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학은 고려 말에 주자의 저술이 수입되면서 신속히 발전하여 이미 새로운 사상조류로서 사회변혁의 이론적 뒷받침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고려 말-조선 초의 왕조변혁기에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이며, 이 때부터 도학은 조선사회의 결정적인 사회통치이념으로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사회에서 도학의 주도적 역할은 조선왕조의 성격을 결정하는 기본요인이 되고 있으며, 사회 구석구석의 부분에까지 도학이념이 스며들어 갔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예법 · 풍속 · 예술 · 교육의 문화적 영역에서나 사회제도 · 국가제도 · 법령의 제도문제 및 법률의 시행정신이나 사회정의와 가치관의 신념 문제 등 사회통치의 모든 방법에서 문화와 정치 · 경제 · 사회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도학의 지배를 받고 있다. 또한 도학이 갖고 있는 정통주의 정신은 도학이념 속에 매우 강력한 자기 방어와 옹호의 수단을 발전시키게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도학은 조선사회에서 자기 기능을 최대한 발전시켰던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자기 정당성에 대한 옹호가 너무 지나치게 강화된 나머지 조선 후기에 가면서 자기 변혁의 태도에서는 상당히 소홀하고 권위주의화되는 폐단을 낳았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 도학의 학문적 심화는 지속되었지만 사회적 영향력에서는 상당히 쇠퇴하였던 것이 뚜렷한 현상이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 도학의 현실적응력이 쇠퇴함에 따라 새로운 학풍이 사회에 발생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 때 일어난 새로운 학풍은 도학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 시대사조로서 왕양명의 ‘심학’과 조선 후기 ‘실학’의 성장이다. ‘심학’과 ‘실학’이 등장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사상적 환경은 학풍이 다양화되고 활력을 지닌 것이었지만, 도학은 조선시대 전체를 걸쳐서 국가의 정통이념의 원리로서 지배적인 권위를 지켜 왔다. 이러한 도학이 우리 사회에 갖고 있는 의미와 조선시대 도학을 비롯한 유학사상 전반에서 쟁점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유교사상의 성격을 해명하도록 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