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금남이라는 그의 호가 선명하다.)
*권 1
1.표해록을 알알이 챙겨서 읽는다.
2.군신의 예 이전 부자간의 의리
3.표류하다 도착한 곳이
4.동방불패 영화는 허구만은 아니다.
5.제주도 해역 표류자들
6.추쇄 경차관
7.추쇄 경차관이라는 직함은
8.당시 조선과 명과의 관계
9.배타기 전 그가 한 마지막 업무
10.위기에 봉착한 최부 일행
11.윤1월 4일, 큰 바다로 거침없이 빠져든다.
12.바다 한 가운데서
13.표류 5일 째
14.처음 섬에 닿았다.
15.대당 영파부 하산에서 만난 해적
16.선비는 표리부동하지 않는다.
17.승선자에 대한 인사고과
18.올바르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다.
19.후추를 달라는 말에 최부는
20.43인의 대 탈주
21.도저소라는 곳까지 강제로 끌려 간 43인
22.도저소라는 곳에서 심문을 받다.
23.도저소에서 5일
24.장보와 최부의 인연
25.현재는 닝보, 명나라 때는 영파부, 송나라때는 명주라 불린 곳1
26.현재는 닝보, 명나라 때는 영파부, 송나라때는 명주라 불린 곳2
27.왕희지의 고향 소흥에서
28. 항주의 전당강과 진주태감
29.항주에서 머무는 동안 1
30.‘당토행정기 담론’이라는 잡설에 대하여
*권 2
31.항주 소주 그리고 경항대운하
32. 태평스런 운하를 보며
33.남송의 수도 항주 그리고 금나라
34.항주에서 머무는 동안 2(항주의 오산과 용정차)
35 항주에서 머무는 동안 3( 서호의 백제와 소제)
36.항주에서 머무는 동안 4 ( 서호 십경)
37.항주에서 가흥(嘉興)으로
38.태호석과 수호지
39.소주의 아름다운 풍광
40.소주[蘇州]에서 소주[燒酒]에 취하듯
41.누에라는 벌레
42. 진강 지나 장강을 건너서며
43.과주에 배를 대고 왕안석은 세상을 둘로 갈랐다.
44.자금성에 한규란이라는 여인
45.샹그릴라 꿈의 도시, 양주에서
46.회수의 회와 황하의 하가 합쳐져 회하라 하는 물길
47.서주는 빛 좋은 개살구
48.환관학교가 있었던 명나라
49.임청에 서문경과 반금련
50.橘化爲枳(귤화위지)라는 사자 성어
51.명 9대 황제 홍치제의 서정쇄신
52.통주에서 조선 문인 이주(李胄)를 생각하며
*권 3
53.빨리 좀 보내주오.
54.성종실록과 최부 표해록 대조필
55.기다림의 나날
56.조선의 선비는 남다르다
57.어양역에서 사은사신을 만나다.
58.최부가 天使(황제가 파견한 사신)를 만난 날
59.산해관을 지나며
60.성절사신 채수 이야기
61.요동은 우리 땅이다.
62.드디어 압록강이다.
63.성종실록에 나오는 최부의 역사적 사실 모음
64.최부를 닮은 외손자 나덕헌과 유희춘
65.글에서 많이 나오는 그래서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하여
EPILOGUE (애국 애족)
참고문헌
1. 표해록을 알알이 챙겨서 읽는다.
<상인(喪人)인 신(臣) 최부(崔溥)는 제주로부터 표류해서 구동(甌東)에 배를 대고, 월남(越南)을 지나 연북(燕北)을 거쳐, 올 6월 14일에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여 삼가 전지(傳旨)를 받들어 이번 길의 일지를 편집하여 바치나이다.>
그의 글은 그렇게 시작한다. 글 제목이 그의 첫 글에 이미 노견되어 있다. 최부의 표해록. 말인 즉 '제주에서 표류를 하여 어딘가를 거쳐 청파에 도착하였고 지시대로 그 내용을 일지로 써 제출합니다.' 라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쓰인 말들이 생소하기 때문 되풀이 해 읽어도 더 이상은 귀담아 들어오지 않는다. 글의 의미를 잘 파악하려면 낱말에 부여된 뜻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각기 낱말들은 뜻을 함유하고 그 낱말들은 또 모여 글의 흐름으로 이어져 사고를 전달한다. 낱말은 사유를 잘게 부순 단초이고 이것들이 모여 어느 형색을 갖추는 게 아닌가. 특히 과거시대를 말하는 글에 있어서 낱말은 그 자체가 유물과도 같다.
그 시대에선 짤막한 표현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주석을 달아야 비로소 읽히게도 된다. 물론 시대흐름에 따라 가치 상실하는 낱말도 태반이다. 하지만 쉽게 못 알아먹는다고 글이 지닌 본래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의 시추에이션을 정조준하고 내가 그가 되어 쓰인 글대로 호흡한다면 영락없는 그 시대의 나로서 그를 만끽할 수 있다. 인문학은 바로 거기에 묘미가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모를 해도 인간의 본성은 그 틀을 유지하고 변함없이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고전 역시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생존과 행복, 아름다운 삶의 파생으로 엮인 낱말들의 향연이다.
굳이 나는 이 글 집에서 그의 행로를 일일이 찾지는 않겠다. 이는 글의 객체로서 근간을 이루고 형체를 만들지만 어쩌면 거죽에 불과한 노릇이고 정작 글의 주체는 별 다른 곳에 있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가 거쳐 간 중국 땅 어디어디라는 곳들은 알지도 못할뿐더러 설사 안다하여도 기실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산천도 의구하지 않으며 인걸 또한 간 곳이 없음이다. 하지만 인문의 자취는 흔적 그대로 남아 오늘에 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글의 표해를 건져 그를 알아보고 그 시대를 탐하는 것이 보다 더 가치 있으며 오늘의 형체로서 인간의 삶의 굴레, 인문학적 가치를 일깨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의 눈물과 땀이 서린 표해는 정작 그의 글에 녹아 새로움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참 누구도 모를 미지로서 묘한 게 인생살이다. 그가 말 한대로 상인(喪人)이면서 신(臣)인 자로서 꿋꿋이 쓴 이 보고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더니만 정작 육지에 올라서 더 힘든 표류를 겪게 된다. 생동감 넘치는 ‘표해록’ 느낌과는 달리 이어진 그의 안타까운 운명이 내 마음을 짓누른다. 이는 표류기록에도 그대로 드러나듯이 아마도 그의 올곧은 성격에 기인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결코 바다 속에 수장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적으로 믿었던 사람이 있다. 성희안(1461~1513:형조판서/ 우의정)이 바로 그인데 그 믿음의 연유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였던 것일까. 이 믿음 또한 글 속에서 자연히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한마디로 최부는 치밀하고 다부졌다.
본문에서 그의 첫 마디 말은 상인(喪人)이었다. 왕 앞에 조아리며 내미는 보고서인데도 그는 분명 상인(喪人)이란 말을 먼저 꺼냈다. 그는 '신하로서 상인인 최부는' 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글에 여실히 나타나지만 낱말 하나 선택함에도 진중하고 행동거지 또한 신중했다. 왕보다도 상제로서의 '효'가 우선한다는 의미이고 왕 또한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충효사상 하지 효충사상하지는 않는다. 묘한 어감의 차이다. 혹여 잘못 쓴 것은 아닐까. 이는 시대흐름과 유관할 것이다. 가만 보면 우리의 말은 특색이 있다. 절도도 있지만 순서에도 흐트러짐이 없으며 의식이나 사물에 대해 확실함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받아들이는 방법이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이 있다. 이어령 선생이 한 말은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싶다. 말이 우리만의 오늘의 의지가 아니 듯 글 또한 자연스레 우리의 전통으로서 의식으로서 낱낱이 살아 오늘을 말한다.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한반도인 한국은 언제나 대륙인 중국과 섬나라 일본의 중간에 끼는 일이 많다.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한국은 그 두 나라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어를 받아들이는 태도 하나만 봐도 그렇다. 일본이 현재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외래어(서양 말)는 무려 4천 단어가 넘는다. 이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중국이다. 아무리 서양의 신발명품들이 밀려와도, 일단 중국에 들어오면 중국식 이름으로 창씨 개명되게 마련이다. 에스컬레이터가 '전기 사다리(電梯)'가 되고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텔레비전도 '전기로 보는 것(電視)'이라고 해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심지어 고유명사도 중국식 의미로 둔갑한다. 미국 식민주의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세계를 휩쓰는 그 당당한 코카콜라도 중국 땅에 들어서면 별수 없이 '가구가락(可口可樂)'으로 통성명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엉거주춤‘ 이라는 말을 가진 나라답게 그 수용 태도도 어중간한 데가 없지 않다. 외국어를 받아들이는 한국적 특징은 일본식도 중국식도 아닌 그 중간 노선에서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역 전 앞이라는 말이다. 역전이라는 한자말에는 이미 앞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데도 거기에 다시 순수한 우리말을 덧붙여 쓴다. 초가집도 그렇고 양옥집도 그렇다. 한자를 그렇게 천년을 써왔어도, 말하자면 거의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으면서도, 맹장처럼 붙어 있을망정 제 나라 말을 함께 쓰려고 한 무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일본 말이 이 땅에 휩쓸 때에도 '모치'라는 일본어는 한국을 완전히 제패하지 못했다. 모치라는 말을 받아들이면서도 역시 떡이라는 우리말을 붙여 모치떡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서양 말이 들어와도 '역 전 앞'식 표현은 살아 있었다. 깡통이라는 말이 그 전형적인 예다. 깡은 영어의 캔(can)에서 온 것으로 금속의 통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거기에 다시 통이라는 한국말을 붙여 깡통이라는 새말을 만들어 썼던 것이다. 야구 중계 때 이따금 우리는 "파울 라인 선상으로"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일부러 이 글을 옮겨 적은 것은 우리가 갖는 확실성이나 분명함은 어제오늘의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곧이곧대로’ 라 하는 말, 나는 최부의 글에서 이러한 의식의 저변을 이루는 밑그림을 확실히 느끼고 또 보았다. 조선의 선비는 절대 섣부르지 않으며 확고부동하였다. 똑 부러진다는 표현이 비단 최부에게만 해당될까. 다 먹힌 것 같은데도 통째로 삼켜버릴 수 없는 것이 한국 문화요, 확실성을 가져야 비로소 만족하는 한국인이라는 이 말. 그의 글은 그런 점에 있어서 아주 좋은 본보기다. 하물며 제도가 엄격하던 조선시대, 어느 안전이라고 허튼 글을 지어 올릴까. 그런 측면에서 최부의 글은 감정을 극도로 자제하고 숨 막힐 정도로 논리로서 대처하기에 딱딱하고 재미가 덜한 측면이 있다. 나는 그런 글의 재질로 반감될 것 같은 글의 향배를 구출하고자 애를 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면 꽁꽁 숨은 그의 감정으로 술래잡기 하듯 오히려 글쓰기는 전작품인 열하일기보다 더 편하고 자유로웠다. 이제 그 시대의 진면을 살펴 본격적으로 그에게 다가가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