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맥문학 12월호에 게재된 수필입니다.
등화가친의 계절에 즐겁게 읽어보세요.
韓 吉 洙
한맥 가족들 南海에 빠지다
-한맥 문학가 협회, 동인회 회원들 세미나 겸 김진희 회장 시비 제막식 참석
2016, 10, 22 하늘은 높고 푸르며 날씨는 맑고 햇볕은 따뜻한 전형적인 가을 날씨다. 이 좋은 날 어찌 방안에서 뒹굴며 낮잠을 자거나 TV에 눈을 빼앗기고 헤맬 수가 있는가. 박차고 밖으로 나와 나들이하면 얻어가는 소득이 짭잘할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 문을 박차고 나오면 눈과 귀와 입이 즐거워하는 참 좋은 계절이 우리를 맞이한다. 08;40 중간에서 만난 유청목 회원과 같이 서대문 독립문 부근 주차장에 가니 벌써 많은 회원들이 나와서 인사를 나누고 명찰을 목에 거는 등 바쁘다. “나도 여기 대령이요” 하는 신고를 하고 나니 1호차는 벌써 만원이어서 2호차로 밀려났다. 그러나 2호차에 가니 김진희 한맥문학 회장, 이창년, 윤철환, 이효녕 등 V I P가 많이 승차를 했으니 이 2호차를 앞세워야 할 것 같다. 09;10 차는 출발했다. 출발하자 말자 운전기사가 우리 문인들에게 안전교육을 실시했다. 0, 차내 망치가 있는 좌석이 상석이라고 하는데 어디 어디 등 4곳에 망치가 있고, 0, 안전벨트를 매고 0, 차내에서는 음주 가무행위를 일체 금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3번째 이야기는 기사 아저씨가 우리들 행동거지가 올바르고 점잖기로 소문난 문인들을 잘못보고 하는 사족이었다. 동승한 유청목 회원은 “교통사고는 승객이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운전기사가 잠을 제대로 자지를 못하고 방심 운전하는 데에서 생긴다.”는 명담을 내놓았다. 남산터널을 빠져나와 한남대교를 건너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해서 남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정다운 동인회 사무국장과 최수영 차장이 바빠졌다. 물을 1병씩 나눠주고 피로 회복제인 박카스 1병, 떡 한 덩이, 캔 커피 1캔, 심심풀이 과자, 삶은 밤 5개, 귤 외에 점심 식대 1만 원 등 푸짐하게 안겨 준다. 그러더니 회비를 내라고 한다. 회비는 1박 2일에 6만원인데 필자는 적지만 10만원을 지불했다. 차는 청계산 밑을 질주하는데 오른쪽에 있는 청계산은 고려 말의 충신 조견이 이 산에 숨어서 매일 아침 산 정상 망경대에 올라가 개경 쪽을 바라보며 절을 하면서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현장이 있고 피눈물을 쏟았다는 혈읍재도 있다. 지금 한창 부동산 붐이 일고 있는 판교를 지나니 요금소가 나온다. 이곳으로 요금소가 옮겨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논밭이 있는 한적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서울이 이곳까지 이어져서 아파트 숲으로 번잡하다. 광교산 밑 수지에는 나병(한센 병)환자 촌이 있었는데 이곳에 이 들만을 치료하는 조그마한 병원이 있었다. 필자의 작은 아들이 얼굴에 얼룩이가 생겼는데 아무리 유명하다는 피부과에서도 못 고쳤다. 그러던 중 어느 의사가 이곳 병원을 소개하기에 당시 교통도 불편한 오지인 이곳을 여러 번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 깨끗이 나은 일이 있었다. 또한 이 곳은 고려 말에 만고의 충신 정몽주의 시신을 고향인 영천으로 모시려고 운구하는데 이곳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개바람이 불어 상여의 맨 위를 덮은 천이 날아갔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운구를 중단하고 이곳저곳을 찾다 보니 모현면 능원리 현재의 묘소자리에 떨어져 있는지라 이곳이 명당이라는 지사의 말을 듣고 여기에 안장을 했다는 일화가 있는 곳이다. 이때 차내에서 한맥문학 동인회 박종욱 회장의 인사가 있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날씨 좋은 오늘 들판에 있는 누런 벼를 보니 먹지 아니해도 배가 부를 것 같아 흐뭇하다. 오늘은 김진희 회장 시비제막식과 겸해서 세미나에 가는 뜻 깊은 날이다. 이 좋은 날 우리는 어떤 보람을 느낄 것인지 각자가 생각하시기 바란다. 우리 모두 안전에 유의하여 돌아 올 때 까지 유종의 미를 거둬주시면 감사하겠다.” 그 사이에 우리 차는 동탄 택지조성지구를 달리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아이를 낳지 아니하여 매년 인구는 줄고 있는데도 이렇게 광대한 택지조성공사가 왜 필요한 것인지 토지 주택공사에 묻고 싶다. 그뿐 아니다. 의정부에서 동두천을 가려면 중간에 있는 회천읍에도 이런 대규모 택지 조성공사를 하고 있고 남양주시 한강변 강북정수장 부근에서 금곡에 이르는 지역에도 큰 택지조성공사를 하고 있으며 강동구 미사지구에서도 큰 공사를 벌리고 있다. 그 외에 필자가 모르는 전국 방방곡곡에서도 이런 공사가 진행하리라고 보는데 대관절 뭘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젊은이 들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추세인데 택지를 조성하고 아파트를 지어놓아도 들어가서 살 사람이 없어 유령건물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도 눈을 감은 심 봉사 정책을 이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속 시원하게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망향휴게소에서 잠간 쉬었다. 1호차에 있던 이연숙 한맥 문학가협회 회장이 동인회장과 교차 승차하여 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오늘이 제1중요한 날이다. 우리 옆에 앉은 분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가을처럼 풍요롭고 알찬 수확을 거두시고 하시는 일 마다 모두 이루어지시기 바라며 행복하게 즐겁게 보람을 느끼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서울 시발점에서 110km의 거리이며 망향 휴게소에서 20분 정도의 거리 왼쪽에 청주한씨의 선대인 한명회 대감의 산소가 있다. 세조의 장자방인 대감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거치며 국정을 개혁하고 장순왕후(章順王后:睿宗妃)와 공혜왕후(恭惠王后:成宗妃) 두 딸을 왕비로 세운 권력의 정점을 확보했던 분이 이곳에 고요히 잠들고 있다. 이때 차내 뒤편에서 회원 중의 한분이 하모니카로 “낙화유수”, “섬 마을 선생”, “나의 살던 고향은” “백마강” 등의 노래를 신나게 연주해 차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봉사를 해 주었다. 대전에서 금산가는 길로 접어들어 터널을 지나자 계절을 잊지 않고 있는 듯 산 아랫도리에 단풍이 들기 시작했는데 노랗고 빨갛고 조화를 이루며 패션쇼를 하고 있다. 금산 인삼 랜드에서 미리 받은 현금으로 점심을 하려는데 때는 정오를 약간지난 점심때이어서 그랬는지 사람이 밟힐 지경으로 엄청나서 밥이 코로 들어갔는지 눈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겨우 식사를 마치고 인삼 전시관에 들어가니 백삼 홍삼 등은 준비가 되어 있는데 필자가 요하는 수삼은 없어서 그냥 나왔다. 금산은 분지 안에 들어앉은 아늑한 곳인데 실제로는 평안치 못한 고장이다. 임진왜란 때인 1592, 8, 18. 조헌선생이 이끄는 200명의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 500명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려 모두가 전사한 700의총이 있는 현장이요, 고경명 장군은 7.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선조대왕이 있는 평양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왜군을 만나 피 튀는 전투를 벌려 모조리 전사한 곳이어서 금성면에 그의 순절비가 서 있다. 그뿐 아니라 권율 장군은 의병들을 이치(梨峙)고개에 매복하여 때를 기다리던 중 전주로 가서 호남 벌에서 식량을 확보하려고 이 재를 넘으려는 왜군을 물리친 전투현장도 금산에서 대둔산 쪽으로 가는 초입 배티에 있다. 그러니 이곳 금산이 국난극복의 현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보니 차량의 왕래가 뜸하다. 장거리를 여행하다보면 지루하고 심심하기에 지나가는 차량의 뒤에 붙은 번호판으로 <짓고 땡>을 해 왔는데 이곳에서 부터는 지나는 차량이 가뭄에 콩 나듯 하기에 그나마 접을 수 박게 없었다. 마침내 적상산이 나온다, 이곳은 현직에 근무할 당시 여름휴가차 이곳에 왔었는데 친구 취송과 같이 면소재지인 적상에서 민박으로 1박을 한 뒤에 새벽에 적상산을 등산했다. 때는 3복지경인지라 날씨는 더워서 땀이 비 오듯 하여 온 몸을 적셨는데 허기가 져서 배가 등가죽에 붙었다. 이때 원광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안국사 터를 발굴한다고 작업 중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아침식사를 나면에 밥을 말아서 김치를 놓아서 먹고 있었는데 나면 국물이라도 한 모금 얻어 마셨으면 좋겠는데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여 이를 참고 내려오다가 구멍가게에서 맥주 1병을 사서 나누어 마시니 꿀맛이어서 이제는 살 것 같았는데 그 기분 그 생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담이다. 전북의 오지인 장수는 이 도로가 개통됨으로서 오지를 면했다. 이곳은 진주대첩의 영웅 최경회 장군을 뒤에서 도왔을 뿐 아니라 직접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서 순국한 의기 논개의 고향이기도 하다. 장수에서 번암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수분이 고개라고 하는데 빗방울이 고개 마루턱에 털어지면서 장수 쪽으로 흐르면 금강으로 흐르고 번암 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의 상류가 되는지라 물을 가른다는 水分이 고개이다. 이제 덕유산 60령 터널이 나온다. 60령이란 옛날 옛적에 이 고개에는 산 짐승도 많지마는 큰 도둑이 진을 치고 있어 과객 60명이 모여야 대오를 이뤄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전라도나 경상도의 양쪽 산 초입의 주막에서 사람들을 그러모아 60명을 채운 뒤에 고개를 넘었다는데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니 도둑의 기세도 대단했던가 보다. 60령 터널을 지나면 풍광 수려한 안의가 나온다. 덕유산에서 발원하는 화림동 계곡에는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라는 정자들이 있고 발을 벗고 뛰어들고 싶은 파란 물이 너럭바위를 유유히 흐른다. 이 일대를 황백산 군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그 외에도 국민관광지인 수승대와 용추, 삼락궁, 영귀대, 요수정, 광풍루 등의 관광꺼리가 즐비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허삼둘 가옥이 있는 안의는 연암 박지원이 5년간 안의현감으로 근무했고 명유 정여창 선생도 이곳 현감으로 근무한 일이 있는 이름이 있는 고을이다. 우리 차는 함양을 곁에 두고 지난다. 함양에는 최치원이 고을살이를 하는데 하천 둑이 넘쳐서 마을을 덮치는 일이 연례행사로 이루어지자 최치원 선생이 나무를 심어서 이를 보호했으니 오늘날의 상림이요, 김종직이 이 고을 현감으로 있을 때 학사루에 올라보니 서얼 출신으로 남이장군을 모함해서 죽게 만든 천하의 망나니 유자광이 방자하게 시를 써서 현판으로 걸어놓았는데 김종직이 이를 보니 이는 시도 아니고 개발 쇠발 그린 글씨인지라 이를 떼어서 불에 태워버렸다. 이 말을 고자질로 들은 유자광이 복수를 하려고 기회를 엿보다가 김일손이 쓴 [성종실록]의 사초에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 세조의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방해서 [조의제문]을 지었다고 연산에게 까발렸기에 이들을 역적으로 엮어서 모조리 참살했으니 이것이 피비린내로 천지를 진동시킨 무오사화로 이때 희생된 학자가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등이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 하였다. 함양이 고향인 동방의 5대 賢人 중의 한분인 정여창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한 바 있는 유명한 학자이었는데도 깡패 같은 유자광이 폭군 연산군과 손발이 착착 맞아 아깝게 희생된 학자이었다. 유자광은 결국에는 만년에 유배 가서 장님이 되어 죽고 자식들도 잘못 풀려 파락호가 되었다고 하니 죄는 진 데로 가는가 보다. 참고로 동방5현을 알아본다.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정여창 등 거유를 이름이다. 함양은 조선시대에 좌 안동, 우 함양이라 할 만큼 문벌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함양과 산청은 이와 같이 양반이 많고 큰 선비들이 많이 나왔음으로 서원도 많다. 남계서원 청계서원 송호서원 서계서원 도천서원 배산서원 덕천서원 등 서원이 즐비하다. 양반들이 정자에서는 야유를 하며 시도 짓고 풍류를 즐겼다면 서원에서는 후진을 교육하고 이곳에 배향한 학문과 경륜이 높은 선유(先儒)에게 예를 올리는 일을 부지런히 해 왔다. 그런데 서원에도 남인계 서원(영남학파)에는 주로 이황 조식 정구 유성룡 김성일 등을 배향하였고 서인계(기호학파)서원에서는 이이 성훈 김상헌 김장생 송시열 윤증 등을 주로 모셨다. 우리는 진주방향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런데 관광이라는 것이 차내에서 주변을 보는 것도 한 몫을 차지하는 것인데 서울이 무섭다고 하니 과천에서부터 기어간다는 격으로 논 밭 심지어 인삼밭도 차단벽으로 막아버렸으니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는 과잉차단이요, 재정낭비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이런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도로공사에서는 차단벽을 한번 재점검을 해 보라고 부탁하고 싶다. 약초로 유명한 산청에는 문익점의 목화시배지가 있고 시천면 덕천서원에는 유림의 거목 남명 조식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례를 올리고 있다. 1501년(연산군 7년) 경상좌도(慶尙左道) 예안 현(지금의 경북 안동) 온계리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나고, 경상우도(慶尙右道) 삼가 현(지금의 경남 합천) 토동에서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년)이 태어났다. 16세기 학파 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장수를 했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이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이 동인 정파는 다시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리되었다. 남명 조식 [南冥 曺植]은 경(敬)으로서 나를 밝히고 의(義)로서 나를 던진 선비로 임진왜란 때 국가가 어려움에 처하자 곽재우 장군, 정인홍, 김면 등 의병의 지도자가 남명 문하에서 쏟아져 나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건지는데 앞장을 섰다. 진주 옆을 지나간다. 진주라 천리 길을 . . . . 우리는 추풍을 몰고 천리를 내달려와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하동 I C에서 노량으로 내려와 현수교인 남해대교를 출렁출렁 건너 목적지인 남해 땅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곳 좁은 바다를 가슴깊이 간직하여야 한다. 임난 때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하던 노량 해전의 현장! 바로 우리의 성웅 이순신 장군이 왜적의 탄환에 맞아 최후를 마친 곳임을 생각하면 가슴을 여미며 숙연해 하여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 부근에 이락사와 충렬사가 있어 장군의 충절을 기리며 명복을 빌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남해 국제 탈공연 예술촌에 도착했다. 버스 2대에 승용차가 3대, 그리고 직접 이곳으로 온 회원 등 100여명이 모였다. 도착하자마자 조병각 협회 사무국장 사회로 국민의례를 하고 나서 이연숙 협회 회장의 개회사가 있은 뒤 손해일 국제펜클럽 부이사장의 축사가 있었고 송귀영 전 협회장과 김봉곤 사무국장에게 이연숙 회장이 감사패를 수여하고 곧 이어서 세미나가 시작 되었다. 홍성암 문학박사가 주제를 맡고 권순악 한국문협 정화위원장이 주제를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오늘 세미나의 주제는 <술과 문학과 고전>이다. 예로부터 술과 문학은 깊은 관련이 있다. 술에서 문학이 나오고 문학에서 술이 나왔다. 전원에서 낭만적인 술 한 잔, 시간을 초월해서 한 잔, 벗이 없으면 독작으로 마시기도 하고 조선조의 송강 정철과 같이 애주가로서 풍류와 멋을 풍기는 것도 술에서 나왔다. 송강은 [관동별곡]에서 북두칠성을 잔으로 생각하고 퍼 마시어 엉망으로 취했어도 대단한 풍취를 느낄 수 있는 멋이 있었다. 또한 술이라고 하는 것은 풍자도 있다. 암행어사 출도를 단행하기 전 이몽룡은 폭악한 남원 부사 변학도 앞에서 넌 짓이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 . . .하는 시를 읊었으니 이 얼마나 속이 시원하고 멋이 있는 장면의 시인가. 다음에는 중국의 고전을 살펴본다, 이태백의 월하독작이니 장진주와 산중 여유인대작을 보면 이태백은 주선이요, 적선이며 시선이라 할 수 있다. 詩聖인 두보의 음중8선가와 이하(李賀)의 장진주도 술 마시는 걸 읊은 글이다. 함곡관으로 가는 친구에게 술을 권하며 시를 지은 왕유, 두목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친구를 위해 술 한 잔 나누며 시를 읊었다. 술의 필요성을 고찰 해 본다. 여자대학의 가정과는 음식을 잘 만드는 것을 배우는 곳이 아니요, 그렇다고 의복을 잘 만들도록 지도하는 곳도 아니다. 이는 먼저 가정에 관한 철학을 배워야 하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기의 인격도야를 우선으로 하고 술도 마셔야 하는데 술은 인격도야와 자기통제를 하는 것이 주라 할 수 있다. 술꾼에게는 이런 성향이 있다. 새디즘적 술주정, 즉 남을 괴롭히는 습성과 마조히즘적 술주정으로 자기를 학대하고 밤새도록 우는 행동을 하는 자 등이 있으나 술은 우리 인간사회에서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문화인 것이다. 다음은 주도에 대하여 알아본다. 술을 배울 때는 부모 밑에서 배우라는 말이 있다. 그래야 올바른 주도를 배울 수가 있다. 공자는 밤새 술을 마셔도 자세가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술을 마시고 나서 웃어른이 나가지도 아니했는데 먼저 손아래 사람이 나가는 것도 예절에 어긋나는 것이다. 예절은 인품이다. 내 마음을 닦는 거울이라는 명심보감에는 주중불어는 진군자요, 재상분명은 대장부라는 말이 있다. -술 취한 중에 말이 없음은 참 군자요, 재물에 대하여 분명한 것은 대장부다- 10가지 도둑 중에 9번째로 술에 대한 것이 있으니 우리가 살아가는데 술은 필요악이라고 하겠다. 이번에는 음주문화를 살펴본다. 첫째가 독작이다. 일명 자작이라고 하는데 서양의 음주법이다. 둘째가 대작이다, 잔을 맞대고 건배를 외치며 마시는 술이다. 셋째는 수작이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시는 우리나라의 음주법이다. 술은 마시는 사람의 인격과 인품을 말 해 준다. 여기에 멋과 풍류가 곁들이면 더욱 좋다. 끝으로 완결하는 말 술과 고전과 문학은 아주 친숙한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술에 대한 이야기, 고전에 대한 이야기, 문학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술과 고전은 그 깊이와 맛이 그윽하여 그에 따른 문학의 맛도 깊다. 얇은 냄비에 끓이는 물 보다 가마솥에 끓이는 물이 더 깊은 맛을 낼 것이니 문학도 넓고 깊게 연구하고 응용하여야 할 것이다. 홍성암 좌장 술은 문학을 이른다. 조선 단종 때 원각사 13층탑을 세우는데 김시습을 모셔다가 불경을 강하게 했다. 신라 말의 최치원은 도교를 신봉하고 깁시습이 경주 남산에서 쓴 금오신화는 18세인 김시습이 유불선을 표현한 글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는 불교사상 및 도교사상 등 다른 사상과의 관련성도 무시될 수 없으며, 따라서 크게 보면 유자(儒者) 선승(禪僧)으로서의 김시습이 상호 이질적인 다양한 사상적 근거 위에서 나름대로의 글쓰기 방식을 개척하고 정립하는 과정에서 [금오신화]가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금오신화에는 사랑하는 남녀가 술을 나누며 시를 짓고 노래를 하는 걸로 되어 있다. 인생의 진짜 행복은 시로 화답하면서 술을 나누는 것이다. 술의 역할을 강론한 것이 문학이다. 자 그러면 오늘의 주제에 대하여 질문 할 분이 있으면 해 달라. 이창년 자문위원; 술에 대한 세미나에 감명 깊었다. 그런데 상민에 대한 시도 있느냐? 발표자; 고려가요에 나와 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알려진 것은 없다. 좌장; 더 이상 질의 할 회원이 없으면 이것으로 오늘의 세미나를 마치겠다. (모두 박수로 동의를 표시) 다음은 문학상 수여 이창년 자문위원이 문학상의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힌맥문학가협회 문학상 대상 이기덕(시) 월간 한맥문학상 대상 박종문(시) 서포문학상 대상 최병학(시) 대상 차혜숙(수필) 흰돌 원영동 문학상 대상 정해각(시) 김진희 회장 말씀 오늘은 대상만 수여하고 문학상은 연말에 수여하겠다. 오늘 시상에는 상금은 없으니 술내라고 하지 말라. 지금까지 상금으로 금 10돈을 주었는데 한턱내라고 해서 밤새도록 술값으로 다 털렸다고 하는데 오늘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끝으로 시 낭송이 있었다. 고마운 당신 김동설 손을 흔드는 것은 이창년 그리움 향 관 세미나는 모두 끝이 났다. 모두 큰 박수로 대미를 장식하고 우리는 버스에 승차하여 팔복정 식당에 가서 멸치 쌈밥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잘 곳으로 <쪽빛바다 팬션> 203호실을 배정받았다. 배정된 호실로 찾아가 보니 여기에는 이효녕, 오희장, 이오수, 김태옥, 유청목, 한길수(필자) 등 6인이 합숙하는 방이었다. 취침시간이 많이 남아서 지루하기에 필자가 제안했다. “이렇게 한방에서 하루저녁을 같이 유하는 것도 커다란 인연인데 서로 안면만 트고 지내는 처지이니 오늘 인사를 나누며 지나온 이력이나 문학경력 등을 소개하는 시간으로 하자”고 제안을 했더니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하여 오희창 문우부터 시작을 하였다. 그러다가 밤 10시가 되었기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필자는 2.8청춘도 아닌데 새벽 2시까지 잠이 들지 아니하여 엎치락뒤치락하며 애를 먹었다. 2016, 10, 23 05;00 옆방에서 벌써 일어나 문을 열고 닫고 하는 소리가 나기에 우리들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을 활짝 열고 밖을 보니 아! 글쎄 바다가 문 앞에 와 있었다. 그래서 숙소의 명칭이 <쪽빛바다 팬션>이었나 보다. 저 바다, 망망대해에 꿈이 떠간다. 어디로 가는 범선인지 어선인지 배 한척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한가하게 미끄러져 가고 있다. 어릴 때의 꿈처럼 낭만이 가슴에 남아있는지 그 배에 실려 한 없이 가고 싶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한 없이 가고 싶은 신기루 같은 꿈을 가져본다. 08;30 어제 저녁식사를 했던 팔복식당에 차로 들려 해물된장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한촌에 있는 식당 앞마당에 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커피 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는 정경도 한 수의 시이었다. 다시 차에 승차하여 이리구불 저리구불 돌아서 도착한 곳이 외금 마을인데 김진희 회장과 인연이 깊은 한적한 마을이다. 뒤에 높은 산이 해풍을 막아 주고 앞에는 좁다란 들판가운데 마을이 있고 그 앞에는 안산격인 작은 산이 있어 아늑하고 고요한 고장이었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너 주 서 있고 여기에 정자를 세워 놓았는데 마을의 수호신 같은 洞木에 주민들의 쉼터인 정자는 위치가 명당 터인데 바로 이곳에 김진희 회장의 詩碑를 준비해 놓았다. 남해초등학교 제37회 이태곤 유창호 동문의 화환이 서있고 노란 국화화분도 도착하여 식장을 장식했다. 문우들은 3 3, 5 5모여 시비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주변경관을 감상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10;00 정각. 한맥문학 동인회 정다운 사무국장의 사회로 제막식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참여하여 시비를 제막하였다. 짝짝짝 박수 . . . . 동인회 박종욱 회장의 인사말씀과 이연숙 협회장의 축사도 있었다. 코흘 릴 때의 김진희 회장의 친구 이봉선으로 부터 꽃다발을 받았다. 이태곤, 유창호 동문의 축사도 있었고 가족대표로 남해군 의회 김정숙의원의 감사인사가 있었다. 이어서 정해각 시인이 “표석이 서 있는 이곳”이라는 시에 곡을 부쳐 노래를 부르고 심상순 시인은 하모니카로 “나의 살던 고향은”을 연주하였다. 장춘자 시인은 비문에 새겨있는 김진희 회장의 시를 낭송했다.
외금 마을 표석이 서 있는 이곳
작은 돌탑을 지나/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이곳을/내가 그리워하는 가닭은/ 온 산천 산열매 꽃 흐드러진 봄/뻐꾸기 함께 뭇새 울음소리/흐르는 실개천 고랑을 가르는/신비로움 때문만은 아니오./명경같은 외금호에 뜬 쟁반달 안 주 삼아/밤길 걷던 나그네 한잔 술/풍월을 읊게 해서도 아니고/이곳 아지매들 풍성한 웃음소리와/길 가던 나그네 발길 멈추게 하는 인정이 /메말랐던 내 가슴에/수천 개의 별을 뿌려놓았기에/이곳을 그리워하오.
최수영 협회 차장은 창으로“뱃노래”와 “아리랑”을 불렀는데 모두를 신명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한 마음이 된 한마당이었다. 이때 문인들 각자의 호주머니에서 빳빳한 돈이 서서 나와 시비건립 기금에 보탰다. 장영준 시인은 김 회장의 약력을 “오늘 이 순간”이라는 시로 써서 낭송했다. 시비건립을 자비로 전담한 염한직 사장과 이 비를 세운 우성석재 염상우 사장에게 김진희 회장으로부터 감사패 수여가 있었다. 끝으로 김진희 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이 마을과의 인연, 시비를 세워준 독지가에 대한 고마움, 동창들과의 끈끈한 우정, 천리 길 이곳까지 와 준 100 여 문인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 등을 담은 진솔한 인사말씀이었다. 한마디로 [大馬는 不死다, 不敗다]. 많은 역경을 이겨낸 김진희 회장님은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며 승승장구 할 것이다. 기념사진을 찍고 마을 회관으로 내려가서 여러 가지 모둠 요리로 점심을 들고 12;00 마을 사람들의 환송 속에 화순을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길이 평평한 신작로에 나스니 2호차에서는 사단이 벌어졌다. 재간둥이 정다운 동인회 국장이 조용히 지나갈 리가 없다. “어제 2호차에 동승한 문인들을 인사를 시켰어야 했는데 어찌 하다 보니 그냥 지나쳤다. 이제 늦은 감이 있으나 오늘 시행하겠다. 맨 먼저 윤철환 선생을 소개 하겠다. 앞으로 나오시기 바란다. 0, 윤철환 ; 나는 한학이라는 이색적인 문학 활동을 해 왔는데 이런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여야 문학이 발전하는 걸로 알고 있다.“ 한시를 낭송하고 유창하게 ”추산 풍광이 어떻냐“ 하는 한시를 창으로 불렀다. 0, 김보태 ; 노래나 부르겠다. “오늘도 걷는 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0, 한길수(필자); 오늘은 좋은날이고 기쁜 날이다. 문학이 좋아서 등단을 하고 보니 좋은 선배들도 많이 만나 즐겁다. 지금 시우문인들의 모임인 시우문인회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재미있게 즐겁게 운영하고 있다.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것, 모임이 있어 불러 주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한맥문학의 영원하고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0, 국승원 ; 국보급 가수 “동무생각”이라는 가곡을 멋지게 불렀다. 호봉애 ; 한복을 입은 문인이다. “나는 문학가도 아니다. 설악산에 올라 한시를 짓는 정도이다. 0, 이건선 ; 하나의 그리움은 시가 된다. 그리움의 안테나는 어머니를 그리는 그림이 그려지고 그것이 명작이 될 수도 있으니 좋은 작품을 많이 쓰시기 바란다. 0, 유청목 ; 감사하다. 못난 사람도 여기에 끼워주셔서 감사하다. 2009년에 시로 등단하여 여러분과 같은 회원이 되었다. 노래 “원점”을 불렀다 0, 조유자 ; 나는 1박2일 하는 문학 활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멀리에서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오늘 회장님을 뵈오니 감사하다. 노래 “선구자‘를 불렀다. 0, 장예준 ; 부산에서 온 수필가다. 새댁 때 배 한 상자를 사가지고 시댁에 가는데 중간에 버스에서 내렸다. 길가에서 남편이 배 상자를 풀더니 배 한 개를 꺼내 입으로 껍질을 벗겨 먹으라고 나에게 내 밀었다. 집에 가야 배 한쪽 얻어먹기 힘드니 여기에서 먹고 가자는 것이었는데 이 이야기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0, 홍양자 ; 손 뜨게 질을 하여 제품을 수출까지 하고 있다. 0박종문 ; 김진희 회장께 축하드린다. 시를 써서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올려있다. 어제 한맥문학상 대상을 받았기에 바로 가족에게 알렸다. 노래 “언제까지나. . .”를 불렀다. 0김정환 ; 우리가 살아가면서 글을 쓰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근대사” 시 낭송하고 노래“한 세상”을 불렀다. 0김태옥 ; 이 세상 즐겁게 생활하자. “노새 노새 젊어서 놀아. . .”를 불렀다. 0허남준 ; 앞으로 잘 부탁한다. 노래 “백마강 달밤에 . . .”를 불렀다. 0김오수 ; 한맥문학의 전신인 농민문학 편집장 때에 고생 많이 했다. 노래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 . .‘를 불렀다. 0이기덕 ; 반갑다, 같이 동행토록 끼워 줘서 감사하다. 노래를 못 부른다고 하자 정다운 국장이 5만원의 벌금을 받았다. 0오광자 ; 일산에서 미술을 하면서 시를 쓰고 있다. 김진희 회장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고 존경스럽다. 노래 “만남”을 부르다. 0노선관 ; 문단의 큰 어른 김진희 회장을 존경하면서 뵈올려고 합석을 했다. 그곳은 배산임수의 젖꼭지 봉우리 밑에 여류명사가 나올 명당이었다. 노래를 안 불렀기에 벌금 5만원 부과했다. 0오희창 ; 시 낭송 “나는 알고 싶다” (이때 정다운 국장 최수영 차장에게 “힘들다. 막걸리 1사발 가져오라, 북어 안주하고) 0박일소 ; 딸이 5명이 있는데 또 딸을 낳았다고 하자 할아버지가 기가 막혀 “허허”하고 웃었다고 一笑라고 했다. 노래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을 불렀다. 0정해각 ; 노래 “깊어가는 가을 밤에. . . ”불렀다. 0조선윤 ; 의미 있는 행사에 같이 참여하여 너무나 기쁘다. 박두진 시 “바다의 연가”를 노래로 불렀다. 0권경희 ; 이 좋은 가을 시가 저절로 나오는 것 같다. 시 창작에 몰두하고 싶다. 0박경숙 ; 여러분과 같이 시비제막식에 참여하여 감사하다. 노래 “가련다 떠나련다. . . ”를 불렀다. 0주길환 ; 정신이 몽롱하다. 앞으로는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겠다. 노래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 .‘를 불렀다. 0장영준 ; 어렸을 때 평양에 살다가 남쪽으로 넘어왔다. 모친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시 “초승 달”을 낭송하고 노래 “봄날은 간다 . ”부르다. 웃고 떠들며 각자의 숨겨놓은 재간에 폭 빠지다 보니 화순 원곡마을에 도착하는 줄도 몰랐다. 마침내 오남식 관장이 운영하는 [원곡문학관]에 도착했다. 차에서 하차하여 필자가 잘 아는 오 관장 사위의 인사를 받으며 정문에 들어서자 말자 “팽이야 즐겁게 놀자”라는 관장의 까만 오석 시비가 우리들을 마지 한다. 울울창창한 소나무가 집을 에워쌓고 앉은뱅이 소나무(반송)가 마당 한쪽을 장식하고 있으며 가지가 찢어 질 듯 늘어진 욕심쟁이 감나무에 매달린 감은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 갈 지경이다. 필자는 우선 돌탑으로 쌓아 올린 [만인의 추모탑]을 먼저 찾았다. 허리가 아파 지팡이에 의지하는 오 관장이 개울가에서 돌덩이 한 개 한 개를 무겁게 주워다가 정성스럽게 탑을 만들고 그 안에 단군 상, 그 밑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우리문인들의 사진도 모아서 전시를 했는데 필자의 연필 그림 얼굴과 동방원 시우문인회 부회장의 사진도 보였다. 이를 사진에 담고 잔디마당으로 나가니 작은 행사가 열렸다. 모두 준비한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나서 오남식 관장의 환영사가 있었고 이연숙 협회장의 인사말씀, 박종욱 동인회장이 시비에 있는 “팽이야 놀자”라는 시를 낭송하였다. 이어서 오 관장의 부인께서 오 관장이 지은 “사랑이 별거더냐?. ”라는 시를 낭송한 뒤에 가족을 소개하였다. 필자가 종로구청에서 같이 근무했던 박도식이 오 관장의 큰 사위였다. 인연이란 이렇게 이리저리 얽혀있게 마련인가 보다. 이들 부부는 부부공무원으로 서울시에서 사무관으로 정년퇴임을 했다고 한다. 이 집에서 마련한 단감과 매실차를 마시고 나서 필자는 문학관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보니 3년 전에 와서 볼 때하고 많이 달라져 있었다. 김진희 회장과, 이연숙 협회장하고 “팽이야 놀자 ”라는 시비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버스에 승차하여 화순읍내 외딴곳 산중에 별장처럼 아니 왕궁처럼 버티고 있는 “벽오동”이라는 음식점에서 별미인 보리밥을 맛있게 먹었는데 식대를 오남식 관장이 지불했다고 하니 미안한 마음 감출 수 가 없다. 더구나 올라가면서 차내에서 시장하면 자시라고 사평 기장떡도 한 뭉치씩 받았다. 이곳에서 오 관장과 작별을 고하고 나니 16;50이다. 1박 2일의 빠듯한 일정이 모두 끝이 나고 뭔가 놓고 오는 듯 한 아쉬움이 남는 속에 일로 상경하는 일만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