어 왔음을 뚜렷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흘러온 역사속의 살아있는 증인들인 것이다. 저 맨 위의 명제로 다시 돌아가 보건대, 백과사전을 훑어보면 사전적의미는 한글 창제 후 사이비광복을 맞이하기까지 무려 500년이 흐르고, 그 후로도 이승만 매국노정권과 박정희 군사정권 출범후 30년이 흐른 1970년대 초반까지도 문맹률이 40%가 넘었다는 사실은
기실 아프리카인과 동남아시아 국가群 및 몽골사람들에게 시범적으로나 국제적 교류를 통한 정책적인 한글 보급화작업의 시범적 운영결과의 호응도와 숙지도를 놓고 볼 때에, 지구사적 불가사의에 해당할 것이다. 아래에 사전적 의미를 옮겨보면,
1443년(세종 25년) 완성되어 1446년 음력 9월 상순(양력 10월 상순)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말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다. 한때 언문(諺文)·언서(諺書)·반절(反切)·암클 등으로 낯춰 불리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는 '한글'이라고 한다. 문자체계의 특징은 한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는 음소문자(音素文字)이면서 음절단위로 적는 음절문자의 성격을 함께 지닌 점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체계는 초성 17자, 중성 11자로 모두 28자였으나, 그중 초성의 ',,ㅿ'과 중성의 ''가 폐기되어, 오늘날에는 24자만 쓰인다. 그밖에 28자를 이용한 병서(竝書)·연서(連書) 문자가 쓰였으며, 성조를 표시하는 방점이 쓰였다.
■ 창제 목적 및 과정
〈훈민정음〉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나랏말ㅆ.미 中國[중앙조정국의 약칭]에 달아 文字와로 서르 디 아니 이런 젼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몯 노미 하니라 내 이 爲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를 노니 사마다 수 니겨 날로 메 便安킈 고져 미니라"라는 서문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함께 새 글자 창제의 바탕을 이룬 정신이 나타나 있다. 즉 첫째 우리가 중국 글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적고 있으나 이는 중국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이므로 우리말을 적는 데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우리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새 글자를 만든다고 한 점에 민족자주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둘째, '어린(어리석은) 백성'이란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민본정신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중국' 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없었습니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줄여 쓴말인데, 나랏말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것과 달라서 한글을 만들었다는게 말이 안되죠.
저기서 중국은 가운데 나라, 중앙의 조선을 말하고, 나랏말(지방, 즉 연방국들의 문자가 제각각)이 중앙정부와 달라서 문자를 통일 시킨 것이라고 봅니다. 불편하고 어려운 한자대신 쉽고 간편한 한글로요.
레프트님의 예리한 역사의식에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사마천의 역사적 사기.기망적작품인 중국의 25사 전체에 걸쳐서 흐르는 맥락은 바로 고조선과 발해, 대륙고구려. 대륙백제. 대륙신라.대륙고려.대륙조선사를 꿰어 맞춘 모조품이며 위작임을 중국의 양식있는 역사학자들도 인지하고 있고 대외적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겸허한 입장을 취하는 학계의 저명인사들도 중국내에 많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연 1400년대 당시에 중국이라는 명칭이 존재나 했을까요?
아마 이미테이션 역사를 배워 온 싯점으로 돌아가보면 그 당시에는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원(元)? 명(明)? 이라는 중앙조정정부[朝廷]의 명칭을 상징하는 연호(?)에 불과합니다.
마치 오늘날의 군사정권시대 / 참여정부시대 / 박정희 친일파 군사정권시대 /
이승만 숭미매국노 정권시대/ 전대갈통 철권통치시대/ 노태우 허수아비정권시대 운운하듯이~!
온 나라백성들이 사용하는 말이 각 지방마다 표현어의가 다르고 억양과 표현하는 글자[ 지방마다 수 많은 약어가 존재함]가 다르며 심지어는 그 뜻도 천차만별로 표시되고 있어[물건?=東西?] 이를 공통적으로 표현되고 사용될 수 있는 표준어를 제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어의에서도 적확[的確]하고 명확하게 그 창제의 목적이 드러나 있드시 [나랏 말 ㅆ . 미 즁귁에 (과) 달라~~~ 이를 어여삐 여기사~~ 이런 전차로~~]등의 愛民정신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창제과정은 조선시대의 일종의 연구소인 집현전의 학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학자들은 당시 지속적으로 세종의 사업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당시의 유일한 언어학이었던 중국 운학(韻學)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중국 운학은 일종의 음성학과 음운론의 연구로서 그 주된 목적은 운서편찬에 있었다. 따라서 중국 운학에 관심이 깊었던 학문적 경향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북돋우었고, 그것이 국어의 표기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이어진 결과 훈민정음 창제의 기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는 세종이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의문나는 점을 물었고, 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랴오둥[遼東]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찾아가서 음운에 관하여 물어보게 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 세종은 3년간의 보충연구 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지어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는 한편,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하게 했다.
■ 원본
세종은 훈민정음을 소개하는 책 이름을 글자 이름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 하여 판각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1940년 7월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이한걸(李漢杰)의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을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한문본, 〈훈민정음〉원본이라고 한다. 목판본 1책 33장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 : 네 테두리가 2줄로 됨)에 유계(有界 : 책의 행간에 경계선이 있음)이고, 소흑구(小黑口 : 책의 중간인 판심의 위아래에 가느다란 검은 줄이 있음)로 되어 있다. 발견 당시 책의 처음 2장이 빠진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 적어 넣을 때 실수하여 '세종어제서문'의 끝자인 '耳'자가 '矣'자로 바뀐 듯하다(〈세종실록〉에는 '耳'자로 기록됨). 이밖에 주해본 〈훈민정음〉으로는 희방사본(喜方寺本)·박씨본과 일본의 궁내성본(宮內省本)·가나자와본[金澤本] 등이 있다.
내용
〈훈민정음〉은 예의편(例義篇)·해례편·정인지서문(鄭麟趾序文)의 3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편은 훈민정음의 창제 취지와 새 글자의 음가(音價) 및 운용법에 관한 내용으로, 크게 7가지로 볼 수 있다.
① 훈민정음 창제 취지를 밝힌 세종의 서문,
② 초성 17자(ㄱㅋ, ㄷㅌㄴ, ㅂㅍㅁ, ㅈㅊㅅ, ㅇㅎ, ㄹㅿ 등)에 대한 설명,
③ 중성 11자( 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 등)에 관한 설명,
④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는 규정,
⑤ 순경음(脣輕音)과 병서에 관한 규정,
⑥ 초성과 중성의 결합관계,
⑦ 평성·거성·상성·입성의 성조 표기에 관한 규정이 그것이다.
해례편은 새 글자의 제자원리와 그 음가 및 운용법, 문자가 표시하는 음운체계 등에 관한 내용으로,
제자해·초성해·중성해·종성해·합자해·용자례 등으로 나누어 기술되어 있다.
첫째, 우주의 모든 현상을 태극·음양·오행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사상을 받아들여
사람의 성음(聲音)에도 음양의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둘째, 훈민정음 28자의 자형은 상형(象形)에 의해 제정했다.
즉 아음(牙音)의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설음(舌音)의 'ㄴ'은 혀가 입천장에 붙는 모양을,
순음(脣音)의 'ㅁ'은 입의 모양을,
치음(齒音)의 'ㅅ'은 이의 모양을,
후음(喉音)의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각각 본떠 만들었으며,
'ㄱㅋ', 'ㄴ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ㅎ'과 같이 획을 더하여 소리가 거세짐을 나타냈다.
셋째, 사람의 소리가 오행·계절·음계에 맞는다고 보았다.
넷째, 성음의 청탁(淸濁)을 중국의 운서에 따라 분류했다.
다섯째, 순경음의 자형구조와 발성에 대해 순경음이 양순마찰음(兩脣摩擦音)임을 설명했다.
여섯째, 중성 중 'ㅡ ㅣ'에 대해서
천(天 : )·지(地 : ㅡ)·인(人 : ㅣ) 의 삼재론(三才論)을 내세워 설명하고,
나머지 8중성은 위의 세 글자의 교합(交合)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혔으며,
이를 합(闔)과 벽(闢), 양(陽)과 음(陰)으로 설명했다.
일곱째, 중성 'ㅡ ㅣ'의 세 소리를 삼재 또는 삼극(三極)으로 보아,
''는 'ㅡ ㅣ' 세 소리의 으뜸[冠]이고, 'ㅡ ㅣ'는 8성의 머리[首]가 된다고 했다.
여덟째, 〈주역 周易〉의 계사(繫辭)에 나오는 "천일(天一)·지이(地二)·천삼(天三)·지사(地四)………"의
천수(天數)·지수(地數)를 중성에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① ''는 처음 하늘에서 나니 '천일생수'(天一生水)의 위(位)요,
② ''는 다음이니 '천삼생목'(天三生木)의 위요,
③ ''는 처음 땅에서 나니 '지이생화'(地二生火)의 위요,
④ ''는 다음이니 '지사생금'(地四生金)의 위요,
⑤ ''가 2번째 하늘에서 나니 '천칠성화'(天七成火)의 수(數)요,
⑥ ''가 다음이니 '천구성금'(天九成金)의 수요,
⑦ ''가 2번째 땅에서 나니 '지육성수'(地六成水)의 수요,
⑧ ''는 다음이니 '지팔성목'(地八成木)의 수라 했다.
또한 ''는 '천오생토'(天五生土)의 위요, 'ㅡ'는 '지십성토'(地十成土)의 수인데,
'ㅣ'만이 위수(位數)가 없다고 했다.
⑨ 초성이 종성으로 다시 쓰이는 것을 성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해,
만물이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감에 비유했다.
■ 초성해
초성은 운서의 자모이며, 이로부터 성음(聲音)이 생겨난다고 정의하고, 각
자모를 〈동국정운〉의 23자모 체계에 일치시켜 설명했다.
예를 들면 "아음인 '君'자의 초성은 'ㄱ'이고, 그 'ㄱ'이 ''과 합쳐 '군'이 된다"라는 식이다.
■ 중성해
중성은 자운(子韻)의 한가운데서 초성·종성과 합해 음절을 이룬다고 정의하고 합용의 예를 들었다.
첫째, ''(呑)자의 중성은 ''인데 ''가 'ㅌ'과 'ㄴ' 사이에서 ''이 되고,
'즉'(卽)자의 중성은 'ㅡ'인데 'ㅡ'는 'ㅈ'과 'ㄱ' 사이에서 '즉'이 되며,
'침'(侵)자의 중성은 'ㅣ'인데 'ㅣ'가 'ㅊ'과 'ㅁ' 사이에서 '침'이 된다.
둘째, 두 자의 합용에는 ''와 ''가 모두 ''에서 나왔으므로 합하여 ''가 되고,
''와 ''가 모두 'ㅣ'에서 나왔으므로 ''가 되며,
''와 ''가 모두 'ㅡ'에서 나왔으므로 합하여 ''가 되고,
''와 ''가 모두 'ㅣ'에서 나왔으므로 합하여 ''가 되는 것이니, 서로 합해서 어그러짐이 없다.
셋째. 'ㅣ'자의 쓰임이 가장 많은데, 한 자의 중성으로 'ㅣ'와 서로 합하는 것은
' ㅢ '의 10자이며, 두 자의 중성으로 'ㅣ'와 합하는 것은 ' '의 4자이다.
■종성해
종성은 초성과 중성을 이어받아 음절을 이룬다고 정의했는데,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리의 완급이 있으므로 평성·상성·거성 3성의 종성은 입성의 촉급(促急)과 같지 않고,
불청불탁의 자( ㄴ ㅁ ㅇ ㄹ ㅿ)는 소리가 세지 않아서 종성으로 쓰면
평성·상성·거성에 맞으며, 전청·차청·전탁은 소리가 거세어 종성으로 쓰면 입성이 된다.
따라서 ' ㄴ ㅁ ㅇ ㄹ ㅿ'의 6자는 평성·상성·거성 3성의 종성이 되고, 나머지는 입성의 종성이 된다.
둘째, 'ㄱ ㄷ ㄴ ㅂ ㅁ ㅅ ㄹ' 8자로 종성을 쓸 수 있다.
즉 'ㅅ ㅈ ㅿ ㅊ'은 'ㅅ'으로, 'ㄷ ㅌ'은 'ㄷ'으로, 'ㅂ ㅍ'은 'ㅂ'으로 통용될 수 있다.
셋째, 'ㅇ'은 소리가 맑고 비어서 반드시 종성으로 쓰지 않더라도 중성이 음을 이룰 수 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에서는 중성으로 끝난 한자음에 'ㅇ'종성을 표기했음).
넷째, 반혓소리 'ㄹ'은 우리말 종성에만 쓰일 뿐 한자에는 쓸 수 없다.
■ 합자해
초성·중성·종성의 자모가 실제 사용될 때 합자를 이루는 규정으로서,
25개 어휘의 표기상의 실례를 들어서 그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① 초성은 중성의 위 또는 왼쪽에 쓴다.
예를 들면 '군'(君)자의 'ㄱ'은 'ㅜ'위에 있고, '업'(業)자의 'ㅇ'은 'ㅓ'의 왼쪽에 있다.
② 중성은 초성의 밑이나 오른쪽에 쓴다.
둥근 것()과 가로 된 것(ㅡ )은 초성글자의 밑에 쓴다.
예를 들면 '즉'(卽)자의 'ㅡ'는 'ㅈ'의 밑에 있다.
세로된 것은(ㅣ)는 초성글자의 오른쪽에 쓴다.
예를 들면 '침'(侵)자의 'ㅣ'는 'ㅊ'의 오른쪽에 있다.
③ 종성은 초성·중성의 밑에 쓴다. 예를 들면 '군'(君)자의 'ㄴ'은 '구'자의 밑에 있다.
④ 병서에는 합용병서·각자병서가 있다.
합용병서의 예로는 '따'[地]의 'ㄸ', '짝'[隻]의 'ㅉ' 등이 있다.
각자병서의 예로는 '혀'는 '혀'[舌]의 뜻이나, ''는 '인'[引]의 뜻이 되며,
'괴여'는 내가 남을 사랑한다는 뜻인데,
'괴'는 내가 사랑받는다는 뜻이 되는 경우 등이다.
중성 합용의 예로는 '과'[琴株]의 '', '홰'[炬]의 '' 등이 있다.
종성 합용의 예로는 '흙'[土]의 ㄺ, '낤'[釣]의 ㄳ 등이 있다.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쓸 때, 한글로 한자의 중성·종성을 보충할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孔子ㅣ 魯ㅅ사람'에서 'ㅣ'와 'ㅅ' 등이다.
⑥평성은 점이 없고, 상성은 점 2개로 표시하고, 거성은 점 1개로 표시하며,
입성은 'ㄷ ㅂ'받침의 음절인데, 방점을 더하는 것은 평성·상성·거성의 경우와 같다.
⑦ 초성의 ''과 'ㅇ'은 서로 비슷해서 국어에서 통용될 수 있다.
⑧ 반설음(半舌音) 'ㄹ'에 경중(輕重)이 있다. 국어에서는 구별해서 쓰지 않지만,
갖추어서 쓰고자 할 때는 순경음의 예를 따른다.
즉 'ㄹ'을 'ㅇ' 밑에 써서 반설경음(半舌輕音 : )을 만든다.
⑨ 이중모음 ''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 용자례
초성·중성·종성의 자모 하나하나에 대해 어휘의 표기상의 실례를 들어서
그 사용법을 보여준 내용이다. 예를 들면
① 초성의 감 [杮 : ㄱ의 예]·콩[大頭 : ㅋ의 예]·담[墻 : ㄷ의 예]·벌[蜂 : ㅂ의 예], 뫼[山 : ㅁ의 예] 등,
② 중성의 리[橋 : 의 예]·믈[水 : ㅡ의 예]·밀[蠟 : ㅣ의 예]·논[水田 : ㅗ의 예] 등,
③ 종성의 닥[楮 : ㄱ의 예]·갇[笠 : ㄷ의 예]·
범[虎 : ㅁ의 예]·잣[海松 : ㅅ의 예]·별[星 : ㄹ의 예] 등 94개의 어휘가 수록되어 있다.
한반도 대한민국의 언어에 대하여 [ 대륙조선사연구회 최두환 박사님의 글 중에서 ]
이제 조선사를 포함하여 세계사의 정체가 하나씩 벗겨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다. 력사의 정체성을 말할 때는
이제 한건 터뜨린다는 수준을 극복하고서
출처/근거를 명확히 밝히면서 력사의 진실에 다가가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지금 한반도와 그 주변의 지역을 엮은
하나의 생활문화권이 나라였을 것이라고 가설을 세운 바가 있다.
그것을 나는 "다파나(多婆那)"라고 하였다.
이 말의 뜻을 찾아보면, "多婆"가 일본의 <地名語源辭典>
(山中襄太 著, 校倉書房, 1968), p..224에는 "峙, 頂上"이라고 하였다.
즉 "고개, 마루, 꼭대기, 봉우리"란 말이다.
"那"는 "羅, 良, 壤"과 같은 말로서 "땅, 나라"란 뜻이다.
그러므로, 산마루, 즉 "산이 많은 땅, 나라"란 뜻이다.
영어의 "top"+"land"와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동경 120도에 있는 대흥안령이 높은 산맥이고,
동경 130도 선상에 있는 장백산맥(백두산맥)이 높은 산맥이며,
그 남쪽으로 이어진 척추같은 산맥이 또한 높기도 하다.
벌판/평야가 거의 없는 지역이니 그렇게 붙일만도 할 것이다.
이 한반도를 중심한 주변지역은 중국대륙의 중심부와는
공통의 문화를 가지기도 했지만,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생활을 한 것은 유물로써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세력의 영향력의 문제이다.
그런데 과연 동일한 국가였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을 불투명하다.
그러나 조선사(중국대륙의 조선사)를 볼 때에 아직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언어문제를 보면 동일한 언어였느냐?
아니면, 전혀 다른 언어였느냐? 에 따라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매우 민감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일단 중국대륙 내에서는 단일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식의 입성발음이 귀족층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청나라 대에 만든
<강희자전>의 발음이 바로 <훈민정음>발음법과 같으며,
그 발음기호가 <룡비어천가>에 나오는 반절(反切)"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훈민정음>은 한반도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그 중심지인 섬서성 장안인 한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대륙에는 어디에 가든 훈민정음,
즉 한글식 발음은 거의 없다. 글자도 거의 없다.
아주 극소수만이 사용한다. 그것도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이것은 오직 중국대륙에서 중국사람들 자신의 생존활동을 위해서
문화혁명을 했을 때에 완전 고사시킨 문화였던 것이 훈민정음식 한글발음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사용하고 있는
훈민정음식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든 발음인가?
아니다. 매우 비슷할 뿐이다.
그렇다면 언제 훈민정음식 발음이 한반도에 정착했겠는가?
명확하게는 밝히기 어렵지만,
말 자체는 옛날부터 대부분 훈민정음식,
즉 지금의 우리 발음식으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1910년이 되면서 한일합방이 되어
일본어를 사용하게 되어 한글은 거의 금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또 변화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일본의 문화정책의 전개이다.
그것은 1919년 3.1운동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중국대륙에서의 무단정책이
한반도에까지 영향이 미쳐 그것을 문화정책으로 변형시켰었다.
그 문화정책은 한반도로서는 "애국계몽기"에 해당되며, 1920년에 각 신문사가 창간된다.
<조선일보>(1920년 3월 5일), <동아일보>(1920년 4월 1일)이 그것이다.
이런 언론매체가 주동이 되어 한반도에 "문자보급운동"이 벌어진다.
즉 1929년 여름에 한글로 된 <문자보급교재>가 간행되기도 했다.
그 문자보급이 바로 "한글"이며, "가갸그겨고교구규그기"하는 식이었다.
이 때부터 대대적으로, 적극적으로 문자가 보급되고, 문맹퇴치운동이 벌어진다.
이 글을 보급하게 된 연구가/활동가는 주시경/최현배 등등이었는데,
이들을 일본인들이 "병주고 약주기"식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일보>에서는 題號에 국호인 "朝鮮"을 사용하게 된 것까지도
매우 "실랑이가 있었으리란 점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조선일보, 2000년 2월 21일월요일, 19)고 했지만,
이런 말은 그 말대로 정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인으로써는 오히려 겉으로는 금지나, 통제를 했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매우 권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를 조선으로 이식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반도 사람들"을 얕잡아보거나, 욕을 할 때는 으레,
일부러라도 "조센징"/"엽전"이란 말을 반드시 사용하였던 것이다.
"병주고 약주기"식의 용어는 적어도 분명한 것은 "조선"이란 국명과 함께,
"태극기/조선어(한글)/독립"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가 조선이란 등식의 정체성을
각인/확립/고정시키는데는 반드시 필요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최현배 등에게 조선어 연구를 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면서 붙잡아다 구속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의 한글 사용은
1920년대 후반부터 체계가 잡히면서
"조선어맞춤법통일안"이 1932년에 마련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특이한 불필요한 규칙이 "두음법칙"이 들어간 것이다.
이 두음법칙은 다른 지방(중국대륙) 사람과는 달리
첫소리에 "ㄹ"소리를 잘 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보기를 들자면, 성씨 "李"를 중국대륙에서는 "리/니"라고 했는데,
한반도에서는 "이"라고밖에 내지 못했다.
"盧/魯"의 경우는 중국대륙에서는 "로/노"라고 했는데,
한반도에서는 "노"라고 밖에 하지 못했다.
"羅"의 경우는 중국대륙에서는 "라/나"라고 했는데,
한반도에서는 오직 "나"로밖에 소리내지 못하였다.
이것은 이런 성(姓)들이 한반도에서 발생되지 않았다는 말이며,
족보도 1920-1930년대에야 정리가 되었다는 말과 같이,
성(姓)들도 이 때에 완정 정리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두음법칙을 없애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더더욱 모순에 빠지게 된다.
"李"를 첫소리 "ㄹ"을 안 내도록 "이"로 계속 고집한다면,
영어의 "leadership"을 "리더십"이 아니라,
"이더십"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한반도 대한민국의 언어정책은 대대적인 변화를 가지고 와야 한다.
특히 중국대륙에서 버린 것이지만, <훈민정음>을 우리의 유산으로 받았으니,
그것을 현대의 국제적 생활문화에도 어울리게
"f/v/th" 등의 발음도 제대로 발음과 표기가
가능하도록 옛글자를 되살려 써야 할 것이다.
아마 지금 중국대륙[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훈민정음>을
대한민국에 넘겨줘버리고서 후회를 엄청나게 했을 것이며,
지금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되찾아갈 수도 없게된 력사적 산물이 되버렸고,
그것은 조선이란 이름을 차지하게 된
대한민국의 자랑거리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은 동북삼성을 고구려라고 하지만,
그것이 허구의 거짓임은 만천하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말만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고구려가 중국대륙 녕하성 중심으로
넓은 강역을 가진나라였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 동쪽의, 동경 120도 이동의 지역은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지역, 국가였다고 주장해야 하며,
그렇게 할 증거/문헌/유물을 수집하고, 체계화해야 할 것이다.
결코 한반도와 그 주변 사람들은 무지랭이가 아니었음을,
얼마되지 않는 유물이지만, 알 수/느낄 수 있다.
그런 력사를 정립하고 유지해야 한다.
오직 서구렬강과 일본과 그 앞잡이들에 의해 우리의 력사가 도난당했을 뿐이다.
"브나로드 운동"과 "한글강습"에 대하여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옛날부터,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적어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뒤로 줄곧 거의 한글을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은 언제나 남아있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초창기 기사를 읽어보면 더더욱 의심이 갈 것이다.
그래서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한글연구나 외솔 최현배 선생의
한글보급운동이 언제부터 였는지를 가늠하고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필요"는 "사용의 요구"을 뜻하며, "운동"은 "사용의 시작"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한글학회가 한글 강습 운동을 한 것이나, 신문사에서 한글보급 운동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활동한 그 시기가 한글을 사용한 시기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의 인테리겐차(지식인 계층)의 "브나로드(Vnarod)"(민중 속으로) 운동과 같은
이상을 품고 있은 사람들처럼 조선(=대한제국)에서도 그런 사람들과 운동을 많이 하고 있었다.
즉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나서,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였다.
브나로드 운동은 민중계몽운동인데, 그 정확한 설명을 보면,
"브나로드(Vnarod)"란 본디 러시아(Russia)어이며,
"지식계급이 노동자 농민 속에 뛰어들어 민중들과 같이 생활하며,
민중을 지도하던 민중운동"을 말한다.
(최승만 '삼대 민족지의 언론투쟁'<신동아>(통권제62호: 1969년 10월, pp.322-333)
이 브나로드 운동은 조선일보사가 1929년에 여름방학학생의
"문맹타파운동"이 크게 성공하였으며,
동아일보사가 1931년 1월부터 주최한 한글계몽 운동이다.
(한글학회, <한글학회 50년사>(한글학회, 1971)(pp.320-321)
[이 책에서는 "브나르드"라고 적혀있지만, "브나로드"가 옳다.]
<한글학회 50년사>에 기록된 브나로드 운동을 보면,
모두 4회 298일인데, 제1차 1931년 62일간(7.21-9.20),
제2차 1932년 82일간(7.11-9.30), 제3회 81일간(7.11-9.30),
제4회 1934년 73일간(7.2-9.12)이었으며,
제5차는 1935년 6월 7일에 열었으나, 전면 금지당했다.
이 브나로드 운동과 때를 같이 하여
조선어 강습회가 1931년 7월25일부터 4차에 걸쳐 있었다.
그러자, 조선일보사는 제1회 대학강좌를 1935년 6월 17일부터 6일간 전국에 실시하였다.
이 운동은 현재 한반도에서 전주, 진주, 군산, 통영 등지에 많은 곳에서 실시했다.
그리고 한글학회가 주최한 한글강습회는
1930년 7월 30일-8월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실시한 것을 비롯하여
1937년 1월 11-16일(4일간)까지 실시했다.
이렇게 한글을 보급하기 위하여 이런 기간에서 1927년 2월 10일에
월간 "한글"이 창간되었다가, 1928년 10월에 제9호로써 휴간되었고,
1930년 12월 13일에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었고,
1931년 10월 28일을 가갸날을 정했으며,
1932년 12월 26일부터는 한글맞춤법통일안 독회를 가졌었다.
이런 일련의 한글에 관한 집중적인 강습회는 브나로드 운동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운동은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된 뒤에 전개된 점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한글보급운동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한글세대에서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보다 100년 전에 과연 우리들의 조상은
얼마만큼 한글을 알고 우리와 같은 말을 사용하였을까?
글을 몰라도 의사소통은 되며, 글을 몰라도 서로 말하고 살아가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나의 고향가족의 어두운 면을 꼬집는다면,
1910년-192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나의 백부 혼자
당시 소학교를 나와 면의원을 한 것이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나머지 나의 아저씨들은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아직도 한글 모르고 살아가는 아주머니[이젠 할머니]들도 있다. 우리 동네 전체가 거의 그랬다.
한글! 그리고 훈민정음! 그 출생과 사용처는 너무도 딴판임을 알 수 있다.
각 방송국에서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된 중앙아시아의 각 공화국에 분산되어 살고 있는
우리 민족 "고려인"에 대한 심층 밀착취재 르뽀 내지는 다큐먼터리형태로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과의 인터뷰장면을 보노라면,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왕조가 창건 518년이 흐르고, 또 다시
만주국과 다를 바가 없는 데깔꼬마니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까지의 100년을 합쳐 기실 600년이
경과된 작금에 이르기까지조차도 아직도 우리들의 동포들은 왜? "고려인"이라고 외치고 있는가? 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부호를 우리들의 머리속에 각인하여
되새김질과 고뇌어린 사유(思惟)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그러한 인간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배부른 돼지群"으로 명명되어짐이 마땅할 것이다......
대륙고려와 대륙조선이 동시에 해체되면서
그 분들의 삶은 고통과 한의 몸부림이었을 것이 자명하다.
과연 그 분들이 심장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피맺힌 망국의 한을 담고
인간이기를 포기하고픈 형극의 여정속에서 외치는 "고려인"이라는 세 글자에 우리 모두의 가슴에
?.......! 물음표와 마침표의 역사적 과업을 파헤치려는
노력없이는 잃어버린 100년을 되돌릴 수 없을 뿐더러
고려와 대조선의 그림자로 각색된 이미테이션 대한제국에 이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작업을 우리 민족의 공동운명체적 역사적 과업으로
각인하는 민족구성원 모두의 역사적 명제인 "잃어버린 역사찾기" 운동을 부흥시키지 않는다면,
마치 가두리 양식장의 어패류와 다름없는, 결단코 원치않았던 삶과 역사를
우리들 스스로가 회복시키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영원한 역사의 죄인으로 읽혀지고 각인될 것이며
역사공부에 매진하기를 강력하게 권하는 바이다.
지금도 우리들의 귓속에 맴도는 "고려인"이라는 세 글자에 대한 규명작업과
그들이 결코 타임머신을 타고 600년의 시공을 초월한 초월자들이 아닐 것이며,
[고려] 와 [조 선] 그리고, [고려인]의 삼각함수비와 왜곡.날조.강간.윤간당한 역사의 원 색깔을
되찾고 풀어내어 복원하는 민족적 숙명적 과업이 피할 수 없는 우리들의 지상과제일 것이다.
심청사달님//
많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좀...아...머리가 아파옵니다...ㅜㅜ
그럼 그전까지 한자를 썼다는 말인데....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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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바로 알고 고쳐 나가야 겠습니다..두음법칙 등.앞으로 형님나라를 따르고 다시 원형을 복원하여 자식에게는 제대로 남겨주어야 겟습니다..요즘 너무 많은것을 배웁니다.특히 예전에 배웠던 훈민정음 서문의 듕귁이 오늘날 중국이 아님을 깨달으니..우리가 너무 많은것을 버리는 교육을 받았구나 싶습니다..
심청사달님. 이거 제가 연재했던 글인데... 사이트가 돈이 없다보니 정지당해서.... 일부 수정하고 추가해서 원고를 탈고했는데... 출판사 알아보기가 어렵네요... 여기서 만나뵙게 되니... 역시 뜻이 있으면 만나나 봅니다.
정말 너무너무 반갑습니다. ^&^
필명 백제사님이시죠?
자비를 들여서 온갖 발품과 열정을 바쳐 일본중심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고려사라는 절들을 찾아내어 조선과 일본의 역사적 설정관계에서 고려보다는 조선과의
역사적 사건과 반드시 응보되고 청산되어져야 할 조선과 일본의 대립구도의 연장선상에서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아도 당연히 일본내에 고려사[高麗寺]보다는 조선사[朝鮮寺]의
도량처가 많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5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지금의 열도 일본내에서 고려사라는 절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역사적 관점으로 접근하여 조선과 고려 그리고 조선과 일본, 청(淸)과의 역사적 상관점을
추출해내어 실타래처럼 얽힌 탈시공의 역사현상에 대해 예리한 관찰력과 역사적인 후각을
발현해내시어 규명하고자 하셨던 필명 백제사[百濟寺]님을
이곳 사방사의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니!!! 정말 십년 친구를 만난듯 기쁩니다.
하루속히 만나고 싶군요!
저는 백제사님께서 시대소리에서 고정적으로 역사칼럼을 쓰시다가
이명박 정권이 압력을 동원하여 역사와 경제분야를 주로 다루어 백성들을 계몽코자한
시대소리를 폐쇄시킨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결국은 경제적인 문제가 주 요인이었군요?
정말 너무너무 안타깝습니다.
한미FTA를 비롯하여 한국의 금융시장과 증권시장 등등 전반에
걸쳐서 교란시켜 결국 IMF 구제금융을 받게한 후, 각종 환율조작과 금리선물시장등을
교란을 넘어선 붕괴를 유도하여 백성들이 피땀흘려 일구어놓은 자산과 재산들을
쪽바리자본을 미끼밥으로 던져놓고 단기채무의 고도화 및 과부하작업을 수면밑으로 진행시켜
일순간에 채무이행시기를 작위적, 고의적, 의도적으로 몰리게끔하여 국부수탈, 강탈에 이은
산업구조 및 금융시장전반에 걸쳐 시스템의 붕괴로 유도한 만행들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경제파수꾼의 역할을 사명감을 갖고 수행하였는데, 이러한 민족적 계몽싸이트가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문을 닫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역사에 관하여 식견이 높으신 백제사
님의 주옥같은 저서가 출판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다른 까페로 스크랩 해 갑니다. ^^
심청사달님. 고맙습니다. 저는 그리 현명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한편 호기심이 많고 열중하면 열심히 추적했던 사람일 뿐입니다. 제 고향이자 제가 살고 있는 곳이 동두천입니다. 민족의 아품이 가장 극명히 상존하는 곳입니다. 저는 저의 동네 근처에서 일어난 미군장갑차 여중생 압차사건 때에도 서명운동과 집회때에도 나름 열심히 참여했었습니다. 가슴에 저며오는 민족애를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존경하던 선배님이 의문사로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언제가 정의의 시대가 오면 그 선배님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만주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면서 드디어 민족의 진정한 역사에 대해 규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하다보니 시대소리에 연결되어 많은 것을 알게되었고 글도 썼고... 일본에 잠시 갔다오게되면서... 운명이 저에게 과거사를 좀 알려준 것 같습니다. 그때 알게된 것을 좀 정리했습니다. 나름 소명을 가지고 했는데... 거기까지는 제가 해야 할 것이라 느꼈습니다. 제가 부족한 점. 그리고 제가 틀린 점은 다른 분들이 꼭 알려줄 것이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