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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진리의증인
메시지242(마태64) 새 술은 새 부대에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작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태복음 9:14-17)
서론: 어느 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본문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을 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본문과 병행구절인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들이 질문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누가복음 5:33).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조종을 받아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고......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술은 목적이고 부대는 수단입니다. 생베와 새 술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진리를 상징하며 낡은 옷과 낡은 부대는 유대인들이 고집하는 규례와 전통과 율법주의를 상징합니다. 사상과 의식의 전환이 없이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변화와 시대의 흐름에 대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는 “새 술은 새 부대에”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해서는 잘못된 관습과 그릇된 전통을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정당한 규례나 아무리 오래된 관습과 전통도 성경 말씀에 어긋나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만이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생활의 삼대 실천율로 자선(慈善)과 기도(祈禱)와 금식(禁食)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금식을 강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금식이 1년에 하루, 대속죄일인 7월 10일 하루만 금식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레위기 16:29). 그러나 유대인들은 수많은 금식일을 만들어서 지켰습니다. 바리새인은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 한다.”고 자랑했습니다(누가복음 18:12). 경건한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간 목요일과 율법을 받고 시내 산에서 내려온 월요일을 금식일로 지켰습니다. 생명의 양식인 율법을 받은 날이 얼마나 복된 날입니까? 그런데 율법을 받은 복된 날에 왜 금식을 합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무엇이냐? 세례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관습과 전통으로 예수님께 금식을 강요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시며 율법을 제정하신 예수님께 금식을 강요하다니 얼마나 참람합니까? 인간은 관습의 동물입니다. 사람이 관습과 전통에 의식화되면 진리냐 비 진리냐에 상관없이 관습과 전통의 노예가 됩니다. 유대인들이 수많은 금식일을 지킨 것도 그들의 그릇된 관습과 전통에서 유래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위선자들과 이단종파들은 그들의 종교적 경건을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해 금식을 이용했습니다. 성경은 금식을 장려하지도 않고 금지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금식은 개인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하고 싶은 사람은 하도록 허락하고 있습니다. 또한 금식은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금식을 명령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식을 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고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신앙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많은 성도들이 금식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들은 금식하는 위선자들을 부러워했고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경건을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해 금식을 이용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들은 금식과 육체의 고행을 인간의 공로로 주장했습니다. 육체의 고행과 인간의 공로를 통해 죄를 속죄하고 잘못을 배상한다는 공로사상에서 금식이 행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고행이나 공로사상은 속죄나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4:12). 그러므로 구원의 조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율법이나 금식이나 행위를 주장하는 자들은 다 이단세력들입니다. 그릇된 전통과 관습이라는 낡은 부대에는 “예수 구원”이라는 새 술을 담을 수 없습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해서는 잘못된 관습과 그릇된 전통이라는 낡은 가죽 부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교회는 새로운 사상과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술이나 포도주를 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보관했습니다. 묵은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넣어도 상관없지만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발효가 덜 된 새 포도주에서 나오는 가스가 낡은 가죽 부대를 팽창시켜 부대를 터뜨리기 때문입니다. 새 부대는 가죽에 신축성이 있기 때문에 새 포도주에서 나오는 가스의 압력에도 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서 보관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된다는 말씀은 그릇된 관습과 그릇된 전통을 버리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지나온 기독교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나 신앙의 법과 기준은 성경이라는 데에 모든 사람이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적용하고 신앙의 목표를 성취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었습니다. 목적과 목표는 같지만 목표를 성취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주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신학논쟁으로 교파가 갈라지고 이단종파가 생기고 교회가 세속화의 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아무리 시대와 환경이 변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네서 구원받는다는 구원의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대상과 신앙의 목적과 구원의 방법은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방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해야 하고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사천 년 전 모세 시대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모세 율법과 구약의 전통을 믿는 사람입니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불변이지만 목적을 지향하고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 사상과 이념도 변하고 문화도 변하고 인간의 가치관도 변하고 모든 것이 다 변합니다. 오늘날 인간이 애완견과 반려동물에 열광하고 집착하는 것도 삶의 패턴이 변해서 그렇습니다. 가족이 해체되고 핵가족이 되니 외롭고 쓸쓸하고 마음을 둘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려동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부모나 형제나 이웃보다 강아지와 반려동물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치인과 연예인들은 여론을 의식해서 앞다퉈 애완동물에게 사랑과 충성의 포즈를 취하고 방송국에서는 시청률을 의식해서 경쟁적으로 애완동물 방송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현상은 아닙니다.
동성애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동성애는 선진국과 문화인이 즐기는 고상한 성행위가 아닙니다. 그런데 동성애가 무슨 자랑이라고 동성애자라고 밝힌 사람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고 동성애자가 방송에 나와서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하고 동성끼리 결혼을 해서 정상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까? 여자끼리 결혼하고 남자끼리 결혼해서 자손이 나오고 후세가 태어납니까? 동성애와 수간(獸姦)은 성적 타락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성경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의 천국이었습니다. 동성애의 천국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심판으로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쏟아져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동성애는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동성애의 위험과 심각성을 알려야 하는데 정치인과 언론은 선거와 시청률을 의식해서 애써 동성애의 심각성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문제인 정권이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것도 국민의 절대다수가 반대하는 동성애를 관철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는 나라와 민족을 말아먹는 반민족적 반국가적 범죄행위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또한 이슬람주의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집단입니까? 오늘날 전 세계를 전쟁과 테러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집단이 이슬람세력입니다. 이슬람이 들어간 나라와 민족 중에 전쟁이나 분쟁이나 테러가 일어나지 않은 나라와 민족이 있습니까? 이슬람은 종교가 아닙니다. 이슬람은 종교로 위장한 정치집단이며 이념집단입니다. 오늘날 유럽이 왜 이슬람세력의 테러에 벌벌 떨고 있습니까? 이슬람에 대한 대처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세력에 인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의 정체를 너무도 모르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라 사악한 이념집단이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슬람세력은 힘이 약할 때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활동하다가 힘이 주어지고 기회가 오면 벌떼처럼 일어나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자기들을 돌봐주고 후원한 나라와 민족에게 총을 겨눕니다.
그리고 이슬람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슬람이 그들의 경전으로 주장하는 코란(꾸란, 쿠란, 무함마드가 알라에게 받았다는 계시를 제자들이 집대성한 책)은 60퍼센트(%)가 구약에서 그리고 6-7퍼센트(%)가 신약에서 인용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기독교 이단들의 교리가 혼합돼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국가였던 비잔틴 제국은(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비잔틴이었음, 오늘날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이슬람을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슬람은 종교를 빙자하여 백성을 통치하는 이념집단입니다. 이슬람을 경계하지 않으면 나라와 민족이 멸망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2015년 3월 중동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은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킨다며 이슬람 관광객이 많이 올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슬람 기도처를 확장하며, 이슬람 음식인 할랄 식품단지를 조성해서 이슬람에 수출하고, 무슬림의 의료관광객을 유치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를 하고 나자 터키 종교청은 한국의 이슬람 중앙사원의 건립을 위해 350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고 우리 정부는 전북 익산에 49만 평의 할랄 식품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박근혜가 탄핵이 안 됐다면 나라까지 팔아먹을 뻔했습니다.
오늘날 티브이나(TV) 언론매체를 통해서 다문화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위정자들에게 호소합니다. 먼저 다문화 이주자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와 가치관을 갖도록 철저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온 세계가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의 지구촌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화 시대를 맞아 민족과 종교를 초월하여 많은 국제결혼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대한민국의 법과 전통을 지키고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제결혼이나 기타 사유로 대한민국으로 이주한 외국인이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와 가치관에 동화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미국과 유럽처럼 이슬람화되고 이슬람세력에 잡아먹히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슬람세력에 멸망해가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복지국가 유럽이 저출산과 고령화로 노동력이 부족하자 이슬람 국가의 값싼 노동력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유럽이 이슬람의 테러와 시위로 얼마나 혼란을 겪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유럽과 온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의 테러를 보면서도 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슬람을 받아들입니까?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23만 명입니다. 여기에다 취업을 목적으로 한국에 와서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사람까지 합치면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30-4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는 ‘2030 대담한 도전’이란 책에서(출판사 지식노마드) 2050년에는 한국의 무슬림 인구가 300-400만 명에 이르러 기독교인을 추월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정말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일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의 80%가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왜 이슬람으로 개종할까요? 목사들이 이슬람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를 하지 않고 이슬람의 정체에 대해 설교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정치인들이 선거를 의식해서 인권이니 종교의 자유니 하면서 이슬람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어 교회가 이슬람을 비판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역적들이 누구냐? 타락한 정치인과 타락한 언론입니다. 우리 정치인과 우리 국민과 우리 언론은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교회도 세상의 한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변화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흐름과 변화를 외면하는 것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처럼 쇠퇴와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변화의 파고를 넘지 못하면 사라지고 도태됩니다. 교회는 동성애와 이슬람세력을 앞장서서 막아야 합니다. 동성애와 이슬람을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치집단은 선거를 통해 추방해야 하고 동성애와 이슬람세력을 옹호하는 언론은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퇴출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슬람과 동성애의 심각성을 국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암세포처럼 은밀하게 번지는 이슬람과 동성애를 막지 못하면 나라와 민족이 멸망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해서는 잘못된 관습과 그릇된 전통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낡은 전통과 낡은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옛날의 낡은 사상에 집착하면 성장하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사상과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새로운 사상과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지혜로운 삶으로 신앙과 인생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