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 ` Corea→Korea ’로 바뀐 이유
‘꼬레아, 코리아’ 펴낸 오인동 박사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은 국경 안에서만 유효하다. 1970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뒤 38년 동안 ‘코리아’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해 온 오인동(69·사진) 박사에게 서양에서 부른 우리 국호의 역사를 탐구하는 일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지난 6년 동안 국호 변천사를 연구한 결과를 담은 <꼬레아, 코리아>(책과함께·1만3000원)를 최근 펴냈다.
오 박사는 정식으로 역사를 전공한 학자는 아니다. 국내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의대 조교수, 매사추세츠공대(MIT) 생체공학 강사로 활동한 뒤 현재 로스앤젤레스 인공관절연구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줄곧 의학도의 길을 걷던 그가 로마자 국호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2년 북한을 방문하고 부터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와 사실 한국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항상 간접적으로 한국 소식을 접해왔고요.
한미의사회 대표단 자격으로 북한을 다녀오면서 분단과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분단이라는 현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를 절감했고,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의사로서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마침 인공관절 연구, 환자 치료, 후진 양성의 삼박자를 맞추며 빈틈없이 굴러가던 일상에도 여유가 생겼다. 90년대 중반부터 인공고관절 실험 연구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새로 발견한 공부거리에 매달렸다.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자연스레 국호 연구로 흘러갔습니다. 남이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연구를 하고 싶었어요. 통일을 바라보며 한 발짝 미리 연구한다는 기분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한반도를 아우를 수 있는 국호를 제안하고 싶었지요.”
그는 연구 끝에 통일된 국가의 호칭을 고려와 맞닿아 있는 ‘코리아’로 하자는 자기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러다 2002년 월드컵 때 서울 한복판에 울려 퍼진 ‘오~ 필승 꼬레아(Corea)’를 보며 연구 방향을 새롭게 바로잡았다. ‘코리아(Korea)’의 역사적인 어원을 제대로 알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2002년 가을께부터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와 남캘리포니아대학교(USC) 등 인근 대학의 한국학연구소를 들락거리고 한국인 사서와 도서관장과 교류하며 ‘코리아’의 역사적 어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고문헌과 고지도를 뒤적거리면서 그는 “미치도록 재미있었다”고 한다.
“파고 들다 보니 너무 재미났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보들이 줄줄이 캐어져 나왔어요. 서양인들이 우리나라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한 로마자에는 각 나라와 각 시대의 정치, 국제 관계, 언어 등 복잡한 요소들이 투영돼 있어요. 우리나라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서양의 선교사, 탐험가, 정치가, 군인들의 숨결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그의 책은 13세기 서양에서 최초로 고려를 로마자로 표기한 기록부터 샅샅이 훑어나간다. 로마 교황의 서한을 전달하러 몽골 제국을 방문했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카르피니가 ‘Solanges’의 왕자를 만났다고 기록한 게 최초다. ‘Solanges’는 몽골어로 고려 또는 고려 사람을 뜻한다. 이렇듯 몽골 제국을 통해 우리나라의 로마자 표기가 등장한 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고려의 중국식 발음인 ‘Cauli’가 등장한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로마자 이름을 붙여 부르고 쓰기 시작했다. ‘Coree’, ‘Core’, ‘Coray’, ‘Corea’, ‘Chausien’, ‘Cauly’ 등 저마다 발음대로 표기해 다양한 로마자 국호들이 난립한다. 1590년께 출판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스탈디-작자 불명의 세계지도에서 최초로 ‘꼬레아(Corea)’라고 표기된 기록을 발견하고서 그는 벅찬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 17~18세기부터 ‘Corea’가 주된 표기로 떠오르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Corea’로 통일됐다가, 19세기 말부터 ‘Korea’가 득세하기 시작한다.
책 마지막에는 1246~1889년 사이 서양 문헌과 지도에 나오는 우리나라 이름의 연혁이 표로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그는 이 표가 “귀중한 자료”라고 거듭 강조한다. 세 쪽에 못 미치는 이 연표를 만드는 데 6년이 걸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