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식 하셨습니까? 지난 20세기 동안 정의(正義)의 대명사였던 마르크스의 빛이 바래던 곳에 여러 대타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 중에서도 국내파 양명학의 태두로서 하곡이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꽤 명성을 날렸다. 그것은 단재 신채호가 그의 ‘조선혁명선언’에서 일갈했듯이 ‘노예적 문화 사상’이 아니라 ‘자유적 조선 민중’을 고대하던 심정과 대략 일치하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후기 사상계의 물을 흐린 주범이 ‘새끼’주자들이었다면, 20세기 자주적 통일 민족국가 수립 도정에서 ‘새끼’마르크스들이 했던 역할이 대략 비슷했다는 반성이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하곡을 혹은 이른바 주류 주자로부터의 ‘커밍 아웃’이라 하고, 혹은 ‘일탈’에서 출구를 찾으며, 혹은 그의 실천적 자세와 현실에의 지속적 관심을 미덕으로 삼는다. 심지어 어떤 이는 그러면서도 양명학 자체를 아예 대안의 하나로 기정사실화하고서 이른바 실학을 그런 지위에 놓고 ‘성호좌파’, ‘성호우파’ 하듯이 하곡을 ‘양명우파’의 자리에 앉히기도 한다. 이쯤 되면 양명학의 인기가 꽤 높은 것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듯싶은데, 저렇게 눈을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돌려보면, 아예 하곡을 ‘한 소식 한 사람’으로 치켜세우는 예의 그 신비주의적 고약한 버릇까지 보여 한 마디 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궁예처럼 우주의 일을 훤히 꿰뚫은 도인이다. 많이 알려고 하지 마라. 그러면 다친다. 그저 듣는 만큼만 받아들여라.” ‘애들은 가라’의 뱀 장수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계룡산’을 떠올리게 하는 대략 그런 투다. 기실 우리가 경기의 인물을 찾아 천신만고 끝에 ‘혼’을 만나고자 하는 것은 ‘인본주의’를 전도시킨 양 극단으로서의 신비주의인 ‘절대’로서의 ‘광신(狂信)’과 ‘극 상대’인 물신(物神)을 이해하되 동의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런 지점에 하곡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미덕은 대체 무엇일까?
나아가서는 영화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물러나서는 명성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정제두의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자는 사앙(士仰)이며, 호는 하곡(霞谷)이다. 고려 전기 문벌귀족 정치체제에 기개로 맞서다 독약을 먹고 자살한 정습명(鄭襲明)과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이방원의 손에 죽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우의정 유성(維城)이다. 조선에 성리학이 꽃 피던 17세기 한 가운데인 1649년에 아버지 진사 상징(尙徵)과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상익(李商翼)에게 배웠고, 20여세 때부터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겼다.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에게도 배웠으며, 최규서(崔奎瑞)·최석정(崔錫鼎) 등과 사귀었다. 1668년 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힘썼다. 이 무렵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여 상당한 이해가 있었음은 그의 나이 34세 때 유약한 건강 때문에 그의 스승 박세채에게 보낸 ‘유서’에 가까운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1680년 김수항(金壽恒)의 추천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가지 않은 것은 이러한 그의 사상적 소신과 건강상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건강이 고비를 넘기자 1684년 공조정랑을 잠시 지냈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나자 중신들이 다투어 천거해 1688년 평택현감에 임명되고,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30여 회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거절하였다. 1689년 만 40세 때 몇 개월에 그친 평택현감 자리를 띤 채 경기 안산(安山) 가재울에 옮겨 살았는데, 이때부터 20년 동안 강화도로 옮겨가기까지 양명학 연구에 더욱 정진하였다. 이 시기에 저술된 ‘학변(學辨)’, ‘존언(存言)’에는 왕양명의 학설을 바탕으로 한 그의 심성학(心性學)이 심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1709년 조상의 근거지인 강화도 하곡으로 옮겨갔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호조참의, 한성부윤, 대사헌, 성균좨주에 임명되었다. 1726년 이정박(李廷撲)에게 양명학의 혐의를 받았으나 그의 식견을 인정한 영조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후에도 1728년 우참찬,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조정의 불림을 받으면서 88세의 장수를 누렸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그의 삶의 요체는 그의 제자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쓴 묘지명 중의 ‘나아가서는 영화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물러나서는 명성을 가까이 하지 아니한다(進不近榮 退不近名)’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귀신같은 한 소식’이 아니라 바로 이 점이 당시 이단의 혐의를 받고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노론이 주류이던 당시 소론에 속했던 그의 학문은 자손이나 인척들에게 가학(家學)으로 계승되었다. 아들 후일(厚一)을 비롯한 윤순, 이광사(李匡師)·이광신(李匡臣) 형제, 김택수(金澤秀) 등이 그들이다. 저술로는 ‘중용설(中庸說)’, ‘대학설(大學說)’, ‘논어설(論語說)’, ‘맹자설(孟子說)’을 비롯하여, ‘이서해송(二書解誦)’, ‘삼경차록(三經箚錄)’, ‘경학집록(經學集錄)’, ‘하락역상(河洛易象)’ 등 경전주석이 있으며, 양명학에로의 전기를 이룬 ‘심경집의(心經集義)’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그의 문집 ‘하곡집’에 망라되어 있다.
팩트와 텍스트를 오고가며 유물론에도 문 열어두고 도대체 하곡 사상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가 마치 ‘한 소식’한 사람처럼 다들 한 입을 모으는 것일까? 우선 당시 주류 이론이던 주자학과 그가 이단으로 혐의를 받았던 양명학의 차이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는 그 차이를 성즉리(性卽理), 이기(理氣), 선지후행(先知後行)의 계열과 심즉리(心卽理), 양지(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계열로 대비하여 설명한다. 그런데 이 차이는 사물(事物)을 보는 관점에서 확연히 구별되는데, 이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이야기하면 ‘팩트’와 ‘텍스트’의 차이로 이해하면 쉽다. 주자학의 경우 사물을 그 관찰 주체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객관적인 팩트로 보는 데 반하여, 양명학의 경우 관찰 대상이 관찰 주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 텍스트로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격’을 해석함에, 전자는 ‘즉(卽)’다시 말해 ‘입각’으로 후자는 ‘정(正)’ 다시 말해 ‘바로잡음’으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말할 필요도 없이 여기서의 ‘지’도 전자는 객관적인 ‘지식’으로 후자는 지선(至善)의 ‘양지’로 해석되며, 이 때문에 전자는 ‘선지후행’, 후자는 ‘지행합일’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한편 그는 이(理)를 체(體), 심(心)을 용(用)으로 보아 심 과 이를 연결시키고, 양지(良知)를 성(性)과 정(情)의 둘로 구분하여 각각 체와 용으로 규정하여 왕수인과 견해를 달리하였다. 또한 그가 펼친 예(禮)와 권(權)의 사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즉 그는 심즉리를 바탕으로 ‘의내설(義內說)’을 철저하게 전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내면화된 의(義)의 판단에 따라 예와 권의 실천 방법을 결정하게 되므로, 궁극적으로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궁즉변 변즉통 변즉구’라는 변통(變通)과 통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당시 세계사의 현실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던 물성(物性)의 존재를 용인하는 논리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한전제(限田制)를 거쳐 점차 지주제를 해소하고 궁극적으로 균전제를 실현하자는 토지제도 구상이나 양천제 철폐를 주장하는 신분제 개혁 등은 바로 이러한 배경 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당시 세계사의 대세이던 주관적 유물론으로 나아가기에는 그의 체계는 너무나 모범적인 것이었다. 이 지점이 또한 그를 ‘도인’으로 몰아넣는 또 하나의 함정이 아닐까 한다.
도(道), 자기 적성을 찾아 나아가는 길 관악산을 비롯한 온 산을 훑으면서 쓰레기를 줍고 가지치기를 하며 ‘해님’을 맞는다는 한 때 잘 나가던 대학 선배가 있다. 다 낡은 리어카 하나가 그의 유일한 생계수단이면서도 버려진 그림, 글씨 등을 부지런히 주어 모으고 글씨도 열심히 쓰면서 가끔 ‘감정’해 달라며 부탁해오곤 한다. 군데군데 빠진 이빨과 다 뭉개진 무릎을 가지고도 소주를 물이라며 애교부리고 전생 13세를 볼 수 있다며 큰소리치기도 한다. 어느덧 친구들은 하나 둘 ‘한 소식’했다며 주변을 떠나고 나이 들어 속이 뭉그러진 노모 하나 남아 그를 지키고 있다. 주변의 한 친구가 ‘마구니’에 끼었다고 진단하지만, 나는 그런 건 잘 모른다. 다만 부르면 붓, 화선지, 먹물 들고 찾아가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굳이 정의하자면 ‘로맨티스트’라고 판정받은 내가 오늘 다시 도통(道統)에 대해 생각한다. 공자의 말을 약간 짜깁기하여 다시 가만히 읊조려 본다. 머리로 배우고(學), 가슴으로 길을 찾으며(道), 발로 서고(立), 손으로 짝을 이루는(權) 그 곳에 도통이 있다. 그 길은 하늘이 자기에게 준 적성을 찾아 나아가는 것으로 통할 뿐이다. [출처] 迎日鄭門(영일정문) 하곡 정제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