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혐오와 의심이 있을 뿐 다른 어떤 증거도 증인도 없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인종차별이고 선입관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집단으로 발생하면 그 어떤 증거보다도 무섭습니다. 일방적으로 몰고 갑니다. 합리적인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더불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차별도 세계적으로 번져 있습니다. 특히 20년 전 9.11테러 사건 후 전 세계적으로 은밀하게 내재되어 왔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좀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조차 차별과 선입관은 존재합니다. 특히 지방색이 두드러집니다. 각 나라마다 다 있을 것입니다. 자기들끼리도 차별합니다. 하물며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라면 그 마음의 거리는 더 멀어집니다. 물론 그것도 개인적인 차이는 있게 마련입니다. 유난을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루기 매우 힘들지요.
19세기도 아니고 20세기를 지나 21세기가 되었음에도 편견과 차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란 굴레 안에서 살면 그럴 수밖에 없는가 싶기도 합니다. 개인이 극단적으로 나가도 때로는 큰 사고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발생하면 법이란 치장을 하면서 개인의 삶을 철저히 부술 수 있습니다. 국가 권력까지 등에 지고 있으니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보안 처리합니다. 그 속에서 개인은 사람으로 다뤄지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알려고 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세계적 명성을 지니고 있기에 어느 순간 밖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인권운동가 변호사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수년이 지나도록 기소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감옥 생활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일이 민주국가라는 이름의 나라에서 벌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래서 맡기로 합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누가 그렇게 방치하도록 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그리고 관타나모 수용소로 향합니다. 죄수(?) 아직 재판도 받지 않았는데, 유죄 판결도 받지 않았는데 죄수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진작부터 죄수입니다. ‘살라히’는 6년 전 바다 건너 저 멀리 고향에서 붙잡혀 어디로 끌려 다니다 관타나모까지 왔습니다. 사실 어디인지도 몰랐지요. 우연히 바깥을 내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무슨 안내판에서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정부는 어서 유죄 판결을 만들도록 검찰을 종용합니다. 그래서 군 검찰이 맡아 조사합니다. 검찰은 검찰대로 변호사는 변호사대로 허락을 받고 그 동안의 조사 문서들을 어렵게 열람합니다. 9.11테러 조직의 강력한 혐의자입니다. 당시 빈 라덴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이 증거입니다. 살라히의 사촌이 어떻게 사용해서 연락을 해온 것이지요. 온 세계가 주목하고 있던 테러집단의 우두머리의 전화를 사용해서 연락한 그것을 살라히가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통화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증거도 필요 없습니다. 소위 혐의와 연관성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각본은 이미 짜져 있습니다. 이제 자백만 받으면 됩니다. 그러니 온갖 고문이 동원됩니다. 그렇게 해서 작성되었습니다.
왜 미국 관할의 감옥인데 남의 나라에 만들었을까요? 마땅히 미국 땅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런 곳에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안에 누가 수감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사자의 가족들은 속만 태우며 지내겠지요.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하기는 그 안에서 도저히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봤자 그 안에 비밀 서류에나 기록되어 있을 뿐 그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변호사 ‘낸시’도 살라히의 자백서를 보고는 가슴이 철렁합니다. 살라히가 말합니다. 그것을 믿느냐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모릅니다.
군 검찰로 담당했던 ‘스투’ 중령도 조사하다 스스로 놀랍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법적으로도, 자신의 신앙 양심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소하지 않기로 하고 그 자리를 물러섭니다. 상관이 ‘반역자’라고 소리칩니다. 글쎄 , 법치를 지키려는 양심적 검찰관이 반역자인지, 인간 양심을 버리고라도 권력에 의지하여 생사람 잡는 자가 애국자인지, 우리 자신 얼마나 편협한 인간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안에서 지난 반세기 일어난 일들을 되돌아보면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마음이 찡해집니다. 그래도 미국이란 나라에서 일어났기에 법이란 테두리로 문제를 이끌고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살라히의 ‘관타나모 다이어리’가 책으로 출판되어 먼저 알려졌습니다.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하기야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은 고문들을 감내하며 생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를 그렇게도 무섭게 다루었던 사람들에 대하여 원망 불평 하나 없이 다 용서하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감동과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능한 일인가요? 아랍어의 ‘자유’는 ‘용서’라는 뜻과 같이 사용된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과연 용서가 없이 어찌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영화 ‘모리타니안’(The Mauritanian)을 보았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