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그녀는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거의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그러기를 일 년여, 오늘에서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거다.
약속장소인 백화점 정문 앞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저쪽에서 그녀가 걸어오다가 나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든다. 짙은 감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모습이 한눈에 보아도 많이 여위었다. 나도 모르게 울컥해진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숨기는데 그녀가 묻는다.
“눈이 왜 그래?”
“응,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봐. 자꾸 시큰거리네.”
나는 얼른 얼버무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점심을 먹고 찻집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말했다.
“난 요즘 어디 가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아. 지난번에 마트에 갔는데 어떤 여자가 말도 안 되는 일로 시비를 거는 거야. 예전 같았으면 옳고 그른 걸 가리고 바른 말을 했을 텐데 그냥 관뒀어. 남편이 죽고 나니까 다툴 일이 생기면 ‘내 편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 그런 생각부터 들고 기가 죽어.”
그녀의 말에 나는 그만 눈이 젖어 심정을 들키고 말았다. 체구는 여려도 평소에 야무지고 자기주장이 뚜렷했던 그녀가 자기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기가 죽다니, 가슴 한가운데로 알싸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그녀에게 남편은 험한 세상에서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데기였던 게다.
예전에 울릉도에 갔을 때 우데기를 본 적이 있다. 우데기는 가옥의 바깥에 둘러친, 일종의 외벽이다. 처마 끝에서부터 땅으로 이어져 담처럼 둘러쳐져 있어 눈보라가 몰아쳐도 활동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어주며 집의 몸체를 보호해주는 구실을 한다. 우데기는 감싸고 막아주는 힘이다.
내게도 남편은 우데기이다. 그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부재경험을 톡톡히 했다. 평소 우렁우렁하던 목소리가 순한 아이처럼 작아지고 병든 병아리처럼 기운을 잃은 모습을 보기가 딱한 건 물론, 그런 남편을 병실에 두고 혼자 집에 오는 저녁이면 현관문 열기가 두려웠다. 분신처럼 늘 함께하던 남편의 숨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건 부재증명과도 같았다. 한여름이었지만 남편 없는 거실에 서있는 마음은 우데기 없는 집처럼 추웠다. 그의 코고는 소리, 바튼 기침소리는 바로 존재증명이었다.
젊은 시절엔 갈등도 없지 않았다.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외딴집처럼, 첩첩산중 두멧골에 있는 오두막집처럼, 내가 지은 내 안의 집에 홀로 거처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집짓기와 허물기를 반복하는 동안 어느새 그는 내게, 나는 그에게 우데기가 되어갔다. 그렇기에 남편의 갑작스러운 입원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게 긴 물음표를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둘 중 누구든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야하는 게 기정사실이라면, 어느 날 내게서 갑자기 우데기가 거둬진다면, 그때 닥쳐올 마음의 추위를 어떻게 견뎌내야 할 것인가. 이 지독한 의존감에서 벗어나 어떻게 홀로서기를 익혀가야 할 것인가, 나는 밤새 뒤척였다.
이제 내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내 벗의 남편은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곳에 육신을 묻고 있다. 그녀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는지 가늠조차 어렵다.
생각해보면 이날까지 우데기의 힘으로 살아왔다. 어려서는 부모님이, 결혼해서는 남편이 우데기였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지만 이제 더 늙어지면 내 아이들이 우데기가 되어줄 것이다. 고리타분해 보이는 삼종지도는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우데기의 원리와도 만난다. 뒤집어 보면 남자들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남편 대신 아내가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가족을 넘어 좀 더 시야를 넓히면 우데기는 많다. 나에게 좋은 벗이 되어주는 사람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몫을 다하며 우리의 의식주를 책임져주는 농상공인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 많고도 많은 그들이 있어 세상은 온기를 유지하고 삶의 틀을 지탱하는 힘을 얻는다. 길거리의 청소부를 볼 때, 연평해전의 용사들을 영화로 만났을 때, 저 먼 아프리카 수단에서 병든 이와 가난한 이들을 돕던 이태석 신부님이 선종했을 때, 나는 우데기를 생각했다. 고속도로에서 화염에 싸인 관광버스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승객들을 구한 윤리 선생님, 그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의인으로 포장돼 학교에 누를 끼쳐 죄송하다’며 인터뷰도 상금도 거절했다. 우리의 진정한 우데기이다.
우데기는 세상을 지키는 힘이다. 사람도 자연도, 만물은 서로 도우며 우데기가 된다. 아침이면 온 누리를 깨우는 햇살, 땅에 뿌리박고 지상의 숨결을 터주는 나무들, 그 뿌리를 품으며 숲과 날짐승과 들짐승을 키우는 대지, 드넓은 산과 들을 휘돌아 감으며 생명의 물길을 트는 강줄기, 어족과 해초를 키우는 바다, 모두가 우리의 우데기들이다. 거대한 우데기, 이 우주가 있어 티끌 같은 존재들이 생명을 얻고 살아가고, 우주는 또한 그 생명들로 충만해진다.
오늘,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골절사고를 크게 당해 한 달간이나 입원했다가 퇴원 후 통원치료를 받는 그녀의 안부가 걱정되어서다. 일전에 ‘남편이 없어서 슬프다’고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려고 길거리에서 혼자 목발을 짚고 택시를 잡을 때면 남편의 부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했다. 결혼해서 따로 사는 자녀들이 잘하지만 각자 생활이 있으니 곁에서 지켜주는 남편의 손길에 비하면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전에 비해 목소리가 조금 밝아진 것 같아 다소나마 마음이 놓인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스스로의 우데기가 되어 세상풍우와 한파를 꿋꿋이 견뎌나갈 것이다. 나는 또한 그녀를 응원할 것이다. 그녀가 내게 그러했듯, 서로 우데기처럼.
(민명자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