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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겨울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1월도 기울고 있습니다. 이만한 추위가 또 있을까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꽃샘추위까지 견뎌야 합니다. 물론 겨울 추위만큼은 아니겠지만 겨울을 떠나는 마음이 더 춥게 만들지요. 아무튼 이제 곧 입춘을 맞이할 것이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날씨보다 빠르게 움직일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갑니다. 이제는 해가 바뀐다고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생일이 지나야 먹는 것이니 나이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가거나 말거나, 그저 계절 바뀌는 것이 더 신경 써집니다. 겨울의 중간도 지났으니 조금씩 가까워지는 봄을 기대합니다. 그렇다고 뭐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제는 추운 겨울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뿐이지요.
먹여주고 재워주고 교통비까지 준다고 해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추위를 무릅쓰고 나서야 하는 일이 더욱 번거롭게 느껴지는 겁니다. 소위 ‘귀차니즘’이라는 거 말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겨울 지나 더 늙어보이게 되는 모양입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늙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늙기 싫으면 게을러지는 몸을 강제로 일으켜야 합니다. 나이 어릴 때는 젊음이 공짜이지만 나이 들면 절대 공짜 없습니다. 수고한 만큼 얻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잡아 일으켜야 합니다. 그냥 오래 사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노인들 지하철 무료교통카드를 없앤다고요? 맞아요. 대신 일자리만 주면 됩니다. 일하면 건강해집니다. 희망이 더 생깁니다. ㅎㅎ
정월을 보내는 한 주가 남았네요. 추위도 조금 수그러졌으니 건강하게 신나게 또 한 주를 보내고 싶습니다. 밖으로? ㅋㅋ 행복합시다.
2024년 01월 27일 김종우 목사 드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에베소서 5 : 15 - 16)
<길 위에 김대중>
‘무엇이 될까를 생각하면 나는 실패한 인생이다. 그러나 어떻게 살까를 생각한다면 그래도 값진 삶을 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곱씹어볼 말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무엇이 될까를 생각하면서 도전하고 노력하고 살아갑니다. 결과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때문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배우고 자랐습니다. 자라면서 어른들이 묻곤 했습니다. ‘넌 뭐가 되고 싶니?’ 대통령, 장군, 의사, 판사 등등 우리는 무엇에 중점을 두고 전진합니다. 그 부작용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치열한 경쟁입니다. 지금도 사회가 그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과정이야 어떠하든 일단 성공하면 됩니다. 치고 올라가든 밟고 올라가든 정상에 오르고 봐야 합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알아보는 것도 남다른 복입니다. 장점이 무엇인지, 재능이 무엇인지 알 수만 있다면 일찍부터 그 분야로 키워 가면 대단한 성공을 할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은 먹고살기 바빠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아니면 자신을 치다꺼리하기도 벅차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아이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밀고 나가는 것에 방해만 되지 않아도 다행입니다. 그런데 극구 부모가 원하는 분야로 고집하며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식의 재능이나 장점은 무시하고 자기 바라는 대로 자라주기를 바라고 자기가 꿈꾸는 직업을 가지기를 바라며 자식을 밀어붙이는 부모가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고생하지만 사실 부모도 마음고생 많이 합니다. 둘 다 불행합니다.
섬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공부 잘하는 아들이 섬에만 갇히는 것을 가만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포로 나왔습니다. 과연 공부 잘하고 똑똑했습니다. 아주 젊은 나이에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성공가도를 달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그림을 보았습니다. 나라가 왜 이래? 지도자가 왜 이래? 소위 이게 나라냐?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정치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을 품습니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꿈꿉니다. 국민 모두가 편안하게 잘 사는 나라를 그립니다. 그래서 선거에 뛰어듭니다. 그러나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한 번 두 번 낙선되고 나니 벌어두었던 돈도 거덜 났습니다. 한 번도 힘든데 무려 네 번을 떨어집니다.
그는 공부하는 정치인입니다. 그냥 문학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과 대조하며 개선하고 대안을 찾고 토론하며 보다 나은 길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협의하고 협상하여 보다 나은 길을 찾아가려는 것입니다. 목적은 집권이 아니라 국민의 보다 나은 삶입니다. 여당에 있어도 야당에 있어도 누구 편에 서기보다는 국민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목적이고 꿈입니다. 같은 당에 있어도 기꺼이 반대표를 던질 수 있습니다.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보다 좋은 방법을 찾으려 하고 그것을 위해 토론도 하고 누구와도 협상합니다.
한일협상 반대 시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굴욕외교라고 무조건 반대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따질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반대입니다. 그러나 그는 달랐습니다. 그래 해도 좋다. 그러나 그만한 대가를 받으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국민에게 이익이 되고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그 길을 못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반대만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다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입니다.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서 나라가 발전해야 하고 국민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비록 원한이 있고 미운 나라이지만 우리가 그만큼 유리하게 요구할 것을 요구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내어 나라 발전에 이바지한다면 반대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쟁 후 20년 가까이 군사독재를 경험했고 다시 민주사회 회복의 기회가 왔나 싶을 때 다시 군사독재가 이어집니다. 박정희 체제 안에서도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는데 다시 더 극심한 고난의 길을 걷습니다. 그 때 알면서도 다른 지역에서는 마음만 가지고 행동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유독 광주에서 행동이 나타났고 그 대가는 피로 물들었습니다. 나중에야 자신의 생명이 그 덕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긴 시간을 지나 찾아온 자리에서 그는 눈물을 쏟습니다. 얼마나 많은 청년과 시민들의 피가 거리를 물들였습니까. 생각하면 피눈물이 나지요. 그 덕에 돌고 돌아 그 자리에 찾아온 것입니다. 열광적으로 맞이해주는 시민의 손짓에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동안 그렇게도 미워한 군사독재 정권이 어떻게든 묻어버리려 나중에는 지역감정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사실 그는 한 지역에 매인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서울에서도 그의 연설은 그 누구라 할 것 없이 뜨겁게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니 가장 무서운 상대였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제거하고 싶은 정적이었습니다. 죽여서라도 없애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국내외 가리지 않고 글로 말로 사람들을 움직였습니다. 그를 아끼고 존경하며 따르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습니다. 권력도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느 한편에 기울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국민의 편이고 싶어 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을 보았습니다.
불 심판
옛날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겠다고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말하지요. 출 5 :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한 마디로 ‘이제 우리 백성 그만 부려먹고 보내십시오,’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로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2절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한 마디로 ‘하나님이 누구냐? 난 모르겠다,’ 그런 뜻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누굽니까?’ 하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사실 어떤 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물어보면 대답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질문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질문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냥 사실로 알고 느끼고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라도 혹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른다고 물리치겠습니까? 대답을 해야 합니다. 자칫 좀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되받아칠 것입니다. 뭐라고요? 알지도 못하면서 믿는다고 해? 우리가 그런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혹시 모세가 그런 꼴을 당할지 몰라서 이미 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라고요? 출 3 :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아멘! 우리가 불확실하게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자존자’(自存者)라고 알고 있습니다. 누가 있다고 해서 계시고, 없다고 해서 안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뭐라 하던 그냥 계신 분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그냥 계십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하신 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 앞으로 하실 일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예언이지요.
잘 아는 대로 성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입니다. 구약 즉 옛날의 약속입니다. 신약 즉 새로운 약속이지요. 약속이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룰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미래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 - 옛날 약속이 이루어졌기에, 이제 다시 신약 - 새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읽고 신약을 읽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약속을 이루셨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구약의 약속이 현실로 나타난 것을 신약성경 속에서 발견한다는 말입니다. 예언을 읽고 그 실상을 보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세상의 예언과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이 이루어졌는지, 안 이루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태 그냥 말로만 있을 뿐입니다.
성경의 예언을 보겠습니다. 사 7 :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나 보겠습니다. 마 1 :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 처녀 마리아가 남편이 될 요셉으로 말미암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하였습니다. 그래서 처녀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잘 아는 대로 어디서 태어나실 것도 약속되어 있었고(미 5 : 2) 그 약속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약속은 장래의 일을 말한 것이기에 다른 말로 ‘예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언하셨고 또 그 예언하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서로 짝이 된다고 말합니다. 사 34 : 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물론 이 글의 첫째 의미는 짐승의 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기록으로 보아도 하나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도 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며 잘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맞습니다. 요1서 4 : 8절과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말씀을 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 : 16) 그러나 그 하나님이 불법과 불의까지 사랑하지는 않으십니다. 때문에 성경에는 하나님의 심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심판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육적 이스라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옛날 일을 이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왜 주셨을까요? 잘 알지요? 거울을 삼으라고. 고전 10 : 5 - 6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1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들이 당한 그런 일들을 우리 또한 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지 아니하도록 경계를 삼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심판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을 하시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오는 심판은 물이 아니라 불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성경 말씀도 있습니다. 벧후 3 :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어 12절에도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그래서 우리는 지난 세기 특히 핵전쟁을 그렇게 두려워했는지도 모릅니다. 온 세상이 핵전쟁으로 뒤덮이고 이 지구가 결국은 박살이 나지 않을까 얼마나 마음 조리며 살았는지요. 물론 아직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언제고 그럴 것이라 믿고 사는 성도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또 그렇게 가르치는 목자들도 많고요. 그럴 듯하지요.
때문에 심심하면 이상한 종말론자들이 나타나서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겁주는 것이지요.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미혹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성경도 그것을 경계합니다. 마 24 :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엡 5 :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결국 영을 분별하라 경계하십니다. 요1서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거짓 선지자 즉 거짓 목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책임이 누구에게 먼저 있으리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선지자 곧 오늘날 목자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짓 목자’이기에 조심해야 하고 그 책임이 무거울 것입니다.
오늘은 불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불로 심판하실 것을 짐작하게 하는 말씀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으니 과연 구약은 물 심판이고 신약은 불 심판을 말씀하는구나 싶지요. 그러나 구약성경에도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 4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풀무불이 무엇입니까? 오늘날은 용광로라고 표현합니다. 아무튼 쇠도 녹이는 불입니다. 그 불이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들을 태울 것입니다. 뭣 같이? 초개 같이. 쇠도 녹이는 불이 지푸라기를 태우니 얼마나 순식간에 타겠습니까? 대단한 불입니다. 무시무시하지요. 과연 불 심판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불에 대하여 조금 다르게 표현한 성경이 있습니다. 렘 5 : 14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무엇이 불입니까? ‘나의 말'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이지요. 즉 말씀을 불 삼고 이스라엘 백성을 나무로 삼아 사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5 : 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런데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라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서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으십니까? 이방 나라입니까? 아닙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딥니까?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곳,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진리를 구하는 자가 있답니까, 없답니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 말씀하는 불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불이 아닙니다. 무엇이 불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뜨거워서 팔딱팔딱 뛰게 하는 그 불과는 좀 다르지 않습니까? 물론 결과는 그렇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불이라고 한다면 장작불 같은 불, 폭탄이 터져서 발생하는 불 같은 물리적 현상의 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도 땅에 불을 던지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눅 12 :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세상에, 우리 예수님이 시위라도 하려고 화염병이라도 던지시려는 겁니까? 예수님이 던지려는 이 불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말씀을 던지시는데 반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이 붙지를 않는 겁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타시겠습니까? 영생의 말씀을 주려는데 받지 않겠답니다. 어쩌겠습니까?
다시 구약시대로 돌아갑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았답니까? 하나님의 눈에 그들이 어떻게 비쳤는가 보겠습니다. 렘 5 : 11 - 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족속이 내게 심히 패역하였느니라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 우습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재앙도 없고 칼도 기근도 없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안이한 신앙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13절 봅니다.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 선지자들 곧 말씀 전하는 목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전한다는 말씀이지요? 거짓을 전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그 말을 듣는 백성들은 안심하고 살아갑니다. 재앙도 칼도 기근도 없단다, 뭘 걱정하느냐? 말세, 말세 2천 년 동안이나 말세 타령했지만 말세가 오더냐? 걱정 말고 오늘이나 잘 살아라 그겁니다.
하나님 백성의 이런 꼴을 보니 참 목자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의 마음이 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며 왜 화가 납니까? 한번 두 번 세 번 자식이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화가 나지요. 남의 자식이 말 안 들으면 그뿐입니다. 좀 심하게 말해서 듣거나 말거나 아닙니까? 그러나 내 자식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잘못되었으면 말해 주어야 하고 정 말을 안 들으면 때려서라도 가르치고 고쳐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화가 너무 치솟으면 ‘불같다,’ 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예레미야를 통하여 폭발합니다. 렘 6 : 11 - 12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가까운 사람이 배신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합니다.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분노가 치밉니다. 렘 23 :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 말씀이 불입니다. 말씀이 불이 되어 그 백성을 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심판이 선고됩니다. 다시 봅니다. 말 4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 육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끝장이 났습니다. 잘 아는 대로 구약시대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끝납니다. 그런데 2절 “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그 의로운 해로 누가 오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즉 말라기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지막 선지자로 온 세례 요한이 선포합니다. 마 3 : 11 - 12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아멘!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리고 진리가 없는 쭉정이를 불에 태우십니다. 그러면 이 불이 의미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찬송가를 부릅니다. “정욕과 죄악에 물든 맘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사 정결케 합소서 태우소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구찬송가 178장) 무엇으로 태웁니까? 화산불로? 폭탄불로? 아닙니다. 그런 불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길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던지려고 하셨던 불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리고 그 백성이 듣지 않으려 했던 그 말씀이 곧 나중에 심판의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요 12 :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우리가 심판이라고 하면 자꾸 육적인 심판을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에게 무엇을 주기 위하여 기록하였다고요?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한 세기 살다가 죽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마 10 :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몸(육) 때문에 흔들리지 말라 하시지요.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자꾸 육을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진노케 만듭니다. 하나님이 참다가 진노를 발하십니다. 결국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누가 하나님을 격동하였습니까? 이방인입니까? 이방인은 상대도 하지 않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잘 아는 대로 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동시킨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애굽 병사들이 쫓아와서 그랬습니까? 아니면 가나안 족속들이 와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날도 누가 하나님을 격동하겠습니까?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사람은 이방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누구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인들, 우리 자신입니다. 이방인은 어차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오지 않는 한은 하나님은 관여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당신 백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 그렇게 경고를 해줘도 딴 짓을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자꾸 육으로 듣고 육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짜증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시 벧후 3 : 10 - 13절을 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는 분명히 예언입니다.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고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루어질 날이 옵니다. 그런데 과연 지구가 폭발하고 산산조각이 나서 날아가 버리고 새 하늘 새 땅, 새 별이라도 나타난다는 것입니까?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육으로 풀면 하나님 뜻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 : 53) 말씀하시니까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뭐라 하셨지요?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우리가 똑같은 잘못을 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이 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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