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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당시 전남대 정문. (사진: 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 별명이 고인돌이었다. 고인돌은 대단히 폭력적이었다. 학기 초에 기강을 잡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체벌을 가하셨다. 요새 기준을 따른다면 분명 폭력 교사지만 그땐 거의 그랬다. 수업도 재미없었다. 기계적으로 연도를 외우고, 시대별 문화재 이름들을 주워 담으며 선다형 문제집만 풀어대는 수업이 재밌을 리 없잖은가. 게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고인돌은 나를 싫어했다. 폭력적이고 지루한 선생님이 나를 싫어하기까지 하시니, 나 또한 역사 과목과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인돌이 울었다. 1992년 5월 18일 월요일 전교생 운동장 조회 시간에 고인돌이 5·18에 관해 울음을 참아가며 한 문장 한 문장을 힘주어 설명하셨다.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선생님은 5월 18일에 학교에서 계엄군에 친구가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고, 자신은 계엄군에 잡히지 않으려 후문 담장을 따라 사력을 다해 뛰었던 경험을 이야기하신 후,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으셨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1)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를 읽을 때 멀리서도 보일 만큼 고인돌 어깨가 흔들렸다. 고인돌이 울다니. 고인돌 같은 사람이 역사를 말하며 시를 읽다가 울다니 당황스러웠다. 고인돌은 역사 교과서 어느 대목을 읽을 때도, 역사 문제집 어느 단원을 풀어줄 때도 울었던 적이 없다. 계백이 가족들을 죽일 때도,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바다로 뛰어내릴 때도, 전봉준과 동학 창의군이 우금치에서 패했을 때도, 선다형 문제를 맞히지 못하는 아이들 머리통을 통통, 손바닥을 짝짝, 허벅지를 퍽퍽 장난치듯 때려대던 고인돌이 어깨가 흔들릴 만큼 울었다. 월요일 운동장 조회 시간에 뒷줄에서 껄렁대던 아이들도 고인돌이 울 때 비웃지 않았다. 이상하잖은가. 연도와 문화재 좀 모른다고 숱하게 매타작을 당했건만 고인돌이 울 때 누구도 비꼬지 않았다. 심지어 고인돌을 따라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2년 5월 17일까지 “광주사태”를 “폭도들이 일으킨 난리”로 알고 있던 나는, 고인돌의 눈물과 껄렁대던 아이들의 숙연함과 심지어 따라 우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필자가 다섯 살 때 살았던 시골의 지구대. (사진: 필자 제공)
1980년에 아버지는 장성군 진원면 지구대를 책임지는 경찰공무원이셨다. 아버지는 시민군들을 ‘폭도’라 부르셨다. 광주 외곽에서 근무하셨던 경찰공무원으로서 아버지는 전두환 신군부가 제공하는 정보와 지침대로 5·18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다섯 살 아이였던 나도 광주 시민과 다른 방식으로 5·18을 간접 경험했다. 아버지는 ‘폭도’가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하러 온다는 정보를 받고, M1 카빈이 격발되지 않도록 공이만 빼 땅에 묻었다. 지구대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시고 직원들과 불태산으로 피하셨다. 어머니와 나는 옆집으로 피신했다. 어머니는 문고리를 걸고 내 몸을 담요로 말았다. 어린 마음에 어떤 놀이보다 재밌었다. 어른들마저 진지하게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라 여겼지 싶다. 총소리가 몇 차례 들렸다. 후에 듣기론 무기고 자물쇠를 깨뜨리기 위한 근접 사격이었다고 한다. 시민군들이 공이 없는 카빈 소총을 가져간 후, 관사로 돌아왔을 때 보았던 현장은 어지러웠다. 지구대 유리창들이 모두 깨졌고 전화기들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이렇게 시골 경찰이셨던 아버지는 시민군을 폭도로 만났고, 5·18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 불렀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에도 아버지는 노태우를 찍으셨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6학년짜리 아들에게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조곤조곤 설명해주셨다. 우리 가족은 김대중 후보의 낙선을 가슴 아파하지 않았던 희소한 광주 사람이었다. 그땐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고인돌이 울다니 이상하잖은가. 브레히트의 시를 들으면서 껄렁대던 친구들이 숙연하다니 이상하잖은가. 심지어 고인돌을 따라 흐느끼다니 이상하잖은가. 운동장 조회 때만 아니라 5월 18일 내내 선생님들은 큰소리로 혼내지 않았고 학생들은 교실에서 떠들지 않았다. 5월 18일 내내 선생님들은 작대기를 손에 들지 않았고 학생들은 복도에서 뛰지도 않았다. 시끄럽고 폭력이 난무하던 남자고등학교에서 5월 18일은 분명 이상한 날이었다. 슬프고 평화로웠다. 슬프고 평화로운 5월 18일을 지나며 여태 뭔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반장들에겐 망월동 묘지에 다녀오라는 숙제가 떨어졌다.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걷다가, 경운기를 얻어 타고, 다시 걸어 망월동 묘지에 갔다. 망월동 5·18 묘지 입구엔 작은 매점이 있었다. 매점 입구 한쪽에 5·18 때 상하고 죽은 시민들 사진이 붙어있었다. 아버지께서 “폭도”라 하셨던 시민들, 어쩌면 아버지께서 관리하던 카빈 소총을 ‘탈취’2)해갔던 시민군들은 심하게 짓이겨지고 손상된 채 죽어있었다. 죽은 폭도들은 비닐에 말려 시청 쓰레기차에 실려 망월동에 버려졌다고 한다. 반듯한 비석 대신 처참한 사진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무덤 주인 앞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슬프고 평화로웠던 5월 18일이 지나고, 고인돌은 여느 때처럼 폭력 교사로 돌아왔고 학생들은 예전처럼 껄렁대고 시끄러웠다. 아무렇지 않게 대학 입시를 위한 일상으로 퇴행했고, 고인돌이 풀어주는 역사 문제집엔 5·18에 관한 질문은 등장하지 않았다.
망월동 구묘역. (사진: 5·18기념재단 제공)
문제집 속 빽빽한 질문에 눈을 고정한 채 답하다 보면 정작 질문하지 못한다. 문제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답(定答)을 강요한다. 다섯 개 중 하나 또는 둘을 고르라며 강요하는 선다형 문제집이란 답을 이미 알려주고 질문하는 괴상한 책이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오답들 속에서 정답 찾아내기를 강요하는 문제집은 생각을 키워주는 게 아니라 눈치만 늘려준다. 눈을 감기고 눈치만 늘리는 문제집을 읽으며, 1992년 5월 18일 월요일 슬프고 평화로웠던 운동장 조회는 잊혀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제집에서 벗어나 책을 읽게 되었다. 임철우의 《봄날》을 읽으며 분노를, 이재의·전용호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으며 존경을, 한강의 《소년이 온다》·《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부끄러움을 배웠다. 나를 몹시 사랑하셨던 우리 아버지의 가르침, 광주사태를 일으킨 이들은 폭도들이었다는 시골 지구대 경찰이셨던 아버지의 가르침에 맞서는 건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세상 모든 아버지들 은 사랑하는 맘으로 왜곡을 가르친다. 나 역시 사랑하는 맘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왜곡을 가르치고 있을 터다. 정해진 답들로 빼곡한 문제집 같은 아비가 아니라, 행간 속 무수한 질문이 가득한 양서 같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양서 같은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아이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왜곡된 가르침을 넘어서는 건, 모든 아버지의 소망이다. 나는 아버지의 소망을 이룬 셈이다. 2천 년 전에도 아비들의 왜곡된 가르침들이 난무했을까. 현실이 원하는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눈치를 늘리기보다 역사를 전망하고 질문하며 길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라고, 눈에 불을 켜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마 6:22-23, 이하 새번역)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고,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둡다는 게 무슨 뜻일까. 예수께선 눈으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성한 눈은 정의를 본다. 반대로 성하지 않은 눈은 이익을 본다. 정의를 보는 눈을 지닌 사람은 온몸이 밝고, 이익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온몸이 어둡다. 그러면 정의와 이익,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익을 버리고 정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정의를 우선하면 이익도 따라온다는 게 예수의 선언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 6:33)
눈이 성하다는 건 이익보다 정의를 우선한다는 뜻이다. 이익을 앞세우는 건 현실에 묻히는 것이요, 정의를 우선한다는 건 역사를 사는 것이다. 계엄군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상하게 하고 죽일 때 일어섰던 시민들이, 솥을 걸고 밥을 나누었던 시민들이, 헌혈하며 피를 나누었던 시민들이, 부패한 시신을 닦아주고 하얀 양말을 신겨주던 시민들이, 목숨 걸고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했던 시민들이, 바로 정의를 우선시한 눈 밝은 사람들이었다. 부릅뜬 눈으로 역사를 보고, 현실 너머 역사가 있음을 믿었던 시민들의 삶과 죽음으로, 오늘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산다. 민주공화국은 예수께서 선포하고 기도하셨던 ‘천국’ ‘하나님 나라’ ‘아버지의 나라’ 를 우리 시대 언어로 번안한 것이다. 민주공화국은 이천 년 전 사람에겐 ‘이미’(already)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요, 21세기 우리에겐 ‘그러나 아직’ (not yet) 미흡한 하나님 나라다.
망월동에 실려온 5·18 희생자 손목에 있던, 당시 날짜에 멈춰진 시계. (사진: 필자 제공)
민주공화국이 “그러나 아직”(not yet) 미흡한 까닭은 왕 노릇 하려는 이들 때문이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신군부는 ‘K-공작’ 계획을 수립했다. “K는 킹(King)의 앞글자, 전두환을 왕으로 만드는 계획”3)이었다. 전두환을 왕으로 세우려면, ‘서울의 봄’을 좌절시켜야 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거짓으로 사람들을 호도해 ‘봄’을 보려는 이들의 눈을 억지로 감겨버렸다. 광주에 이은 제2, 제3의 폭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는 왕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게 신군부의 ‘K-공작’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텔레비전 토론회에 참여했었다. 21세기에 대통령이 되려는 이가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다니는 건 우스웠지만, 왕(王) 자를 쓰고 다니던 이가 대통령이 된 현실은 무섭다. 곤봉으로 내려치지 않고 총을 쏘진 않으나, 축제를 즐기던 청년들이 거리를 걷다 죽고, 나라를 지키던 젊은 해병이 급류에 쓸려 죽고, 아침에 출근한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죽어 퇴근하지 못한다. 한반도에 세워진 역대 어떤 나라보다 대한민국은 부강하나 지구 위 어느 나라보다 자살률이 높고 출생률은 낮다. ‘이미’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가 자리 잡은 민주국가지만, ‘아직’ 고르게(共) 잘 사는(和) 공화국은 아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요,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면 대한민국엔 왕이 설 자리가 없다. 대통령 역할을 못 하는 왕을 민주공화국은 인정할 수 없다.
전두환을 왕으로 세우기 위한 ‘K-공작’으로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어갈 때, 억압과 봉쇄로 기사를 내보낼 수 없었던 〈전남매일신문〉(현 〈광주일보〉) 기자들이 집단 사직서를 썼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 5. 20.”
망월동 구묘역에 조성된 ‘故 위르겐 힌츠페터 기념정원’. (사진: 5·18기념재단 제공)
나는 부끄럽지만 붓을 잡는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똑똑히 보았기에 신문에 싣고 싶었던, 그러나 실리지 못했던 이야기를 쓰겠다. 누군가를 위해 피 흘릴 만큼 사랑한 적 없어 부끄럽지만, 부끄러워도 붓을 잡는다. ‘서울의 봄’이 좌절되었을 때, 꽃잎 같은 무수한 피를 흘려 기어이 ‘광주의 봄’을 맞이한 사람들을 소개하겠다. 이강, 김남주, 박기순, 윤상원, 박관현, 김영철, 전옥주, 문용동, 류동운, 안철, 광천시민아파트 부녀회, 황금동 아가씨, 안병하, 힌츠페터, 피터슨, 김종률 등 “역사에 대한 믿음,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그리고 내가 그 전체와 하나라는 믿음”(김상봉, 《영성 없는 진보》)으로 현실 너머 역사를 살았던 사람들을, 피 흘려 스스로 꽃이 되어 봄을 보았던 사람들을, 소개하려 한다. 이렇게나마 부끄럽게
봄을 본다.
■ 주
1) 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광규 옮김,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아남은 자의 슬픔》(한마당, 2004), 117쪽.
2) 김담연 씨의 회고다. “(시민들이 총을 든 것에 대해) 계엄사는 총기 탈취라고 했는데 나는 회수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리를 국민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순간, 그들이 반란군이었다. 군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렇다면 도시의 젊은이들이 총기를 가져온 것은 국민의 재산을 반란군으로부터 회수한 것이다. 우리는 반란군으로부터 도시를 지켜야 했다.” 이혜영, ‘5·18민중항쟁 열흘의 기록’, 《한국민중항쟁 답사기: 광주·전남편》(내일을여는책, 2020), 137쪽.
3) 같은 책, 99쪽.
첫댓글 광주의 봄...
진실을 아는데 오래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