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 자료들-37. 위만이 터를 잡은 상하운장은 만리장성 안쪽에서 북경부근의 지역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위만이 거주한 낙랑군 상하운장은 팔달령만리장성 안쪽에서 북경까지가 아닐까?
『사기』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조선왕 위만(衛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 요동 밖의 순찰지역)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한나라 연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의 옷을 입고는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나와 패수를 건너 진시황 진(秦)나라 영토였던 옛 비어 있는(秦故空地) 상하장(上下鄣: 낙랑군 상하 雲鄣)에 거주하면서, 점차 진번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을 도읍으로 정했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 朝鮮蠻夷及故燕, 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참고: 패수(浿水)는 조하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환단고기 249p), 위만이 패수를 건너 머문 상하 운장(雲鄣)은 북경 북쪽을 흐르는 조하(浿水)의 동쪽임을 지도로 명확히 밝히고 있다(환단고기 254p). 상하 운장은 진장성 안쪽과 북경의 북쪽을 흐른 조하의 사이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한국인이 많이 찾아가는 팔달령(八達嶺) 만리장성 서쪽에서 북경의 조하까지의 지역을 상하 운장이 있던 지역이라 추정할 수 있을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낙랑군에 운장이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낙랑군은 북경지방을 포함하여 설치된 군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 섭하가 조선비왕 장을 찔러죽이고 도망친 새(塞)가 평주 유림관(楡林關)이라고 하였는데, 독사방여기요(讀史方與記要)에,
“유림관(楡林關)은 산해관(山海關) 서쪽 40里 지점이고, 일명 유관(楡關)으로 대저 번융(蕃戎)을 제(制)하여 요해(要害)에 웅거한 것이 실로 유주(幽州)와 평주(平州)사이의 천험(天險)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산해관 서쪽이므로 당산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XXX가 주장하는 청천강을 건너 도망칠 곳이 아니다.
○한무제는 위만과의 전쟁은 결국 승리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한사군(漢四郡)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조선열전(『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이다. 사마천은 여기에 위만(衛滿朝鮮)에 대한 기록을 하였는데, 이미 전술하였다. 그중 한사군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또 사군 설치 이후에는 위만을 공격했던 한나라 장수들에 대해 모두 죽이거나 처벌을 하여 위만과의 전쟁이 성공적인 전쟁이 아니었음을 보인다.
- 한무제 원봉3년 여름 니계의 대신 참은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해 왔다. 그래도 왕검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우거의 대신 성기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관리를 공격해 왔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과 대신 로인의 아들 최에게 명해 백성을 달래게 하는 한편 성기를 주살했다. 그리하여 조선을 평정한 한나라는 그 땅에 4군을 설치하였다.
참은 훼청후에 봉하였고, 한음은 적저후에 봉하였으며, 왕겹은 평주후에 봉하였고, 장항은 기후에 봉하였다. 최는 그의 아비가 죽기로 공을 세웠다고 하여 온양후에 봉해졌다.
좌장군(순제)은 불려와서 공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여 계책에 어긋나게 했다는 죄를 받아 기시형(棄市刑: 시중에서 목을 잘리는 형)을 받았다. 누선장군(양복)은 역시 군사가 열구에 이르렀을 때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자신의 멋대로 공격하다가 많은 군사를 잃어 주살에 해당 되지만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 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 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己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훼淸候 陰爲荻苴候 唊爲平州候 長爲幾候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候 左將軍 徵至坐功相嫉 乖計 棄市 樓船將軍 亦坐兵至列口 當待左將軍 檀先縱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참고: 위의 사기 조선열전은 사마천(B.C145~86)이 한 무제(B.C 141~87)의 명으로 기록한 중국 최초의 정사로 원문에 보이는 밑줄 친 글자는 사마천이 기록한 글자이고 집해(集解)는 약 560년 후 송나라때(420 - 479) 배인(裴駰)이 추가로 보충 설명한 내용이다. 사기를 쓴 사마천은 위만조선이 서기전 108년 한무제에게 망하자 한무제가 4군을 설치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사기에는 한사군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사기(史記)』원문에 표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1909년 판본).
이로써 마침내 조선을 정벌하여 사군을 삼았다(以故遂定朝鮮 爲四郡).
[집해] (4군은)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이다."라 했다.
([集解] 眞番, 臨屯, 樂浪, 玄菟也.)
***참고: 사마천(BC 145-86)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한 BC 108년 생존해 있던 인물이다. 그러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고만 하였을 뿐 명칭을 기재하지 않았다. 이후 약 560여 년이 지나 송나라 때 배인이 집해에서 4군은 [集解] 眞番, 臨屯, 樂浪, 玄菟也라고 기록하여 한사군의 소멸과 추정 위치가 매우 부정확하게 되었다.
***참고: 한(漢)나라의 위만조선 침략은 실패한 전쟁으로 보인다. 위만에서 항복한 참은 훼청후에 봉하였고, 한음은 적저후에 봉하였으며, 왕겹은 평주후에 봉하였고, 장항은 기후에 봉하였다. 최는 그의 아비가 죽기로 공을 세웠다고 하여 온양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한나라의 장수인 좌장군(순제)은 불려와서 공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여 계책에 어긋나게 했다는 죄를 받아 기시형(棄市刑: 시중에서 목을 잘리는 형)을 받았다. 누선장군(양복)은 역시 군사가 열구에 이르렀을 때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자신의 멋대로 공격하다가 많은 군사를 잃어 주살(誅殺)에 해당 되지만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이는 실패한 전쟁의 책임을 물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 사기집해(史記集解)와 사기 색은에 한음이 봉해진 적저후 지역은 “발헤(渤海)에 속해있다”고 했는데, 이 지역은 지도상 산동반도와 북경의 중간쯤에 위치한 지역이다. 또 왕겹이 봉해진 평주후 지역은 사기집해와 사기색은에 “양부에 속해있다”라고 했는데, 양부는 사기정의에 따르면 산동반도 연주 부근이다. 결국 조선에서 항복한 자들이 제후로 봉해진 땅은 산동반도 북부에서 발해지역이다.
항복한 자들에 대해서는 항복한 지역을 통치하도록 봉토를 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렇지 못했던 것은 한(漢)이 위만을 침략한 이후 위만의 영토를 차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며, 사마천은 이 사실을 솔직히 쓰지 못하고, 참전한 장군들이 주살되거나 주살을 면한 정도의 벌을 받고, 항복한 자들이 중국의 다른 지역에 제후로 봉해졌다고 썼을 가능성이 있다.
○『환단고기』의 위만과 우거에 대한 기록
-북부여 해모수단군 재위 31년 임진(BC 209)년에 연나라 노관(盧館)이 다시 요동의 옛요새(故塞: 하북성 계현 소재)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동쪽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 潮白河)이다.
-북부여 초대 해모수단군 재위 45년 병오(BC 195)녕에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달아나자 그 일당인 위만이 우리나라에 망명을 구하였다. 임금(해모수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병이 들어 능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다. 이때 번조선왕(番朝鮮王) 기준이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여러번 놓지고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삼고, 상하 운장을 떼어주어 지키게 하였다...(중략)...
2세 모수리단군 때 (번조선의) 기준(箕準)이 떠돌이 도적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재위 2년(BC 193)년 임금께서 상장 연타발을 보내어 평양(海城 부근 추정)에 성책을 세워 도적 위만을 대비하게 하셨는데, 위만도 싫증이 나고 괴롭게 여겨 더 이상 침노하여 어지럽히지 않았다...(중략)
3세 고해사 단군 재위 49년 경신(BC 121)년 임금께서 친히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남려성에서 도적 위만을 격퇴하고 그곳에 관리를 두었다.
4세 고우루단군 때 고우루 원년 신유(BC 120)년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지키게 하셨다....(중략)...재위 13년 계유(BC 108)년 한나라 유철(劉徹: 한무제)이 평나(平那: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를 침입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크게 쳐들어 왔다. 이 때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들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가 크게 떨쳤다.
***참고: 위만이 기준을 몰아낸 곳은 번조선(番朝鮮)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유철의 군대에 대항하여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서 한나라 군대를 격파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