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그을린 부지깽이~
지금은 나무 땔감을 쓰지 않으니 부지깽이가 사라진 시대이다.
수 천년을 어머니들은 우리의 부엌에서 땔감을 뒤적일 때는 부지깽이가 필요했다.
공간을 만들어 산소가 공급되면 불이 확 붙는다. 불쏘시개는 바싹마른
솔잎(갈비)이 으뜸이었다.
그 시절에는 민둥산이어서 솔잎도 무척 귀한 시대였다. 부지깽이는 끝이 까맣게
타 있어서 바닥에 낙서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이상하게도 마을 전체가 조금씩 느려졌다.
낮 동안 뜨겁게 달아올랐던 흙길은 서서히 식어가고, 논두렁 너머로는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아이들은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아쉬웠다.
조금만 더 놀면 좋겠는데, 조금만 더 뛰어다니면 좋겠는데, 어김없이 집집마다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엄마들의 목소리가 담을 너머 신작로 끝까지 번져갔다.
그때 울엄마 손에는 늘 부지깽이가 들려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장작을 뒤적이고, 저녁밥을 짓던 그 부지깽이, 그런데 해질 무렵이 되면 그 부지깽이는 이상하게도 나를 찾는 지팡이가 되었다.
엄마는 부지깽이를 손에 들고 동네 어귀로, 골목 끝으로, 밭둑 옆으로 나를 찾아 나서곤 했다. 나는 더 놀고 싶었다.
그래서 숨었다. 친구네 담장 뒤에도 숨어보고, 헛간 옆에도 몸을 숨기고, 풀숲 사이에 가만히 앉아 숨을 죽이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는 내가 아주 잘 숨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절대 못 찾을 거라고, 엄마의 눈을 피해 조금 더 놀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엄마는 늘 나를 찾아냈다.
그게 참 이상했다. 아무리 숨어도, 아무리 조용히 있어도, 엄마는 귀신같이 내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엄마의 초능력이었을까.
아니면?
자식이 숨을 만한 곳을 다 알고 있는,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오래된 감각이었을까.
“얼른 집에 가자.” 엄마의 목소리에는 화가 난 듯 하면서도 밥 식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섞여 있었다. 손에는 부지깽이를 들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서운 매였던 기억보다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신호처럼 남아 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부지깽이가 하루 종일 엄마의 손에 얼마나 자주 들렸는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씨를 살리고, 젖은 장작을 밀어 넣고, 밥이 눌지 않도록 불 조절을 하던
그 손길을 나는 몰랐다.
그 부지깽이 끝에 묻은 검은 그을음이 엄마의 하루였다는 것도, 저녁마다 나를 찾아 나서던 그 걸음이 사랑이었다는 것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더 놀고 싶었고, 엄마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니 이제는 부지깽이를 볼 일이 거의 없다. 아궁이도 사라지고, 굴뚝 연기도 사라지고, 저녁이면 아이 이름을 부르며 골목을 도는 엄마들의 목소리도 예전 같지 않다.
버튼 하나로 밥이 되고, 스위치 하나로 불이 켜지는 세상에서 부지깽이는 어느새 낡은 물건이 되어 기억 속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가끔 그 부지깽이가 보고 싶다. 검게 그을리고, 손때가 묻고, 한쪽 끝이 닳아 있던 그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 보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부지깽이를 들고 나를 찾아오던 엄마가 보고 싶은 것이다.
노을 아래서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못 이기는 척 따라가던 어린 나, 그리고 집에 들어서면 풍겨오던 밥 냄새와 아궁이의 온기,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그립다.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저녁밥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어디에 숨어도 결국 나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때는 귀찮고 싫었던 일이, 지금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가장 다정한 풍경이 되었다.
부지깽이 하나가 그립다는 말은 어쩌면 그 시절의 저녁이 그립다는 말일 것이다.
놀다 지쳐도 돌아갈 집이 있었고,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있었고, 아궁이 앞에서 하루를 태워 가족의 밥을 지어내던 따뜻한 손이 있었다.
이제 나는 안다.
엄마가 들고 있던 것은 부지깽이 하나가 아니라, 나를 집으로 데려오려는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따라 그 검은 부지깽이가 보고 싶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그 부지깽이를 들고 나를
찾아오던 울엄마가 보고 싶다.
첫댓글 옛 추억을 더듬게 하는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