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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3590]李白5율-왕우군(王右軍)
右軍本清真, 瀟洒在風塵.
우군은 본시 清真하여 거리낌 없이 속세에 있네.
▶ 淸眞(청진) : 도가(道家)의 상용어로 청정하고 진실한 본성.
속악(俗惡)한 형식이나 예법(禮法)을 초월한
天眞하고 깨끗한 성격을 말한다.
▶ 瀟洒(소쇄) : 깨끗하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모양.
쇄(洒)는 쇄(灑)로도 쓴다.
▶ 風塵(풍진) : 俗世·塵世.
山陰遇羽客, 愛此好鵝賓.
산음 땅에서 도사를 만나니, 이 거위를 좋아하는 손을 좋아하였다네.
▶ 山陰(산음) : 회계군(會稽郡)에 있는 현(縣) 이름.
왕희지는 그 지방의 지방장관인 내사(內史)를 지냈으며,
영화(永和) 9년(353) 3월 3일엔 그곳 蘭亭에서
곡수류상(曲水流觴)의 宴을 베풀고 유명한 <蘭亭集序>를 지었다.
지금의 浙江省 紹興府 땅이며,
회계산의 북쪽에 있다 하여 산음이라 불렀다.
▶ 羽客(우객) : 도사들은 새 깃으로 만든 羽衣를 입었기 때문에
‘우인(羽人)’ 또는 ‘우객(羽客)'이라 불렀다. 도사들이 우의를
입음은 본시 ‘우화등선(羽化登仙)'함에서 취한 것이다.
▶ 鵝(아) : 거위. 호아빈(好鵝賓)은 왕희지를 가리킨다.
掃素寫道經, 筆精妙入神.
흰 비단을 쓸고 도덕경을 베끼니, 필법이 정묘하여 신이 든 듯하여라.
▶ 掃素(소소) : 글씨를 쓰기 전에 글씨 쓸 비단을
손으로 쓸어 잘 펴는 것.
▶ 道經(도경) : 老子의 《道德經》.
《도덕경》은 상하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을 《道經》,
하권을 《德經》이라 구별한다. 그러나 여기의 《도경》은
《晉書》 本傳대로 《도덕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봄이 옳겠다.
▶ 筆(필) : 필법·필력.
▶ 精(정) : 정교(精巧)ㆍ정진(精進)의 뜻.
▶ 妙入神(묘입신) : 묘하기가 신(神)이 든 것 같다.
사람의 솜씨 같지 않다는 말.
書罷籠鵝去, 何曾別主人?
쓰기를 마치자 거위를 채롱에 넣어가지고
주인에겐 작별도 없이 떠났다네.
▶ 籠(롱) : 바구니, 바구니에 담다.
▶ 何曾別主人(하증별주인) : ‘어찌 일찍이 주인에게 작별 인사
따위를 하였겠느냐?’ 곧 작별 인사도 없이 훌훌 털고 떠나버렸다는 뜻.
해설
북제(北齊)의 안지추는 〈顔氏家訓〉에서 왕희지(王羲之)를
‘풍류의 才士, 蕭散한 名人'이라 평하고 있다.
소산은 瀟洒와 비슷한 뜻이다.
왕희지는 〈蘭亭集序〉에 보이는 것처럼 글과 글씨로써
개성적인 풍류를 남긴 사람이다. 이백(李白)의 방달(放達)한
성격으로 왕희지의 재주와 멋을 좋아하였을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출처: https://koahn.tistory.com/entry/2五言古風短篇-26王右軍왕우군 [耽古樓:티스토리]
왕우군(王右軍)
이백(李白·701∼762)
右軍本淸眞(우군본청진)하니
瀟洒在風塵(소쇄재풍진)이라.
山陰遇羽客(산음우우객)하니
愛此好鵝賓(애차호아빈)이라.
掃素寫道經(소소사도경)하니
筆精妙入神(필정묘입신)이라.
書罷籠鵝去(서파농아거)하니
何曾別主人(하증별주인)고?
우군은 본시 청진한 분이어서
거리낌 없이 속세에 있네.
산음 땅에서 도사를 만나니
이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을 좋아하였다네.
흰 비단을 쓸고 도덕경을 베끼니
필법이 정묘하여 신이 든 듯하여라.
쓰기를 마치자 거위를 채롱에 넣어가지고
주인에게 작별도 없이 떠났다네.
우군은 본시 맑고 진실하여
속세에 있으면서 때묻지 않았네
산음 땅에서 도사를 만나니
도사는 첫눈에 거위를 팔라하는 우군을 좋아하게 되었네
흰 비단을 펴 도덕경을 베껴 쓰니
신묘한 필법 마치 입신의 경지에 든 듯 했네
글씨 다 쓰고 거위를 조롱에 넣고 가니
어찌 일찍이 주인과 작별인사인들 했겠는가.
왕희지王羲之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만고의 명필 왕희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왕희지는 동진東晉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해서와
행서, 초서 등의 서체를 완성하여 書聖이라 불린 서예가이다.
왕희지로 인하여 글씨는 단순한 기록의 수단이 아닌 예술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귀족 문화가 꽃피었던 동진시대에
우아하면서 세련된 그러면서도 힘이 내재된 아름다운 서체가
왕희지에 의해 창조되었던 것이다. 왕희지는 자신의 서체를 완성시키는데 있어
거위가 헤엄치는 유연한 몸놀림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거위를 사랑한 왕희지는 좋은 거위를 얻으려 애썼는데,
한 도사에게서 거위를 얻어오려고 도교의 경전을 친히 써준 고사가 유명하다.
이 고사를 그린 그림이 왕희지가 글씨를 써 주고 거위와 바꾸었다는
‘왕희지환아도王羲之換鵝圖’이다.
동진의 명문 귀족 왕희지
왕희지王羲之(307~365)는 낭야琅琊(오늘날의 산동성 임기현) 출신으로
자는 일소逸少이며, 동진 원제元帝(司馬睿, 317~322년 재위)시기
우군장군右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 등의 관직을 지냈다.
우군장군을 지냈기 때문에 왕우군王右軍이라고도 불리었다.
그의 부친인 왕광王曠은 회남태수淮南太守를 지냈고,
숙부인 왕도王導는 동진이 부흥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일등공신이었다.
또 다른 숙부인 왕돈王敦 역시 군권을 장악하고 큰 세력을 형성하여,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함께 한다(王與馬 共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진시대에 낭야 왕씨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진서晉書』 권98).
이렇듯 귀족 명문가 집안에서 출생한 왕희지는 관직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지만 동진의 귀족 사회에서 지도적 지위를 누렸으며,
특히 성품이 맑고 고아하며 기품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이다.
난정蘭亭에서의 아취雅趣 있는 모임
왕희지의 고아한 성품과 아취 있는 삶을 대표하는 것이
난정에서의 모임이 아닐까. 353년(영화永和 9) 3월 3일에
왕희지를 비롯한 동진의 명사들 41명은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다.
(참고1) 참석자들 중에는 동진의 유명한 시인 사안謝安도 있었다.
이 때 참석자들이 지었던 시를 모아 시집을 엮으면서 왕희지가
서문序文을 짓고 그 글씨를 손수 썼으니 이것이 <난정서蘭亭序>이다.
이 난정의 모임은 이후 천년 넘게 인구에 회자되며 청아하고 고상한
문인들의 모임의 전범이 되었고, 왕희지가 쓴 <난정서>는
서예사에 길이 남는 명작이 되었다.
왕희지의 거위 사랑
왕희지는 거위를 무척 좋아하였다.
어느 날 회계의 한 노부인이 거위를 기르는데 그 우는 소리가 좋다고
하여 찾아갔다. 그런데 왕희지가 온다는 소문을 들은 노부인은
거위를 잡아서 삶아 놓고 그를 기다렸다. 왕희지는 크게 실망하여
탄식하였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산음의 한 도사道士가 좋은 거위를
여러 마리 기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는데 과연 좋았다.
꼭 사고 싶다고 하자 도사는 《도덕경》을 써주면 거위를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왕희지가 흔쾌히 써주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조롱에 거위를 넣어
신이 나서 집에 왔다고 한다. 이 내용은 동진의 역사책인 《진서晉書》
열전列傳 ‘왕희지전’에 수록되어 있지만(『진서晉書』 권80),
아무래도 왕희지의 거위 사랑에 얽힌 고사가 널리 알려진 것은
당나라의 대표적 시인 이백李白의 <왕우군王右軍>이라는 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右軍本淸眞 왕희지는 타고난 본성이 청진하여
瀟灑出風塵 맑고 깨끗한 성정이 속세를 벗어났다네.
山陰遇羽客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니
要此好鵝賓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 맞이하였네.
掃素寫道經 흰 비단에 도덕경을 쓰니
筆精妙入神 필법이 정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었네.
書罷籠鵝去 글씨 다 쓰고 거위를 조롱에 넣고 가니
何曾別主人 어찌 일찍이 주인과 작별인사인들 했겠는가.
이백이 왕희지의 고사를 인용한 시가 한 편이 더 있는데,
하지장賀知章을 송별한시,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이다.
하지장은 태자빈객을 지낸 시인으로 이백의 시적 재능에 탄복하여
그를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謫仙’이라고 일컬었던 장본인이다.
다음은 수도 장안에서 고향 월주越州로 떠나는 그를 송별하며
이백이 지은 시이다.
鏡湖淸水漾淸波 경호의 맑은 물결 일렁이는데
狂客歸舟逸興多 광객이 배타고 돌아가니 고상한 흥취 많구나.
山陰道士如相見 만일 산음의 도사를 만난다면
應寫黃庭換白鵝 응당 황정경 써주고 흰 거위와 바꾸리
漾=출렁거릴양.換=바꿀환.鵝=거위아.
시詩와 술로 교유하는 막역한 사이였던 하지장을 남쪽 회계 지방으로
떠나보내며 이백은 왕희지의 고사를 떠올렸고, 그래서 ‘산음의 도사를 만난다면 …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흰 거위와 바꾸리’라고 노래하였는데,
이는 하지장이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던 서예가이고,
도교에 심취해 도사道士가 되고자 했던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하지장을 노래한 이 시로 인하여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왕희지가 거위를 얻으려고 도사에게 써 주었던 것이
『황정경』이라고 오인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경전을 써주고 거위와 바꾸다
서성書聖 왕희지를 숭앙하다
문치를 표방한 조선시대에 시詩와 서書는 문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교양이었다. 글씨를 다만 기록의 수단이 아닌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왕희지는 해서와 행서, 초서를 완성하며 서성書聖으로 숭앙되었고,
그의 서법은 문인들이 본받고자 한 궁극의 전범이었다. 왕희지의 거위 사랑은
그의 고아하고 진솔한 인품과 맞물려 문인들이 공유하고픈 멋과 풍류로
천수백년을 회자되었던 것이다.
글 : 유미나(원광대학교 교수)
왕우군(王右軍)
이백(李白·701∼762)
右軍本淸眞, 우군본청진,
瀟灑出風塵. 소쇄출풍진.
山陰遇羽客, 산음우우객,
愛此好鵝賓. 애차호아빈.
掃素寫道經, 소소사도경,
筆精妙入神. 필정묘입신.
書罷籠鵝去, 서파롱아거,
何曾別主人. 하증별주인.
우군은 본시 맑고 진실하여
속세에 있으면서 때묻지 않았네
산음 땅에서 도사를 만나니
도사는 첫눈에 거위를 팔라하는 우군을 좋아하게 되었네
흰 비단을 펴 도덕경을 베껴 쓰니
신묘한 필법 마치 입신의 경지에 든 듯 했네
글씨 다 쓰고 거위를 조롱에 넣고 가니
어찌 일찍이 주인과 작별인사인들 했겠는가.
왕희지王羲之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만고의 명필 왕희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왕희지는 동진東晉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해서와
행서, 초서 등의 서체를 완성하여 書聖이라 불린 서예가이다.
왕희지로 인하여 글씨는 단순한 기록의 수단이 아닌 예술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귀족 문화가 꽃피었던 동진시대에
우아하면서 세련된 그러면서도 힘이 내재된 아름다운 서체가
왕희지에 의해 창조되었던 것이다. 왕희지는 자신의 서체를 완성시키는데 있어
거위가 헤엄치는 유연한 몸놀림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거위를 사랑한 왕희지는 좋은 거위를 얻으려 애썼는데,
한 도사에게서 거위를 얻어오려고 도교의 경전을 친히 써준 고사가 유명하다.
이 고사를 그린 그림이 왕희지가 글씨를 써 주고 거위와 바꾸었다는
‘왕희지환아도王羲之換鵝圖’이다.
동진의 명문 귀족 왕희지
왕희지王羲之(307~365)는 낭야琅琊(오늘날의 산동성 임기현) 출신으로
자는 일소逸少이며, 동진 원제元帝(司馬睿, 317~322년 재위)시기
우군장군右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 등의 관직을 지냈다.
우군장군을 지냈기 때문에 왕우군王右軍이라고도 불리었다.
그의 부친인 왕광王曠은 회남태수淮南太守를 지냈고,
숙부인 왕도王導는 동진이 부흥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일등공신이었다.
또 다른 숙부인 왕돈王敦 역시 군권을 장악하고 큰 세력을 형성하여,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함께 한다(王與馬 共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진시대에 낭야 왕씨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진서晉書』 권98).
이렇듯 귀족 명문가 집안에서 출생한 왕희지는 관직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지만 동진의 귀족 사회에서 지도적 지위를 누렸으며,
특히 성품이 맑고 고아하며 기품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이다.
난정蘭亭에서의 아취雅趣 있는 모임
왕희지의 고아한 성품과 아취 있는 삶을 대표하는 것이
난정에서의 모임이 아닐까. 353년(영화永和 9) 3월 3일에
왕희지를 비롯한 동진의 명사들 41명은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다.
(참고1) 참석자들 중에는 동진의 유명한 시인 사안謝安도 있었다.
이 때 참석자들이 지었던 시를 모아 시집을 엮으면서 왕희지가
서문序文을 짓고 그 글씨를 손수 썼으니 이것이 <난정서蘭亭序>이다.
이 난정의 모임은 이후 천년 넘게 인구에 회자되며 청아하고 고상한
문인들의 모임의 전범이 되었고, 왕희지가 쓴 <난정서>는
서예사에 길이 남는 명작이 되었다.
왕희지의 거위 사랑
왕희지는 거위를 무척 좋아하였다.
어느 날 회계의 한 노부인이 거위를 기르는데 그 우는 소리가 좋다고
하여 찾아갔다. 그런데 왕희지가 온다는 소문을 들은 노부인은
거위를 잡아서 삶아 놓고 그를 기다렸다. 왕희지는 크게 실망하여
탄식하였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산음의 한 도사道士가 좋은 거위를
여러 마리 기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는데 과연 좋았다.
꼭 사고 싶다고 하자 도사는 《도덕경》을 써주면 거위를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왕희지가 흔쾌히 써주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조롱에 거위를 넣어
신이 나서 집에 왔다고 한다. 이 내용은 동진의 역사책인 《진서晉書》
열전列傳 ‘왕희지전’에 수록되어 있지만(『진서晉書』 권80),
아무래도 왕희지의 거위 사랑에 얽힌 고사가 널리 알려진 것은
당나라의 대표적 시인 이백李白의 <왕우군王右軍>이라는 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右軍本淸眞 왕희지는 타고난 본성이 청진하여
瀟灑出風塵 맑고 깨끗한 성정이 속세를 벗어났다네.
山陰遇羽客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니
要此好鵝賓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 맞이하였네.
掃素寫道經 흰 비단에 도덕경을 쓰니
筆精妙入神 필법이 정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었네.
書罷籠鵝去 글씨 다 쓰고 거위를 조롱에 넣고 가니
何曾別主人 어찌 일찍이 주인과 작별인사인들 했겠는가.
이백이 왕희지의 고사를 인용한 시가 한 편이 더 있는데,
하지장賀知章을 송별한시,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이다.
하지장은 태자빈객을 지낸 시인으로 이백의 시적 재능에 탄복하여
그를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謫仙’이라고 일컬었던 장본인이다.
다음은 수도 장안에서 고향 월주越州로 떠나는 그를 송별하며
이백이 지은 시이다.
鏡湖淸水漾淸波 경호의 맑은 물결 일렁이는데
狂客歸舟逸興多 광객이 배타고 돌아가니 고상한 흥취 많구나.
山陰道士如相見 만일 산음의 도사를 만난다면
應寫黃庭換白鵝 응당 황정경 써주고 흰 거위와 바꾸리
漾=출렁거릴양.換=바꿀환.鵝=거위아.
이하 동아일보=입력 2022-03-04 03:00
명필 왕희지[이준식의 한시 한 수]〈150〉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왕우군은 원래 맑고 진솔한 사람,
속세를 벗어난 듯 소탈하고 대범했지.
산음 땅에서 만난 어느 도사가,
거위 좋아하는 이분을 몹시도 반겨주었지.
흰 비단에 일필휘지 ‘도덕경’을 써내려가니,
정교하고 오묘한 그 필체는 입신의 경지.
글씨 써주고 얻은 거위를 조롱에 담아 떠날 때,
주인과는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했지.
右軍本淸眞, 瀟灑出風塵.
山陰遇羽客, 愛此好鵝賓.
掃素寫道經, 筆精妙入神.
書罷籠鵝去, 何曾別主人.
―‘왕우군(王右軍)’·이백(李白·701∼762)
왕우군은 곧 왕희지(王羲之),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과거시험 치를 때
‘왕희지 필법으로 조맹부체를 받아 일필휘지’했다고 묘사한 그 명필이다.
생전의 직함 우군장군(右軍將軍)에서 따온 호칭이다.
그는 거위를 무척 좋아했는데 희고 깨끗한 깃털을 고결한 선비의 표상으로
여겼다고도 하고, 또 거위의 몸놀림에서 서예의 운필(運筆) 기교를
익힐 수 있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왕희지는 한 도사가 거위를 기른다는 소릴 듣고 그걸 사려고 찾아갔다.
도사가 ‘도덕경’을 써주면 거위를 거저 주겠노라고 하자 그는 흔쾌히 응했다.
거위를 얻은 그의 달뜬 마음을 시인은 ‘주인과는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떴으리라 상상한다.
왕희지의 이 거위 사랑은 정사인 ‘진서(晉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백의 시가 나오면서 더 널리 알려졌다. 이 글씨를 두고 시인은
‘정교하고 오묘한 그 필체는 입신의 경지’라 극찬할 만큼
성(書聖) 왕희지에 매료된 듯하다.
왕희지가 머물던 곳곳에 이른바 ‘묵지’(墨池·먹물 빛 연못)가 전설처럼 남아 있다.
서예를 연마하면서 붓과 벼루를 씻느라 못물이 시커멓게 변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수백 년 후 당 류언사(劉言史)는 ‘지금도 못물엔 남은 먹물이 배어 있어,
여느 샘물과는 빛깔이 다르다네’라 과장하기도 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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