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1월 26일
말씀 : 요5:19
제목 : 새로운 삶의 열매
저번주에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기독교인들에게 의미 있는 날인데요, 그 유래에 대해서는 해마다 설명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추수감사절의 영적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생명의 열매 아니겠습니까? 가지가 나무에 절로 붙어 있으면 열매는 자연스럽게 열리는 법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셔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 그분과 연합된 삶을 통해 성령으로 맺어나가는 열매가 생명의 열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혹시 천국에 대한 기쁨과 감사와 영광을 기대하고 신앙생활을 합니까? 아니면 막연하게 천국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살아갑니까? 십자가 복음의 결과는 천국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것은 천국에서 열매로 확인되는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십자가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알아야 거듭난 삶, 새로운 삶, 생명의 삶, 축복의 삶, 천국을 기대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을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후5:14-16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새로운 관점으로 변화된 중심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라는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즉 옛 성품,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가치관이 함께 바뀝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의 욕심, 정욕, 이생의 자랑, 교만, 미움, 살인, 이 모든 것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희생과 섬김과 용서와 인내 등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조적으로 이렇게 바뀐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육신과 욕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행과 다툼과 원수 맺음은 육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가치관으로 삶이 바뀌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바울의 이런 새로운 가치관의 삶을 고린도교회 일부 유대주의자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면, 그의 열심이 지나쳐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히 변화된 것만이 아닌 이제는 완전히 바뀐 그에게 넘쳐나는 생수의 강이 자신에게 열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뀌면 ‘혹시 미치지 않았나’라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자기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로운 삶, 완벽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뀌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전15:35-44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말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에게 씨의 형체가 얼마나 다르냐는 말입니다.
신령한 육체를 가집니다. 그런데 그 육체는 지금 세상의 육체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애벌레는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그런데 나비는 얼마나 화려합니까?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것 아닙니까? 상상해 보세요.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는 육신과 신령함으로 변화된 육신과는 다른 것입니다. 신령함의 육체로 주님을 신랑으로 하는 우리가 신부 된 모습으로 영생하는 것입니다.
성충도 흉측하게 생겨야 나비가 더 멋있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의 고난과 힘듦으로 그분을 위한 삶이 멋있는 그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서 목회하다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한국을 잠시 휴식 차 방문했습니다.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본 교회의 장로님이 계신데, 이분의 헌신도는 엄청나서 모든 교인들이 부러워하고 인정할 만한 분입니다. 교회의 어려움을 솔선수범해서 해결하고, 교회를 건축할 때도 헌금도 굉장히 많이 하고, 교인들과 지역주민들을 위해 또는 사회의 어려운 부분들이나 기독교 행사를 할 때나 어김없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인지 사업도 날마다 번창하고 많은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암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교회와 담을 쌓고 목사님이나 교인들의 병문안, 심방 등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포기하지 않고 심방을 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고 주의 능력과 은혜로 믿음을 지켜나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의 말씀을 거부하더니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해서 말씀을 들려주려고 하니까 ‘예수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으니 당장 나가라’고 고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목사님이 충격을 받고 한국으로 잠시 쉬기 위해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중요하고, 천국과 지옥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서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껍데기 신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거듭난 사람,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데 이런 구원받은 사람,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동안 삶을 지배했던 그 관점과 일치해야 합니다. 요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옛 자아,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은 자만이 실질적인 삶 속에서 새롭게 창조된 성품을 적용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항상 ‘나’는 십자가 죽음에 머물러 있게 하고, 즉 내 자신의 악한 모든 육체적인 것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가면 새롭게 창조된 성품으로 변화된 ‘나’는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여 언행은 물론 생각과 가치관 등 전체적인 삶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될 때 성령의 인도 아래 우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려고 결단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의 삶은 혁명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 성품, 옛 자아는 내 마음대로의 삶이지만,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이 되고 ‘내’가 십자가에 넘겨질 때 우리의 삶은 빛 가운데 거하며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더디 할 수 있게’ 됩니다. 약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십자가는 사악한 생각과 정욕과 욕심과 언어와 세속적 언행을 다스리며 죽음으로 처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모든 죄를 넘겨줄 때, 침묵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조용히 침묵할 수 있고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억울한 상황에서도 소란한 말로 대처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속한 육신의 모든 번잡함을 떠나 외로움과 소외감도 느끼지 않고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너무나 많은 말들이 있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너무나 쓸데없는 말들이 오감으로 인해 상처와 아픔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서 말을 지어내는 ‘나’를 못 박고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옳은지를 분별하기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것마저도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심령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은 아름다운 열매, 즉 온유와 겸손과 절제와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관용 등이 열매로 맺어지는 삶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 나느니라.’
앞에서 나오는 악이 우리의 옛사람, 즉 예수 믿기 전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악한 말이 장황한 말로 홍수처럼 불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물결이 더 거세지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 또는 아니오’만으로 만족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해서 ‘주님 뜻대로만 말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구할 때 예수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과 행동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복된 심령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말만 할 수 있도록 연단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옛사람의 사악한 말들과 거짓과 장황스러운 말들이 고침을 받도록 성령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서 나오는 사랑의 말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육신의 모든 말들이 얼마나 허황된지 깨달아야 합니다.
빛을 가리는 세상의 쓸모없는 말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마저 빼앗길 수 있습니다. 복잡한 정치 이야기, 유튜브의 헛된 정보에 의한 감각적 이야기들, 서로 잘난 척하는 자랑들이 우리 주의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과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홀로 침묵하는 훈련을 하나님과 함께 받으셔야 합니다.
특별히 설교하는 저는 더욱 많은 말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설교할 때, 상담할 때 조심성 없이 사람들을 대할 때가 있을까봐 긴장하고 조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행여나 ‘나’의 생각을 주입시키고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 교회를 이끌고 있지 않는가 하는 긴장감이 가면 갈수록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과 뜻과 의도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나니(요5:19)’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탁월한 장점과 사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를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 말씀만이 진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에게 움틀 수 있는 모든 교만과 허영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주여 나는 아이라 말할 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 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신 말씀은 항상 아버지를 의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순종과 분별력이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런 분별력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집, 자아, 정욕과 욕심, 즉 모든 육체적인 요소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의 죄성 때문에 편견 없는 분별력이나 판단력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판단은 참되다’ 왜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모든 판단은 성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편견 없는 정의를 갈망하고 외쳐야 합니다. 옳고 그름, 정당함과 타당성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편이면 거짓도 옳다고 하고, 법적으로 잘못했는데도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시대는 편견 없는 정의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편견 없는 정의를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요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18절을 봅시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만의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놓은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이려면 먼저 편견 없는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편견 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행동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나의 영광만 찾지만, 하나님 안에서 나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만 찾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를 내어놓은 그 변화된 중심을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을 주장하는 ‘나’라는 중심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이와 같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계실 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우리는 비로소 흔들림 없는 굳은 신앙을 갖게 됩니다.
요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그러므로 우리 앞에 있는 중요한 질문은 “과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역사하사 개개의 성도들을 ‘나를 못 박아버린 십자가의 진리’만으로 변화된 인격체로 만들어주실까?”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나’를 십자가에 내어준 바 된 죽음을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새로운 인격체로 만들어 주실까?라는 질문에 대해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서 확인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서 무엇이 나오느냐에 대해 우리 스스로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나오는데도 무심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 비방, 이간질, 거짓말, 음욕, 욕심 등이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셔야 합니다.
요12:24-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열매를 맺기 위한 생명의 법칙, 곧 십자가의 내면적인 부분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에 실질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을 통해 우리의 계속되는 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적용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부활의 생명력에 이르게 하십니다.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영의 자유함. 둘째, 지‧ 정‧의와 관련된 우리의 인격. 셋째, 육을 다스리는 영역까지 십자가의 영향이 미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순서대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요12:24 말씀을 확인해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연계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있듯이 영의 세계에 속한 영적인 법칙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12:25-26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음으로 처리하실 때 조금씩 처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한 번에 다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수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단 한 번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줌도 조금씩, 조금씩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하면 다 씻음을 받습니다. 한 번에 씻음을 받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죽음, 세상에 대한 죽음, 육신에 대한 죽음의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그 즉시 우리의 죄와 세상과 육신에 대한 죽음을 선포할 수 있으며 또한 그 능력을 실제로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롬6:11에서 ‘죄에 대해 단 번에 죽은 사실을 그대로 믿고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12:24 말씀은 롬6장이 말하고 있는 죄에 대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기 위한 점차적이고 진행적인 죽음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12장 말씀은 우리의 일생생활에서 잘못된 것을 버리라는 계명적인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지니고 있던 자연적인 옛사람의 ‘생명’을 필수적으로 버리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맺기 위해 버리라고 요청하신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명은 필수적으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열매로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53:10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의 속죄적 희생이 많은 열매를 맺는 만큼 그를 따르는 자들(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생명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생명을 죽여야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다음 주에 말씀을 통해 함께 점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