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적 혁명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상적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와 카를 마르크스(1818~1883), 엥겔스가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그 엄청난 이론적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며, 마르크스가 없었더라면 엥겔스는 한 세기를 휩쓴 정치운동의 상징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이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얼굴이었고, 엥겔스는 언제나 그 뒷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망한 뒤에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엄청난 생산력과 역동성을 통찰한 사람으로 금세 다시 조명을 받았으나, 엥겔스는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사실상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이다. 영국 저술가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이 공산주의 파산이 선고된 지 10년 뒤인 1999년에 나온 것은 상징적이다. 영국의 소장 역사학자 트리스트럼 헌트(36·런던 대 퀸 메리 칼리지 교수)가 2009년에 펴낸 <엥겔스 평전>은 엥겔스를 이렇게 홀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엥겔스가 받아야 할 정당한 역사적 자리를 배정해준다.
이와 함께 이 전기는 부제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가 암시하는 대로, 엥겔스의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삶을 해부한 책이기도 하다. 아마도 엥겔스는 자본가로 살면서 자본주의 타도운동을 지도했던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그는 독일 라인란트 지방 부퍼탈에서 방적공장을 운영하는 산업 자본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가 영국 맨체스터에 동업자와 함께 세운 공장을 맡아 운영하기도 한다.
동시에 엥겔스는 상류층의 스포츠인 여우사냥을 다니기도 하며 최고급 포도주를 즐겨 마시고 매력적인 여성들과 어울리며 인생의 온갖 즐거움을 탐하는 전형적인 유복한 부르주아의 삶을 산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엥겔스는 부르주아 결혼제도를 거부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을 보면 아일랜드 노동자계급 출신의 메리 번스와 20여 년 동안 동거했으며, 메리가 죽자 그 여동생 리지 번스와 다시 15년을 살기도 하였다.
엥겔스가 자본가의 삶을 산 것은 절반쯤은 아버지의 압박을 받아들인 결과였으나, 엥겔스는 평생 아버지와 불화하면서 살아간다. 17살 때 김나지움을 자퇴한 것도 아버지가 보기에 인생에 아무 쓸모없는 ‘문학나부랭이’나 끼고 사는 것이 못마땅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엥겔스는 아버지 사업을 전수받는 일에 투입됐으나, 마음은 계속 딴 세계를 향하고 있었으며, 스무 살 무렵 엥겔스는 독학으로 헤겔을 공부해 청년 헤겔파, 곧 반체제적 철학운동에 눈을 뜬다. 1841년 프로이센군대에 입대하여 베를린의 포병 근위대에 배속된 그는 1년 동안 청강생으로 베를린대학에 드나들기도 한다. 이 무렵 베를린대학 철학교수로 부임한 사람이 프리드리히 셸링이었다.
젊은 날 헤겔의 동지였다가 이내 갈라져 원수가 된 셸링은 헤겔철학이 낳은 청년좌파들의 사상을 때려 부수라는 특명을 받은 터였고, 셸링의 강좌가 열린 ‘베를린대학 6호실’은 ‘19세기 유럽 준재들의 집결지’였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미하일 바쿠닌, 쇠렌 키르케고르가 함께 강의를 들었고, 엥겔스는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 자신의 철학적 스승에게 논리의 포격을 가하는 셸링의 강의를 열심히, 그러나 마음으로는 논박하면서 받아 적는다.
엥겔스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마르크스라는 평생 동지를 만난 일일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라인신문> 편집장을 하던 1842년 우연히 신문사에 들러 장래의 인생 파트너를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싱거운 만남이었다. 그러다 1844년 여름 파리에 망명 중이던 마르크스를 다시 만난다. 이번에는 완전한, 되돌릴 수 없는 의기투합이었다. 이때부터 ‘제1바이올린을 보조하는 제2바이올린’의 삶이 시작된다. 1849년 마르크스 가족이 런던에 망명한 뒤 엥겔스는 맨체스터 공장을 이어받아 20년 동안 공장주 노릇을 한다.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마르크스의 생계를 뒷받침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헌신적인 지원 덕에 <자본>이라는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이론적 무기를 벼려낼 수 있었다.
이 전기는 엥겔스의 독자적인 삶이 1883년 마르크스가 죽고 난 뒤에 열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삶도 먼저는 마르크스 사상을 보위하고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론을 널리 퍼뜨리는 데 바쳐졌다. 엥겔스의 중요한 과업은 마르크스가 초고 상태로 남기고 간 <자본>의 원고들을 정리해 제2권(1885), 제3권(1894)으로 갈무리해낸 일이었다. 1889년 엥겔스는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 분파를 아울러 새로운 국제노동자협회(제2인터내셔널)를 결성했다. 제2바이올린이 마침내 제1바이올린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1890년대의 엥겔스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 전략을 적극 지지했다.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은 정치 전략의 수정이었다. 엥겔스는 “의식 있는 소수가 의식 없는 대중을 끌고 가는 혁명의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의회와 투표를 통해 집권할 수 있다면 그런 방법을 적극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엥겔스는 초기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한 원형을 거기서 발견했다.
“노동계급운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원래는 억압받는 자들의 운동이었다. … 양쪽 다 박해당하고 괴롭힘 당했다. … 그런데 그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거기서 자극을 받아 멈추지 않는 승리의 행진을 계속한 것이다.” 1895년 엥겔스가 숨을 거두었을 때 후배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친구요 조언자요 지도자요 전사”였던 “정신의 거인”을 잃었다고 추도했다.
첫댓글 正- 反-合-正- 反-合-正- 反-合-正- 反-合-
뭔 뜻인지 몰것다 ..
사전에 이렇게,"헤겔의 변증법에서 논리 전개의 세 단계.定立.反定立.綜合을 이름".이라고 나도 몰라, 울아 맞어?
고3시절 사회선생님의 강의를 떠올려 보자면 세상은 변화하며 발전하는데, 사회체제도 그 결과라는 것이 헤겔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주요내용이며 공산주의이론의 기초가 된 변증법적 유몰론은
과거 봉건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는데(正,these:테제),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발전하였으며(反,antithese;안티테제), 자본주의의 폐혜인 빈부격차, 부의 세습 등으로 말미암아 기층인민의 이상적 세상인 사회주의 공산국가가 마침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合,synthese;진테제)이라는 내용이라고 하시었~~~~~다!!!
테제,안티테제,진테제...등은 좌빨들 모임에 가면 요즘도 자주 쓰는 말인거 겄드라...지귈늠들!!!
호로 자식이구면, 처제하고 지랄을 한놈이 짐승이지 사람이야.............
그래도 처제를 델고살면서 처가를 떠나지 않으니 생판 다른 여자에게 가지 않은 것은 다행아이라...왜놈들은 형사취수라고 형이죽으면 마눌라가 있어도 형수를 보살피고 산다드라!!! 월매나 훈훈한 미덕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