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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릉도(芋陵島), 우산국(于山國) : 울릉도(鬱陵島)
2023년 05월 11일
○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헌법(憲法)에서 보는 영토(領土)는, ‘한반도(韓半島)와 그 부속도서(附屬島嶼)’를 모두 포함(包含)한다.
【헌법(憲法)에 근거(根據)한 직접선거(直接選擧)로 선출(選出)된 대통령(大統領)은, 오늘날의 북한(北韓) 땅까지를 우리 영토(領土)로 하는 시각(視覺)을 갖춰야 한다. 왜냐하면 그 헌법(憲法)에서는 ‘한반도(韓半島)와 그 부속도서(附屬島嶼)’를 영토(領土)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영토(領土)라는 시각(視覺)은 항상 새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이해(理解)하지 못한다거나, 능력(能力)이 미치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야 한다. 그게 애국애족(愛國愛族)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통치행위(統治行爲)에 속한다. ‘무능력(無能力)하다’는 것은 이러한 통치행위(統治行爲)를 할 수 있는 능력(能力)이 ‘턱없이 부족하다 또는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者)를 선출(選出)한 구성원(構成員)이나 국민(國民)들은, 그에 합당(合當)한 고통(苦痛)과 억울(抑鬱)함과 분노(憤怒)를 스스로 감수(甘受)해야 한다. 잘못 선택(選擇)한 행위(行爲)의 대가(代價)다.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현실(現實)이자 실상(實狀)이다.】
즉(卽) “땅(地: 土)으로 치면 : 동(東)쪽으로는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까지, 남(南)쪽으로는 이어도(離於島)까지, 서(西)쪽으로는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까지일 것이다”
만약(萬若)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대로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였다면 : 오늘날의 대마도(對馬島)까지 영토(領土)다. 그러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의 얘기는, ‘대마도(對馬島)는 한국(韓國)의 영토(領土)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진짜 웃기는 ‘뭐 짜장’같은 놈들이다.
그러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보면, ‘한반도(韓半島)’는 ‘옛 조선제국(朝鮮帝國)의 조그마한 동(東)쪽의 일부(一部) 땅이었을 뿐이다.’
오늘은 : 울릉도(鬱陵島)에 대한 옛 기록(記錄)을 살펴보는 것도 쾌나 흥미(興味)로운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향토사학(鄕土史學)은 : 말 그대로 「사학(史學)이 아닌 사학(死學)이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괴물(怪物)은,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이미 밝혀져 없어진 지 오래된 조작(造作)된 이야긴데, 지금(只今)도 전라도(全羅道) 일부(一部) 향토사학(鄕土史學)에서는 그것을 사실(史實)화하고 있다는 것에 경악(驚愕)한다.
이건 진짜 경악(驚愕)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정말 이러다가 ‘남한(南韓) 청와대(靑瓦臺)’에, “일본(日本) 식민지(植民地) 남조선(南朝鮮) 총독부(總督府)”가 에 들어서는 것은 아닐까?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보면, 알 수 없는 일이다.
○ 『울릉도(鬱陵島)』는,
포항에서 북동(北東)쪽으로 210㎞, 죽변항에서 140㎞ 떨어져 있다. 육지【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와는 최단(最短) 137㎞ 떨어져 있는데, 성인봉의 해발고도(海拔高度)가 ‘987’m요, 그 외(外)에 ‘900’m가 넘는 봉우리가 5개나 있다고 전해진다.
한반도(韓半島) 울릉도(鬱陵島)는, 『오각형 형태의 섬으로 “동서(東西) 길이 10㎞, 남북(南北) 길이 9.5㎞, 해안선(海岸線) 길이는 64.43㎞”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동서는 약 25리요, 남북은 약 24리” 정도(程度) 되는 조그만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의 ‘경북매일’의 기사(記事)를 보면 : 울릉도(鬱陵島)의 산(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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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매일
울릉도 성인봉의 높이 해발 986.7m…등산길은 육지보다 400~500m 높아
기자 김두한 / 등록일 2022.01.17 14:44
울릉도에 전천후 대형여객선이 취항하면서 겨울철 관광객이 증가 성인봉 등 울릉도 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성인봉의 높이에 대해 각각 다르게 표기, 혼선을 준다.
따라서 정확한 표기 및 숙지가 필요하다. 신비의 섬, 동해의 진주 울릉도의 최고봉인 성인봉의 높이 표기가 해발 983.6m, 984m, 986.7m, 987m로 각각 다르게 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표기는 해발 986.7m이며 소수점을 사용하지 않을 때 반올림해서 987m로 표기한다. 이 같은 혼선은 애초 성인봉높이는 삼각점을 기준으로 해 983.6m 또는 984m로 표기했다.
※ 성인봉에서 바라본 나리분지 옆 높은 산들 해발 700~900m 봉들이다.
하지만,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과거 성인봉의 높이는 해발 983.6m로 삼각점이 있는 지점(성인봉정상 동쪽방향 대나무 사이)을 기준으로 측정했지만, 표고점 높이(성인봉 표지석 포함)를 기준으로 해 해발 986.7m라고 밝혔다.
따라서 울릉군은 지난 2008년까지 통계연보, 관광자료 등 각종자료에 삼각점 지점을 기준으로 소수점 이하 반올림해서 해발 984m로 표기해 왔다. 하지만, 지난 2009년부터 표고높이를 기준으로 해발 987m 표기하고 있다.
이 같은 기준은 지난 2007년 국토지리정보원이 항공촬영을 통해 측량한 것으로 성인봉 정상에 표지석을 세우고자 지반을 다진 돌과 흙 표지석(1.8m)이 측정에 들어가 표고가 높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 성인봉정상 표지석, 성인봉의 높이는 표지석 꼭대기를 기준으로 한다. 멀리 해발 901m의 미륵산이 보인다,
울릉도에는 성인봉 외에도 해발 900m가 넘는 봉이 5개가 있다. 성인봉 다음으로 가장 높은 봉은 우두봉으로 해발 982m이며 육안으로 보면 성인봉보다 오히려 높게 보인다.
이 같은 이유는 성인봉 정상에는 나무가 없고 우두봉에는 15m 넘는 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멀리서 볼 때는 990m 이상으로 보여 오히려 높게 보일 수 있다.
이 밖에도 간두산 968m, 말잔등 961m, 형제봉(가운데) 915m, 미륵봉 901m 등 해발 900m가 넘는 봉은 모두 6개다. 형제봉(서면 쪽) 897m, 나리봉 840m, 백운봉 813m 등 800m 이상이 3개다.
※ 나리분지에서 바라본 미륵산
또 나리령 (북면 쪽 형제봉) 798m, 관모봉 726m 등 해발 700m가 넘는 봉이 6개가 있다. 따라서 울릉도에는 해발 700m 이상인 봉이 무려 15개에 이른다.
울릉도에서 산에 오르려면 해발 1∼2m에서 출발하므로 육지 산과 비교할 때 해발 400∼500m(해발 1천300m~1천500m 정도)가 더 높은 산행을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울릉도에서 등산할 때는 이 같은 높이를 고려 해야 한다. 육지와 비교해 낮다고 생각하고 산행하면 안 된다. 높고 가파른 지형 때문에 일반 등반로는 원만하지만 이탈하면 위험성이 매우 크다. / 김두한기자kimd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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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鬱陵島)》는 : 『오각형 형태의 섬으로 “동서(東西) 길이 10㎞, 남북(南北) 길이 9.5㎞, 해안선(海岸線) 길이는 64.43㎞”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동서는 약 25리요, 남북은 약 24리” 정도(程度) 되는 조그만 섬』이라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자.
울릉도(鬱陵島)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를 들이대면 : 〈신라(新羅) 때는 우산국(于山國)이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우릉도(亐陵島)라고 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우릉도(芋陵島)요, 지금의 우릉도(羽陵島) 또는 무릉도(武陵島)라고도 했다〉고 전해진다.
➤ 즉(卽) 울릉도(鬱陵島)는, “우릉도(芋陵島), 우릉성(羽陵城), 울릉도(蔚陵島), 울릉도(鬱陵島), 우릉도(于陵島), 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1) 東史綱目 3상 / 壬辰年[512]【新羅 智證王 13년 / 高駒驪 文咨王 21년 / 百濟 武寧王 12년 / 北魏 宣武帝 延昌 元年(512)】: 6월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우산국(于山國)은 아슬라주(阿瑟羅州)의 동해 가운데 있고, 혹은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하며, 지방은 백리(百里)인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우릉도(亐陵島)라고 되어 있다. 지금의 우릉도(羽陵島)이며, 동해(東海) 가운데 있다. 순풍(順風)이면 이틀 길이고 주위는 2만 6천 7백 30보이다. 지세의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었다.》고 하였다.
➨ 위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 『우산국(于山國)은, 신라(新羅) 지증왕(智證王) 13년인 AD 512년 당시(當時)만 해도 나라(國)를 칭했으며, 백성(百姓)들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 섬(島)이라는 지형(地形)을 이용(利用)하여 항복(降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땅은 백리(百里)’였다고 하니, 오늘날의 울릉도(鬱陵島)보다 몇 배(倍) 더 큰 땅의 섬(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울릉도(鬱陵島)라고 보기에는 무리(無理)가 있다.
(2) 高麗史節要 1 太祖神聖大王 庚寅 13년[930]【後唐 長興 元年-契丹 天顯 5년】
《芋陵島,遣使,貢方物,拜其使白吉,爲正位,土頭爲正朝。: 우릉도(芋陵島)에서 사신을 보내어 지방의 산물(産物)을 공물로 바치니, 그 사(使)인 백길(白吉)을 정위(正位)로, 토두(土頭)를 정조(正朝)로 삼았다.》하였다.
(3) 東史綱目 5 下 庚寅年 金傅 4년 / 甄萱 39년 / 高麗 태조(太祖) 13년【후당 명종 장흥(長興) 원년, 거란 태종 천현 5, 930】 : 우릉도(芋陵島)에서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 도주(島主)가 백길(白吉)ㆍ토두(土豆)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니, 고려왕은 백길을 정위(正位)로 삼고, 토두를 정조(正朝)로 삼았다.
➨ 위의 ‘(1)+(2)+(3)’ 즉(卽) 『동사강목(東史綱目)+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 『우릉도(芋陵島)는 나라(國)를 칭(稱)하고 사신(使臣)을 보낼 정도로 많은 백성(百姓)들이 살고 있었던 땅(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크기 또한 ‘몇 배(倍)’에 이르니,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부속도서(付屬島嶼) 중의 하나인 울릉도(鬱陵島)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高麗史節要 4권 德宗敬康大王 壬申 元年[1032년] 【송 명도(明道) 원년ㆍ거란 중희(重熙) 원년】 : 《羽陵城主,遣子夫於仍多郞,來獻土物。: 우릉성주(羽陵城主)가 그의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쳤다.》고 하였다.
➨ 이때 즉(卽) 서력(西曆) 1,032년 당시(當時)에, 우릉성주(羽陵城主)가 토산물(土産物)을 바쳤다는 말은, 그곳에 백성(百姓)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뜻이자, 성주(城主)도 있었다는 뜻이다. 우릉도(羽陵島)가 울릉도(鬱陵島)냐?
(5) 高麗史節要 11권 / 의종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정축 11년(1157)【송 소흥27년ㆍ금 정륭 2년】: 《王,聞東海中,有羽陵島,地廣土肥,舊有州縣,可以居民,遣溟州道監倉金柔立往視,柔立,回奏,島,中有大山,從山頂,向東,行至海一萬餘步,向西,行一萬三千餘步,向南,行一萬五千餘步,向北,行八千餘步,有村落基址七所,有石佛,鐵鍾,石塔,多生柴胡,蒿本,石南草,然,土多巖石,民不可居,遂寢其議。: 왕(王)이 동해(東海) 가운데에 우릉도(羽陵島)란 섬이 있는데, 지역이 넓고 토질도 비옥하여 옛날에는 주(州)ㆍ현(縣)을 두었던 곳으로 백성이 살 만하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시찰하게 하였는데, 유립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가운데에 큰 산이 있는데, 산마루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가면 바다에 이르기까지 1만여 보요, 서쪽으로 향하여 가면 1만 3천여 보요, 남쪽으로 향하여 가면 1만 5천여 보요, 북쪽으로 향하여 가면 8천여 보입니다. 촌락의 옛터가 7개소나 있고, 석불(石佛)과 철종(鐵鍾)과 석탑(石塔)이 있으며, 시호(柴胡)ㆍ고본(蒿本)ㆍ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생산됩니다. 그러나 암석이 많아서 백성이 살 수 없습니다.” 하여, 드디어 그 논의를 정지했다. 관정사(觀靜寺)에 행차하여 풍수를 살폈다.》하였다.
➨산마루로부터 ① 동(東)쪽으로 바다까지 1만 여보(餘步)【13,860m=13.8km】요, 서(西)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3천 여보(餘步)【18,018m=18km】라고 했고, ② 산마루에서 남(南)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5천 여보(餘步), 북(北)쪽으로 바다까지는 8천 여보(餘步)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울릉도(鬱陵島)가 ‘배(倍) 이상(以上) 큰 땅’이었다는 것이고,
위의 글 ‘(4)+(5)’에서 보면 : ‘(4)’에서는【AD 1,032년】우릉도(羽陵島)에 성주(城主)까지 있었다고 하였고, 그의 아들을 보내어 토산물(土産物)을 바쳤다고 하였는데, 글 ‘(5)’에서는【AD 1,157년】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며, 다만 부락(部落) 터가 7개소가 있고, 석불(石佛)과 철종(鐵鍾)과 석탑(石塔)등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런 기록(記錄)대로라면 : AD 1,157년 이전(以前)에는 이곳 땅에 7개 부락(部落)과 석불(石佛)과 철종(鐵鍾)과 석탑(石塔) 등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곳 백성(百姓)들이 부처(佛)를 신봉(信奉)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AD 1,032년 – 1,157년’ 사이에 이곳 우릉도(羽陵島)에 알 수 없는 큰 사건(事件)이 있었다는 추론(推論)이 가능(可能)하다.
(6) 高麗史節要 25권 / 忠穆王 병술(丙戌) 2년 1346년【元 至正 6년】 : 《三月,東界芋陵島人來朝。: 3월에 동계(東界)의 우릉도(芋陵島) 사람이 와서 조회하였다.》
또 AD 1,346년에는, “동계(東界)”의 우릉도(芋陵島)에서 백성(百姓)이 래조(來朝)하였다는 것이다. 조정(朝廷)에까지 와서 조회(朝會)하였다면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百姓)들의 대표(代表)로 왔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동계(東界)”라고 하였는데,
➊ 성재집(省齋集)【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1832~1893)】31권 / 강설잡고〔講說雜稿〕송원화동사합편강목서법〔宋元華東史合編綱目書法〕편을 보면 : 《高麗雖海隅偏邦,而東北諸夷小國來附者甚多。: 고려(高麗)는 바다 한 귀퉁이에 치우친 나라이지만 ‘동(東)쪽과 북(北)쪽’ 지역 【필자(筆者) 주(注) : 번역(飜譯)본에는 ‘동북(東北)’쪽이라고 했으나 이는 오류(誤謬)다.】 은 여러 오랑캐 소국들이 복종함이 매우 많았다.【如東西女眞、黑水靺鞨、耽羅、鐵利國、弗奈國、火食國、對馬島、芋陵島、渤海、興遼、骨夫、噲拔、薩摩諸部落 : 예컨대 동여진(東女眞)ㆍ서여진(西女眞)ㆍ흑수말갈(黑水靺鞨)ㆍ탐라(耽羅)ㆍ철리국(鐵利國)ㆍ불내국(弗奈國)ㆍ화식국(火食國)ㆍ대마도(對馬島)ㆍ우릉도〔芋陵島〕ㆍ발해(渤海)ㆍ흥요(興遼)ㆍ골부(骨夫)ㆍ쾌발(噲拔)ㆍ살마(薩摩) 등의 여러 부락이다.】라고 하였으니, 우릉도(芋陵島)는 큰 부락(部落) 또는 소국(小國)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울릉도(鬱陵島)가 옛 우릉도(芋陵島)였을까? 『동여진(東女眞)ㆍ서여진(西女眞)ㆍ흑수말갈(黑水靺鞨)ㆍ탐라(耽羅)ㆍ철리국(鐵利國)ㆍ불내국(弗奈國)ㆍ화식국(火食國)ㆍ대마도(對馬島)ㆍ우릉도(芋陵島)ㆍ발해(渤海)ㆍ흥요(興遼)ㆍ골부(骨夫)ㆍ쾌발(噲拔)ㆍ살마(薩摩)』등이 고려(高麗)의 속국(屬國)이나 부락(部落)이었음을 증명(證明)해야 한다.
➨ ‘살마(薩摩)’ 또한 ‘고려(高麗)의 속국(屬國) 부락(部落)이었다’고 하였다. ① ‘살마주(薩摩州)=살마국(薩摩國)’을 가리키며 일본(日本) 서해도(西海島)인 구주(九州)의 하나이다.【고전번역원 DB : 태조 4년 을해(1395) 4월 25일(무자) : 注 0001 참고(參考)】② 가고시마[鹿古島]의 옛 번명(藩名)이다.【지봉집(芝峯集)】
위에서 살펴본 사서(史書) 속의 우릉도(芋陵島)는,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울릉도(鬱陵島)가 될 수 없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이다.
➋ 기언(記言) 제28권 하편 / 산수기(山水記) 동계(東界) 동유박물(東遊博物) : 《于山鬱陵一島。望三峯岋嶫。海晴則山木可見。山下白沙甚遠。古于山國。負固不服。新羅以計降之。至高麗。有白吉土豆獻方物。此皆東界古事古跡。: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는 하나의 섬인데, 바라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다. 바다가 쾌청하면 산의 나무를 볼 수 있으며, 산 아래에는 하얀 모래가 매우 멀리 뻗어 있다. 옛날 우산국(于山國)이 지형의 험고함을 믿고서 복종하지 않자 신라가 계략을 써서 항복시켰고, 고려에 이르러 백길토두(白吉土豆)가 토산물을 바쳤다. 이는 모두 동계의 고사이며 고적이다.》
➌ 기언(記言) 제35권 외편 / 동사(東事) 4 지승(地乘) / 蔚珍東海中。鬱陵千山。: 《울진(蔚珍)의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에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가 있다.》고 하였는데,
기언(記言)은,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년(선조28) - 1682년(숙종8)】선생(先生)의 작품(作品)이다. 위의 글 기언(記言) ‘➊’에서는 :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는 한 개의 섬이라고 하였는데, ‘➋’의 글에서는 :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가 있다고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 〈望三峯岋嶫。海晴則山木可見。山下白沙甚遠 : 바라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다. 바다가 쾌청하면 산의 나무를 볼 수 있으며, 산 아래에는 하얀 모래가 매우 멀리 뻗어 있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울릉도(鬱陵島)와는 전혀 다른 지세(地勢)를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卽) 울릉도(鬱陵島)의 서(西)쪽 해안(海岸)은 백사장(白沙場)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울릉도(鬱陵島)는 어느 곳에도 백사장(白沙場)은 없다고 한다.
➨ 헷갈리는 기록(記錄)이다. 하지만 분명(分明)한 것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울릉도(鬱陵島)가 아니다”라는 말씀이시다.
(7) 태종 12년 임진(1412) 4월 15일(기사) / 강원도 관찰사가 울릉도(鬱陵島) 유산국(流山國)의 섬사람에 대해 보고하다 : 《命議政府議處流山國島人。 江原道觀察使報云: "流山國島人白加勿等十二名, 求泊高城 於羅津, 言曰: ‘予等生長武陵, 其島內人戶十一, 男女共六十餘, 今移居本島。 是島自東至西自南至北, 皆二息, 周回八息。 無牛馬水田, 唯種豆一斗出二十石或三十石, 麥一石出五十餘石; 竹如大椽; 海錯果木皆在焉。’ 竊慮此人等逃還, 姑分置于通州、高城、杆城。" :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유산국도(流山國島) 사람을 처치하는 방법을 의논하였다. 강원도 관찰사가 보고하였다. “유산국도(流山國島) 사람 백가물(白加勿) 등 12명이 고성(高城) 어라진(於羅津)에 와서 정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무릉도(武陵島)에서 생장하였는데, 그 섬 안의 인호(人戶)가 11호이고, 남녀가 모두 60여 명인데, 지금은 본도(本島)로 옮겨 와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이 동에서 서까지 남에서 북까지가 모두 2식(息) 거리이고, 둘레가 8식(息) 거리입니다. 우마(牛馬)와 논이 없으나, 오직 콩 한 말만 심으면 20석 혹은 30석이 나고, 보리 1석을 심으면 50여 석이 납니다. 대[竹]가 큰 서까래 같고, 해착(海錯)과 과목(果木)이 모두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하여 갈까 염려하여, 아직 통주(通州)ㆍ고성(高城)ㆍ간성(杆城)에 나누어 두었습니다.”》
(8) 세종 18년 병진(1436) 윤 6월 20일(갑신) / 무릉도의 우산에 마을을 만들자는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다 : 《江原道監司柳季聞啓: "武陵島 牛山, 土沃多産, 東西南北各五十餘里, 沿海四面, 石壁周回, 又有可泊船隻之處。 請募民實之, 仍置萬戶守令, 實爲久長之策。" 不允。: 강원도 감사 유계문(柳季聞)이 아뢰기를, “무릉도(武陵島)의 우산(牛山)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도 많사오며, 동ㆍ서ㆍ남ㆍ북으로 각각 50여 리 연해(沿海)의 사면에 석벽(石壁)이 둘러 있고, 또 선척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사오니, 청컨대, 인민을 모집하여 이를 채우고, 인하여 만호(萬戶)와 수령(守令)을 두게 되면 실로 장구지책이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세종(世宗) 때는, ‘무릉도(武陵島)와 유산국도(流山國島)’가 별도 섬(島)으로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동서남북(東西南北) 50 여리가 석벽(石壁)처럼 둘러쳐져 있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독도(獨島)는 아님이 분명(分明)하다.
(9) 태종 17년 정유(1417) 2월 5일(임술) 양력 1417-02-21 /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의 거주민을 데리고 돌아와 토산물을 바치다 : 按撫使金麟雨還自于山島, 獻土産大竹、水牛皮、生苧、綿子、檢樸木等物, 且率居人三名以來。 其島戶凡十五口, 男女幷八十六。 麟雨之往還也, 再逢颶風, 僅得其生。;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왔다. 토산물인 대죽(大竹), 물소 가죽, 생모시, 명주, 검박목(檢樸木) 등의 물건을 바쳤다. 또 거주민 3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 섬의 민호(民戶)는 모두 15구(口)이고 남녀 아울러 86명이다. 김인우가 왕복하였을 때에 두 번이나 태풍을 만나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주-D001] 안무사(按撫使) …… 돌아왔다 : 태종 16년(1416)에 김인우를 안무사로 임명하여 무릉도(武陵島) 등지에 백성들이 요역(徭役)을 피해 들어가 살고 있는 실정을 조사하게 하였다. 무릉도(武陵島)는 울릉도(鬱陵島)이고 우산도(于山島)는 독도이다. 《太宗實錄 16年 9月 2日, 17年 2月 8日》 《世宗實錄 地理誌 蔚珍縣》
➨ 위 주(注)를 보면 : ‘무릉도(武陵島)는 울릉도(鬱陵島)’, ‘우산도(于山島)는 독도(獨島)’를 말한다고 하였으나, 독도(獨島)에 서력(西曆) 1,417년 당시(當時)에 “15가구(家口)에 86명이 살고 있었다”는 말은 오늘날의 독도(獨島)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독도(獨島) 땅 어디에서 ‘15가구 86명’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이 있느냐? 하는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할 수 있어야 한다. 배 한 척(隻)도 댈 수 없는 곳에 무슨 재주로 백성(百姓)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인가? 또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10) 왕환(王環) : 고려 후기의 종친. 신종(神宗)의 6대손으로, 보성군(寶城君) 왕희(王熙)의 아들이며 공양왕(恭讓王)의 종숙(從叔). 1371년(공민왕 20) 처남 신순(辛珣)의 일로 연좌되어 무릉도(武陵島)에 유배되었다고 하였다.
(11) 高麗史節要 16권 高宗安孝大王三 3) 丙午 33년[1246], 송 순우 6년ㆍ몽고 정종(定宗) 원년 : 及第史挺純,爲蔚陵島安撫使。: 사정순(史挺純)을 울릉도 안무사(蔚陵島安撫使)로 삼았다.
➨ 여러 기록(記錄)으로 보면 :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에는 분명(分明) 백성(百姓)들이 살고 있었다는 기록(記錄)뿐이다. 우산도(于山島)가 독도(獨島)인가? 울릉도(鬱陵島)인가? 이러한 것조차 분명(分明)하지 않다. 옛 조선왕조(朝鮮王朝) 시절(時節)엔 별 관심(關心)이 없었다는 뜻일게다.
(12) 아계유고[中宗14년(1538)-光海君 元年(1609)] 제3권 / 기성록(箕城錄) ○ 잡저(雜著) / 울릉도설(蔚陵島說)
《蔚陵島。在東海之中。距海濱不知其幾百里也。每秋冬之交。陰曀捲盡。海氣澄朗。則自嶺東望之。如一片蒼煙。橫抹於水天之間。獨眞珠府與此島最爲相對。故行人之登召公臺者。或見其林木岡巒之狀。了了然可辨。以此知不甚遠也。箕城人嘗言。麋鹿蘆竹。往往浮出於沙渚之間。禽鳥之不知名者。亦翩翩渡海而來。及至海濱。垂趐自墮。爲兒童所捕者數矣。漁人舟子。或漂到島傍。見菜根蔬葉隨水出來。而四面皆蒼巖鐵壁。只有一洞門。可捫蘿而入。慮有防守者。彷徨躅躑。不敢近而回棹者有之。居是島者。未知爲何許人。或疑其避役逃罪之輩。自相婚嫁。漸至繁盛。或疑其獠蠻之種。據有是島。非自近始。或疑其果有之。則豈無一番舟楫之往來。豈無一物可交貨有無於他境乎。疑者不一。無所歸宿。終置是島於茫昧恍惚無何有之鄕。豈退之所謂桃源之說誠荒唐者歟。噫。中略. :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 섬으로, 육지와의 거리가 몇백 리가 되는지 모른다. 매년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즈음 흐릿한 기운이 말끔히 걷히고 바다가 청명할 때, 영동(嶺東)으로부터 바라보면 마치 한 조각 푸른 이내가 수평선 저편에 가로놓여 있는 것과 같다. 유독 진주부(眞珠府)가 이 섬과 가장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행인들 중 소공대(召公臺)에 오른 이들은 더러 이 섬의 숲과 묏부리의 형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으니, 이로써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기성 사람들이 말하기를, 중략(中略)》
➊ 진주부(眞珠府) : 삼척부(三陟府)의 별칭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三陟府 : 郡名 - 悉直,陟州,眞珠。/ 形勝 - 千尋翠壁,五十淸川。柳思訥詩:千尋翠壁重重帀,五十淸川衮衮流。: 천 길 푸른 석벽, 오십천 맑은 냇물 류사눌(柳思訥)의 시에, “천 길 푸른 석벽이 겹겹으로 둘러 있고, 오십천 맑은 냇물이 졸졸 흐른다.” 하였다. 北據大嶺,西臨巨川。金守溫, 竹西樓記》: 북쪽으로 큰 영(嶺)을 의지했고, 서쪽으로 큰 냇물에 임했다. [김수온(金守溫)의 죽서루기(竹西樓記)] / 土産 : 瑪瑙[出府西堅頭里] 紫檀香,安息香.
자단향(紫檀香) : Pterocarpus santalinus Linné (콩과 Leguminosae)의 심재이다. 일명 자단이라 한다. 산지는 인도 남부, 중국의 해남도 및 대만등지이다.
안식향(安息香) : 때죽나무과의 식물(植物)로, 자바, 수마트라, 베트남, 타이에서 산출
大東地志 卷十六 / 江原 三陟 / 土産 : ➤ 紫檀, 安息香 / 壇壝 : 非禮山 : 新羅祀典云: “在悉直郡。 以北海, 載中祀。” 今未詳。 / 典故 : 新羅婆娑王二十五年, 悉直復叛, 討平之, 徙其餘衆於南鄙。 奈勿王四十年, 靺鞨侵北邊, 出師大敗之於悉直之原。 慈悲王十二年, 高句麗與靺鞨襲北邊悉直城。 《高句麗本紀》云: “長壽王五十七年, 王以靺鞨兵一萬, 攻取新羅悉直州城。” 高麗德宗二年, 海賊寇三陟, 擒獲四十餘人。 靖宗二年, 東蕃賊船寇三陟桐津戍, 標掠人民, 守將設伏草莽, 掩擊斬四十餘級。 文宗六年, 東女眞高之問等航海來, 攻三陟臨遠戍, 守將河周呂擊斬十餘級, 賊奔潰。 神宗二年, 溟州盜陷三陟。 恭愍王二十三年, 倭寇三陟。 禑七年倭寇三陟焚掠, 八年倭寇三陟。 ○ 本朝太祖三年, 高麗恭讓君卒于府。 壬申七月, 恭讓君遜于原州, 尋移杆城郡。 又移于三陟府, 至是卒追封恭讓王。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 土産 : ➤ 紫檀香,安息香. / 宮室 : 眞珠館。卽客館。其西軒曰凝碧軒。
竹西樓。: 在客館西。絶壁千尺,樓架其上。俯臨五十川, 中略.
東海碑。: 在府東十里,海澨。本朝許穆宰三陟,以府爲天下東表之地,豎碑於此,作《東海銘》,書以古篆刻之。
輿圖備志 卷十五 蘂城崔瑆煥星玉甫彙輯。 鼇山金正浩伯元甫圖編。 / 江原道 三陟都護府 右營, 三陟浦鎭, 平陵道。 / 竹西樓。 : 在客館西。 絶壁千仞, 奇巖叢列。 架樓其上。 下臨五十川, 川匯爲潭, 潭水淸澈。 絶壁有暗竇, 水至其上, 漏如落漈, 餘循樓前石壁橫過。
土産 : 紫檀香, 安息香
여재촬요(輿載撮要) 卷八 / 江原道 三陟府 : 土産 : 瑪瑠
여지도서(輿地圖書) / 江原道 三陟府 : 物産 : 瑪瑠, 弓幹桑, 紫檀香, 安息香. / 鬱陵島。 一云羽陵島。 在府東南海中。 三峯岌嶪撑空, 南峯稍卑。 風日淸明, 則峯頭樹木、山根、沙渚, 歷歷可見。 風便, 二日可到。 或云于山、鬱陵一島。 方百里, 在海中, 蔚珍之東。 新羅時恃險不服。 智證王十二年, 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 “于山國人愚悍, 難以威服, 可以計取。” 乃多以木造獅子, 分載船艦, 抵其國, 誑之曰: “汝若不服, 則放此獸, 踏殺之。” 國人恐懼來降。 高麗太祖十三年, 島人使白吉土豆獻方物。 毅宗十三年, 王聞鬱陵地廣土肥,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使金柔立往視之。 還奏曰: “島中有大山, 從山上東至海萬餘步, 南萬五千餘步, 北八千餘步。 東北皆有村落舊址, 共數十餘所, 往往有石佛、石塔、鐵鍾, 多柴胡、藁本、石南草。” 後崔忠獻獻議, 徙東郡民以實之, 海惡覆舟, 漂沒人物, 故還其民。 我太宗時, 流民多在海島, 遣按撫使金麟雨刷還四十餘戶。 還言: “島中竹大如杠, 鼠大如貓, 桃核大如升。” 我世宗二十年, 又遣萬戶南顥俘逃民金九生等七十餘人, 空其地, 僇其首逃者。 金麟雨三陟人, 初以南誾麾下士, 有軍功, 爲安仁浦萬戶、判長鬐縣事, 太宗朝爲按撫使。 今其子孫爲吏族, 多居府中。 肅宗遣營將張漢相搜討島中, 後因以爲例, 三年一往。
東海碑。 舊在鎭東萬弩島。 其文與篆, 皆許穆所爲。 中間爲風浪激折, 穆改書之。 後四十八年己丑, 府使洪萬紀改立于竹串島。 大字用舊本, 小字用新本。 ○ 銘曰: “瀛海漭瀁, 百川朝宗, 其大無窮。 東北沙海, 無潮無汐, 號爲大澤。 積水稽天, 浡潏汪濊, 海動有曀。 明明暘谷, 太陽之門, 羲伯司賓。 析木之次, 牝牛之宮, 日本無東。 鮫人之珍, 涵海百産, 汗汗漫漫。 奇物譎詭, 宛宛之祥, 興德而章。 蚌之胎珠, 與月盛衰, 旁氣昇霏。 天吳九首, 怪夔一股, 飆回且雨。 出日朝暾, 轇軋炫煌, 紫赤滄滄。 三五月盈, 水鏡圓靈, 列宿韜光。 扶桑沙華, 黑齒麻羅, 撮髻莆家。 蜒蠻之蠔, 爪蛙之猴, 佛齊之牛。 海外雜種, 絶黨殊俗, 同宥咸育。 古聖遠德, 百蠻重驛, 無遠不服。 皇哉煕哉, 大治廣博, 遺風邈哉。”
進貢 : 茅香, 紫檀香, 麻黃, 鸎粟殼, 貒全體, 羚羊角。
➋ 소공대(召公臺) : 태종(太宗) 3년에 황희(黃喜)가 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여 기근을 구제하며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삼척(三陟) 와현(瓦峴) 꼭대기에 대(臺)를 쌓고 소공대(召公臺)라 하였다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4]
“노루나 사슴, 갈대, 대나무 따위가 왕왕 바닷가 백사장에 떠밀려 오고,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서 바다를 건너 해변까지 와서는 그만 힘이 빠져 날갯죽지를 드리운 채 떨어져 아이들에게 잡힌 적도 많다. 그리고 어부나 뱃사공 가운데에는 혹 표류하여 섬 가에 당도했다가, 채소 뿌리와 나물 잎이 물결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것과 사면이 모두 검푸른 암벽뿐이되 오직 덩굴풀을 더위잡고 들어갈 수 있는 동문(洞門) 하나가 있는 것을 보았으나, 지키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어 그냥 주위를 서성댈 뿐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노를 저어 돌아온 자도 있었다.” 하였으니,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이들이란 말인가. 어쩌면 부역을 피하거나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혼인을 맺어 점점 인구가 불어났을지도 모를 일이고, 아니면 오랑캐 종족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섬을 점거하여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과연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면 어찌 한 번쯤 배를 타고 육지를 왕래한 적이 없겠으며, 어찌 다른 곳과 물건 하나 교역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의심이 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지만 결론을 얻지 못하여 끝내 이 섬을 모호하고 흐릿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으로 남겨두고 마니, 이 어찌 한퇴지(韓退之)가 이른바 “무릉도원(武陵桃源)에 관한 이야기는 참으로 황당하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中略).
(13) 성호사설 제3권 / 천지문(天地門) 울릉도(鬱陵島) : 《鬱陵島在東海中一名于山國逺可七八百里自江陵三陟䓁地登髙望之三峯縹緲隱見 :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데, 우산국(于山國)이라고도 한다. 육지에서의 거리가 7, 8백 리쯤 되며, 강릉ㆍ삼척 등지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가물거린다.》고 하였는데,
‘우산국(于山國)이 울릉도(鬱陵島)이다’라는 것이고, 육지(陸地)에서 7, 800리나 떨어져 있는 거리(距離)에서 울릉도(鬱陵島)가 가물거리게 보인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인간(人間)의 시야(視野)가 7, 800리를 넘나든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과연(果然) 가능한 일인가?
(14) 임하필기 제27권 / 춘명일사(春明逸史) 울릉도(鬱陵島)의 복숭아[欝陵島桃實]
古之筆記曰。欝陵島中。鼠大如猫。猫大如犬。葡萄大於卵。桃實大於匏。余未之信。聞一玉堂言。則陪往其大人三陟府。見一桃實。乃拾於潦水者也。半爲蟲食而大猶如椀。古記果然也。年例廵檢官。只泊島邊。採取紫檀而已。其深入則未也。雖有如許之物。烏能知之哉。: 옛날의 필기(筆記)에 이르기를, “울릉도에는 쥐가 고양이처럼 크고 고양이는 개처럼 크고 포도는 계란처럼 크고 복숭아는 박처럼 크다.” 하였다. 나는 이를 믿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옥당(玉堂)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내가 대인(大人)을 모시고서 삼척부(三陟府)에 갔다가 복숭아 하나를 보았는데, 이는 장마에 떠 내려온 것을 주운 것이었소. 그 절반은 벌레가 파먹었는데도 크기가 오히려 사발만큼이나 되었소.” 하였다. 그런즉 옛날의 필기에 쓰여 있는 얘기는 사실이었다. 연례(年例)로 순검(巡檢)하는 관원은 단지 섬가에 머물면서 자단(紫檀)을 채취할 따름이고 그곳에 깊숙이 들어가 살피지는 않으니, 비록 이러한 물건들이 있을지라도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15) 정관재집 제1권 / 시(詩)○132수(首) / 別關東伯滄洲金按使 益煕[관동백 창주 김 안사 익희 를 송별하다]
동쪽으로 천 리를 떠나 돌아올 줄 모를 터이니 / 東行千里不知回
한만한 참된 노님 점점 장쾌할 것이리라 / 汗漫眞遊轉壯哉
석양 속에 휘장을 걷으면 울릉도가 보이고 / 落日褰帷鬱陵島
맑은 가을 부절을 세우면 소공대일 것이로다 / 淸秋建節召公臺
큰 고래가 눈을 뿜으며 바람을 뚫고 솟구치고 / 長鯨噴雪衝風起
소공대(召公臺) 위에서는 멀리 울릉도(鬱陵島)가 보이고, 망양정(望洋亭) 앞에서는 월출(月出)이 보인다.
(16) 大東地志 卷十六 / 江原道 / 蔚珍 :
鬱陵島。 在本縣正東海中。 古于山。 一云武陵, 一云羽陵, 一云芋陵。 周二百餘里。 東西七十餘里, 南北五十餘里。 三峯岌嶪聳空, 純是石山。 自本縣, 天晴而登高望見, 則如雲氣。 便風二日可到。 倭人謂之竹島, 與日本隱岐州相近, 倭船漁採者時到。 自中峯至正東海濱三十餘里, 正西海濱四十餘里, 正南海濱二十餘里, 正北海濱二十餘里。 川溪六七, 竹田五六, 居址數十。 有楮田洞、孔巖、朱土窟、石葬古址、船泊處、待風所。 島之南有四五小島。 島中皆石壁, 石澗、洞壑甚多。 有狙鼠極大, 不知避人。 亦有桃李、桑柘、菜茹之屬, 珍木異草不知名者甚多。 ○新羅智證王十三年, 于山國恃險不服, 遣何瑟羅軍主金異斯夫擊降之。 高麗太祖十三年, 芋陵島遣白吉、土豆貢方物。 顯宗九年, 以于山國被東北女眞所寇廢農業, 遣李元龜賜農器。 十年, 于山國民曾被女眞虜掠來奔者, 悉令歸之。 德宗元年, 羽陵城主遣子獻土物。 仁宗十九年秋七月, 溟州道都監倉使李陽實遣人入蔚陵島, 取菓核、木葉異常者以獻。 毅宗十三年, 王聞鬱陵地廣土肥,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使金柔立往視, 柔立回奏云: “島中有大山, 從山頂東至海一萬餘步, 西至海一萬三千餘步, 南至海一萬五千餘步, 北至海八千餘步。 有村落基址七所。 或有石佛、鐵鍾、石塔, 多生柴胡、藁本、石南草。 然多巖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明宗時, 崔忠獻獻議以武陵土壤膏沃、多珍木・海錯, 遣使往觀之, 移東郡民以實之。 及使還, 多以珍木、海錯進之。 後屢爲風濤所蕩覆舟, 因還其居民。 忠穆王二年, 東界芋陵島人來朝。 辛禑五年, 倭入武陵島, 留半月而去。 ○本朝太宗朝, 聞流民逃于鬱陵島者甚多, 再命三陟人金麟雨爲安撫使, 刷出空其地。 麟雨言: “土地饒沃, 竹大如杠, 鼠大如貓, 桃核大於升。 凡物稱是。” 世宗元年, 武陵島民男婦共十七人, 行到京畿平邱驛飢頓, 上遣人救之。 二十二年, 遣縣人萬戶南顥率數百人, 往搜逋民, 盡俘金丸等七十餘人而還, 其地遂空。 成宗二年, 有告別有三峯島者, 乃遣朴宗元往覓之, 因風濤不得泊而還。 同行一船泊鬱陵島, 只取大竹、大鰒魚, 回啓云: “島中無居民矣。” 肅宗二十八年, 三陟營將李浚明還自鬱陵島, 獻其圖形及紫檀香、靑竹、石間朱、魚皮等物。 浚明乘船于竹邊串, 兩晝夜而還。 英宗十一年, 江原監司趙最壽啓言: “鬱陵地廣土沃, 有人居舊址。 而其西又有于山島, 亦廣闊。” ○土産: 藿, 鰒, 可支魚, 大小雜魚, 柏木, 香木, 冬柏, 側柏, 黃柏, 梧桐, 楓, 檜, 欕, 桑, 楡, 篁竹, 朱土, 鷹, 烏, 燕, 鷗, 貍, 鼠。
(17) 輿圖備志 卷十五 蘂城崔瑆煥星玉甫彙輯。 鼇山金正浩伯元甫圖編。 / 江原道 / 蔚珍縣 鬱陵島。 : 鬱陵島 / 本島。 在蔚珍縣之正東, 海中。 其水路未詳。 便風二日可到。 東直日本之隱岐州界。 天晴而登高望見, 則如雲氣。 古于山國。 一云武陵, 一云羽陵, 一云芋陵。 今稱鬱陵島。 周二百餘里, 東西八十餘里, 南北五十餘里。 中有三峯岌嶪聳空, 純是石山。 自中峯至正東海濱三十餘里, 至正南海濱二十餘里, 至正西海濱四十餘里, 至正北海濱二十餘里。 川溪六七處, 竹田五六所, 可居基址數十處。 有楮田洞、孔巖、朱土窟、石葬數處、船泊處、待風所。 又南有四五小島。 島中皆石壁, 石澗、洞壑甚多。 有狙鼠極大, 不知避人。 亦有桃李、桑柘、菜茹之屬, 珍木異草不知名者甚多。
土産 : 藿, 鰒, 可支魚, 諸大小雜魚不能詳。 海松子, 紫檀, 冬柏, 楓, 檜, 側柏, 黃柏, 梧桐, 欕, 桑, 楡, 篁竹, 朱土, 鷹, 烏, 鷰, 鷗, 貍, 鼠。
典故 : 新羅智證王十三年, 于山國恃險不服, 遣何瑟羅州軍主金異斯夫擊降之。 高麗太祖十三年, 芋陵島遣白吉、土豆貢方物。 顯宗九年, 以于山國被東北女眞所寇廢農業, 遣李元龜賜農器。 十年, 于山國民曾被女眞虜掠來奔者, 悉令歸之。 德宗元年, 羽陵城主遣子獻土物。 仁宗十九年秋七月, 溟州道監倉使李陽實遣人入蔚陵島, 取菓核、木葉異常者以獻。 毅宗十三年, 王聞鬱陵地廣土肥,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使金柔立往視。 柔立回奏云: “島中有大山, 從山頂東至海一萬餘步, 西至海一萬三千餘步, 南至海一萬五千餘步, 北至海八千餘步。 有村落基址七所。 或有石佛、鐵鍾、石塔, 多生柴胡、藁本、石南草。 然多巖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明宗時, 崔忠獻獻議以武陵土壤膏沃、多珍木・海錯, 遣使往觀之, 移東郡民以實之。 及使還, 多以珍木、海錯進之。 後屢爲 風濤所蕩覆舟, 因還其居民。 忠穆王二年, 東界芋陵島人來朝。 廢禑五年, 倭入武陵島, 留半月而去。 倭人謂之竹島, 今倭船漁採者時到。 本朝太宗朝, 聞流民逃于鬱陵島者甚多, 命三陟人金麟雨爲安撫使, 刷出空其地。 麟雨言: “土地饒沃, 竹大如杠, 鼠大如貓, 桃核大於升。 凡物稱是。” 世宗元年, 武陵民男婦共十七人, 行到京畿平邱驛飢頓, 上遣人救之。 二十二年遣蔚珍縣人萬戶南顥率數百人, 往搜逋民, 盡俘金丸等七十餘人而還, 其地遂空。 成宗二年, 有告別有三峯島者, 乃遣朴宗元往覓之, 因風濤不得泊而還。 同行一船泊鬱陵島, 只取大竹、大鰒魚, 回啓云: “島中無居民矣。” 肅宗二十八年, 三陟營將李浚明還自鬱陵島, 獻其圖形及紫檀香、石間朱、魚皮等物。 浚明乘船于蔚珍竹邊串, 兩晝夜而還。 英宗十一年, 江原道觀察使趙最壽啓言: “鬱陵島地廣土沃, 有人居舊址。 而其西又有于山島, 亦廣闊。”
※ ‘(16)+(17)’의 ‘지리지(地理志) 원문(原文)’은, 위(上) 또는 아래(下)에서 설명(說明)한 것들과 같은 내용(內容)들이다. 원문(原文)을 참고(參考)하는 뜻으로 올린 것임
(18)〈문헌비고 울릉도 사실(文獻備考鬱陵島事實)〉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울릉도(鬱陵島)는 울진(蔚珍)에서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고, 일본의 은기주(隱岐州)와 가까우며 세 봉우리가 허공에 높이 솟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조금 낮다. 날씨가 맑을 땐 봉우리 위에 있는 수목과 산 밑 모래톱까지도 역력히 보인다. 바람이 순풍이면 이틀이면 갈 수 있다. 땅은 4방이 백 리쯤 되고 시호(柴胡)ㆍ고본(藁本)ㆍ석남(石楠)ㆍ등초(藤草)ㆍ각종 향나무와 범고채[蘆]가 산출되며, 아름드리 대[竹]가 많으며, 범고채 열매[蘆實]와 복숭아씨가 큰 것은 술잔이나 되를 만들 만하다. 산고양이가 개만큼 크고 쥐가 고양이 만하다. 바다 가운데 큰 짐승이 있는데 생김새가 소와 같이 눈동자는 붉고 뿔이 없다. 떼를 지어 해안에 누웠다가 사람이 혼자서 오는 것을 보면 해치는데 대개는 사람을 만나면 흔히 달아나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 섬은 가지도(可之島)로서 본래는 우산국(于山國)이었는데, 신라 때 쳐서 빼앗았다가 뒤에 그들이 왜인들을 끌어들여 도적질을 할까 두려워서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몰아내고 그 땅을 비워두웠다. 고려 태조 13년 경인(930년)에 토착민의 우두머리가 와서 공물을 바치자 그에게 백길(白吉)이란 벼슬을 주고 토착민의 우두머리로 정조(正朝)를 삼았다. 중략(中略). 의종(毅宗) 13년 기묘(1159년)에 왕은 이 섬이 땅이 넓고 흙이 기름져 백성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溟州)의 수창(首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시찰하게 하고 다시 현(縣)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돌아와 보고하기를, ‘섬 안에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 10,000여 보, 서쪽으로 13,000여 보, 남쪽으로 15,000여 보, 북쪽으로 바다까지가 10,000여 보에 부락의 옛터가 일곱 군데 있어서 깨어진 주춧돌이 남아있으며, 석불(石佛)ㆍ석탑(石塔)과 철종(鐵鍾) 따위가 있으나 지면에 암석이 많아서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말았다. 중략(中略). ‘이 섬은 고려가 신라에서 받고, 아조(我朝)가 고려에게서 받은 것이며, 원래가 일본 땅이 아니다.’ 하여, 이러한 서한이 오고 가다가 잠잠해졌다. 무신 장한상(張漢相)을 보내어 울릉도를 조사하였고, 이때부터 법으로 정하여 3년마다 한 번씩 사람을 보내어 그 섬을 조사하고 관에서 도끼 15자루를 주어 그곳 대와 나무[木]를 베었고, 또 토산물을 채취해서 정부에 바치는 것으로써 하나의 신표[信]를 삼게 하였다. (끝).
(19) 울릉도(鬱陵島) /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1 / 논사(論史) - 한국 : 울릉도(鬱陵島)의 사적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5)
우리 동방(東方)에는 탄환(彈丸)이나 검은 사마귀만큼씩 자잘한 섬[島]이 많아서, 비유하자면 마치 산수화(山水畫)를 그리기 위해 어지러이 뿌려 놓은 크고 작은 먹물 방울과 같다. 그 가운데 울릉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것이 곧 옛날의 우산국(于山國)으로, 울릉(蔚陵)ㆍ우릉(芋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ㆍ무릉(武陵)이라고도 한다. 중략(中略).
신라(新羅) 지증왕(智證王) 13년 임진(512)에, 통틀어 사방 1백 리쯤 되는 우산국(于山國)이 지형의 험고(險固) 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자, 아슬나주(阿瑟那州) 아(阿)는 하(河)로도 쓰며, 아슬나주는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의 군주(軍主)인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을 병합(幷合)하기를 도모하면서 이르기를 중략(中略).
상고하건대, 왜인들이 어부(漁父) 안용복이 월경(越境)한 일로 와서 논쟁한 데 대해 《사설》에, “그들이 《지봉유설(芝峯類說)》과 예조(禮曹)의 회답(回答) 가운데 있는 ‘귀계(貴界)’니 ‘죽도(竹島)’니 하는 말을 들어서 증거를 대자, 조정에서 무신(武臣) 장한상(張漢相)을 울릉도로 보내어 살펴보게 했는데, 그의 복명에 ‘남북은 70리요, 동서는 60리이며 …… ’ 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누차 사신을 보내어 그 일을 무마시켰다.” 하였다. 또 이익(李瀷)은 논하기를 중략(中略),
우리나라의 바다는 가장 중요한 적로(賊路)인데, 공연히 비워 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실성왕(實聖王) 원년 임인(402)은 진 안제(晉安帝) 원흥(元興) 원년인데, 이해에 왜인들이 대마도에 진영(鎭營)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장한상(張漢相)이 그곳을 탐사하고 와서 보고한 별지(別紙)에,
“나무는 동백(冬柏)ㆍ자단(紫檀)ㆍ측백(側柏)ㆍ황벽(黃蘗)ㆍ괴목(槐木)ㆍ유자[椵]ㆍ뽕나무ㆍ느릅나무 등이 있고 중략(中略),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울릉도는 토지가 비옥하여 대나무의 크기는 외나무다리를 놓을 만하고 쥐[鼠]의 크기는 고양이만하고 복숭아씨의 크기는 되[升]만하다.” :《輿地勝覽》。鬱陵土地饒沃。竹大如杠。鼠大如猫。桃核大如升。
《備考 : 鬱島物産。柴胡、藁本、石楠、藤草。諸香木蘆竹。多合抱者。蘆實桃核。大可爲杯升。: 문헌비고(文獻備考) : 울릉도의 물산으로는 시호(柴胡)ㆍ고본(藁本)ㆍ석남(石楠)ㆍ등초(藤草)와 모든 향목(香木)과 노죽(蘆竹)이 있는데, 여러 향목과 노죽은 크기가 아름드리 되는 것이 많고 노죽의 열매와 복숭아 씨의 크기는 술잔이나 되[升]만큼 크다. 【今探視後。柴檀香、蘆竹、朱土、可之皮等屬。納于備局。: 지금은 탐시(探視) 후에 자단향(紫檀香)ㆍ노죽(蘆竹)ㆍ주토(朱土)ㆍ가지피(可之皮) 등속을 채취하여 비국(備局)에 공납한다.】則非徒倭奴。湖沿海人。潛入留住。伐松製船。斫蘆竹。採鰒、藿、魚。或入搜驗。: 왜노(倭奴)뿐만이 아니라, 호남(湖南) 연해(沿海)에 사는 사람들도 몰래 이곳에 들어와 주거하면서 소나무를 벌채하여 배[船]를 만들며, 노죽(蘆竹)을 베어내고 전복이나 미역ㆍ고기 등을 채취하는 것을 가끔 들어가서 수색한다고 했다. 有石香一種。狀如煤石。[石炭也] 燒之有香。平蔚氓或得出。傳播關東諸寺云耳。: 또 일종의 석향(石香)이 있어 모양이 마치 매석[煤石 석탄이다]처럼 생겼는데, 불에 태우면 향내가 나므로, 평해(平海)ㆍ울진(蔚珍) 등지의 백성들이 혹 가지고 나와서 관동(關東) 지방의 여러 절[寺]에 전파했다고 한다.》고 하였다.
➨ 위의 설명(說明)에 따르면 : 『왜노(倭奴)와 호연해인(湖沿海人)들까지도 울릉도(鬱陵島)에 들어가 살면서 토산물(土産物)을 채취(採取)해갔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重要)한 구절(句節)은, 『호연해인(湖沿海人)』이다. 도대체 반도(半島) 땅의 어느 곳에 “호연해(湖沿海)”이라고 불릴 곳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호연해인(湖沿海人)”이란 : 〈호수(湖水)와 바다(海)에 연(沿)해 사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곳이 “반도(半島) 땅” 어디에 있느냐? 문제(問題)인데… …한마디로 기막힌 일이다.
우리 후손(後孫)들은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는 걸까? ‘호연(湖沿)’을 설명(說明)하기를 호남(湖南)지방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반도(半島) 땅 어디가 호(湖)의 남(南)쪽 지방인가? 한 번 물어보자?』 2차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일어난다면 가능(可能)할까? 반도인(半島人)들은 꿈(夢)을 먹고사는 무리(衆) 들일까? 상상(想像) 속의 허상(虛像)을 바라보고 사는 무리(衆) 들일까?
(20) 성호사설(星湖僿說) 제3권 / 천지문(天地門) 울릉도(鬱陵島) : 朝廷遣武臣張漢相徃審之南北七十里東西六十里木有冬栢紫檀側栢黄蘖槐椵桑榆無桃李松橡禽獸有烏鵲猫䑕水族有嘉支魚穴居巖磧無鱗有尾魚身四足而後足甚短陸不能善走水行如飛聲如嬰兒脂可以燃燈云扵是 : 조정에서 이에 무신 장한상(張漢相)을 울릉도로 보내어 살피게 했는데, 그의 복명에, “남북은 70리요, 동서는 60리이며, 나무는 동백ㆍ자단(紫檀)ㆍ측백ㆍ황벽(黃蘖)ㆍ괴목(槐木)ㆍ유자ㆍ뽕나무ㆍ느릅나무 등이 있고, 복숭아ㆍ오얏ㆍ소나무ㆍ상수리나무 등은 없었습니다. 새는 까마귀ㆍ까치가 있고 짐승은 고양이와 쥐가 있으며, 물고기는 가지어(嘉支魚)가 있는데, 바위틈에 서식하며 비늘은 없고 꼬리가 있습니다. 몸은 물고기와 같고 다리가 넷이 있는데, 뒷다리는 아주 짧으며, 육지에서는 빨리 달리지 못하나 물에서 나는 듯이 빠르고 소리는 어린아이와 같으며 그 기름은 등불에 사용합니다.” 하였다.
① 자단(紫檀) : [국어대사전] : 콩과의 상록 활엽교목. 높이는 10미터 이상이며 잎은 어긋나고 겹잎으로 원형 또는 넓은 타원형이다. 나무껍질이 자줏빛이고 여름철에 누런 꽃이 총상(總狀) 화서로 핀다. 재목은 건축, 가구 따위의 재료로 쓴다. 인도 남부에서 스리랑카에 걸쳐 분포한다. [국어대사전]
② 자단(red sandal wood 紫檀) [대한건축학회 건축용어사전] : 콩과의 상록낙엽활엽교목. 인도 및 스리랑카가 원산. 대만 · 필리핀 등지에 분포. 재목이 단단하고 심재는 암홍자색을 띠며 아름답고 구조재 · 가구재 · 장식재로 쓰임. 학명:pterocarpus santalinus.
“자단(紫檀)은, 한반도(韓半島)에서 자생(自生)하는 식물이 아니다”라고 설명(說明)한다. 이걸 어떻게 반도(半島) 땅에서 설명(說明)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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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산물(土産物)이란 : 그 지방(地方)에서 나는 물건(物件) 또는 토지(土地) 소산(所産)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그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울릉도(鬱陵島)는, “우릉도(芋陵島), 우릉성(羽陵城), 울릉도(蔚陵島), 울릉도(鬱陵島), 우릉도(于陵島), 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산출(産出)되는 토산물(土産物)을 보면 : 열대(熱帶) 혹은 아열대(亞熱帶) 기후(氣候)에서 자랄 수 있는 것들의 설명(說明)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울릉도(鬱陵島)’는? 오각형 형태의 섬으로 “동서(東西) 길이 10km, 남북(南北) 길이 9.5km, 해안선(海岸線) 길이는 64.43km”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동서는 약 25리요, 남북은 약 24리” 정도(程度) 되는 조그만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곳은 결코 열대(熱帶) 혹은 아열대(亞熱帶) 기후(氣候)를 가진 땅이 아니다.
❶ 그러나 위의 글들을 보면 : 『남북(南北) 70리[28km], 동서(東西) 60리[24km] 정도(程度)나 되는 큰 섬(島)』으로 현재(現在)의 울릉도(鬱陵島)보다 2배(倍) 이상(以上) 되는 큰 섬으로 묘사(描寫)되어 있다.
➋ 특산물(特産物) 중에서『자단향(紫檀香)·안식향(安息香)·향목(香木)·노죽(蘆竹)이 있는데, 향목(香木)과 노죽(蘆竹)은 크기가 아름드리 되는 것이 많고 노죽(蘆竹)의 열매와 복숭아씨의 크기는 술잔이나 되(升) 만큼 크다. 산 고양이가 개만큼 크고, 쥐가 고양이만하다.』고 하였다.
여러 토산물(土産物)을 보면 : ‘자단향(紫檀香) 또는 자단목(紫檀木), 안식향(安息香)’ 등 역시(亦是) 한반도(韓半島) 울릉도(鬱陵島)에서는 자랄 수 없는 ‘아열대(亞熱帶) 지방(地方)의 특산(特産)’이다.
이런 사실(事實), 기록(記錄) 등을 다 알면서도 옛 울릉도(鬱陵島)가 반도(半島)의 울릉도(鬱陵島)라고 하는 무리(群) 들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가(國家) 자체(自體)가 “집단(集團) 최면(催眠)”에 빠진 군중(群衆)들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니면 조선사(朝鮮史)와 관련(關聯)된 한 분야(分野)에서만큼은 세뇌(洗腦)에 억압(抑壓)된 ‘군중심리(群衆心理)=대중심리(大衆心理)’로 확고(確固)하게 무장(武裝)되어, 사고(思考)할 수 없는 뇌세포(腦細胞)로 변형(變形)되어 DNA화 되어버렸다는 것인가?
○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는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 영토(領土)다. 이건 오리발을 내밀 수 없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문제(問題)다.
➊ ‘거짓말’을 거짓이 아니라고 호도(糊塗)하려니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➋ “능력(能力)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포장(包裝)하다 보니, 한국(韓國) 언어(言語)가 꼬여 다시 이를 해설(解說)해야 하고,
➌ 한국인(韓國人)이 한국(韓國)말을 하고, 그걸 다시 해석(解釋)한다거나 해설(解說)해야 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멍청한 짓이다.
➨ 『20세기(世紀) 이전(以前)의 옛 조선(朝鮮) 영토(領土)』와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대한제국(大韓帝國)과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영토(領土)』는, 엄연(儼然)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이걸 인정(認定)해야 한다.
왜냐하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중원(中原) 대륙(大陸)의 땅”에서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와 그 부속도서(附屬島嶼)’는,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이 옛 조선(朝鮮)을 해체(解體)하고, 만들어 놓은 땅이기 때문이다.
물론(勿論) 그것도 모자라 ‘남(南)과 북(北)’으로 갈라놓고, ‘패전국(敗戰國) 일제(日帝)’는 ‘독도(獨島)와 한반도(韓半島)’를 다시 노리고 있다. 이런 실정(實情)을 전혀 모르는 무지무식(無知無識)한 ‘자(者)’가 “이 나라(國)”마저 파멸(破滅)의 길로 이끌려 한다.
백성(百姓)들은 분노(憤怒)하면 행동(行動)한다는 것쯤도 알아두자.
2023년 05월 11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