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천상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 선포
눈은 깊은 신앙심으로 빛나
▲ 란도 디 스테파노(Lando di Stefano, 14세기경 생존), 세례자 요한 상, 1370∼1390년경, 목각에 채색, 클뤼니 박물관, 파리, 프랑스.
파리의 중심가에 있는 클뤼니 박물관에는 뛰어난 교회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작은 유리 상자 안에 있는 작은 ‘피에타 상’이 관람객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원래 ‘피파리 중심가에 있는 클뤼니 박물관에는 교회의 뛰어난 미술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원래 그곳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은 성당이나 수도원 내부와 외부를 장식하여 신자들의 신심을 북돋우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그곳을 찾는 사람들 마음 안에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새겨주고 있다.
참회의 설교자인 ‘세례자 요한 상’은 원래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제작돼 그곳 성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 작품은 박물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른 미술품들과는 달리 번잡하지 않은 장소에 외롭게 서 있다. 그 장소는 요한이 주로 활동했던 유다 광야처럼 한적해 보인다. 그곳에서 요한은 여전히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마르 1,4-6)
이 작품에서 요한의 몸은 말랐고 가슴뼈는 앙상하게 드러나 있지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그의 눈은 깊은 신앙심으로 빛나고 있다. 세례자가 걸친 털옷 위의 붉은 망토는 그가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쪽 손에는 전도 여행에 필요한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있던 하늘 나라를 알려주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라고 말하는 듯하다.
‘천상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한평생을 살았다. 그는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오시는 주님을 합당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참회의 설교를 하였고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주님의 신발을 들고 다니거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며 항상 겸손해 하였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참수를 당하며 죽기까지 충실히 수행하였다.
▲ 세례자 요한(부분).
오래전에 나는 안식년 동안 파리 외방전교회에 머물며 지낸 적이 있다. 그곳에는 젊은 시절에 아시아 각국에서 선교사로 일하시던 연로한 신부님들도 몇 분 계셨다. 이제 그분들은 선교사로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본원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정문이나 기념관의 열쇠 관리 등 각자 작은 소임을 담당하고 계셨다.
그 가운데 한 신부님은 넓은 화단에 물을 주는 책임을 맡고 계셨다. 그분은 매일 오전과 오후의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작업복과 장화를 갖추어 신고 온갖 정성을 다해 물을 주셨다. 그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화단은 언제나 천국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찼다. 그 신부님은 화창한 날씨뿐만 아니라 비가 내리는 날에도 우의를 갖추어 입고 화단으로 나가셨다.
처음에는 비오는 날에도 화단에 물을 주는 할아버지 신부님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이상해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자주 지켜보면서 조금씩 그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외부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는 모습에 존경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폭우 속에서도 화단에 물을 주던 노사제를 바라보면서 지난날 그분이 선교사로서 어떻게 살았을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참회의 설교와 세례를 베풀며 죽기까지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그분께서도 젊은 시절에는 선교사로서 그리고 지금은 정원관리사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요즈음처럼 비가 자주 내리는 날에 창문 밖을 내다보면 화단에 물을 주던 할아버지 신부님께서 우의를 걸친 채 나타나실 것만 같다.
정웅모 신부 (서울 장안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