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개혁의 시대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개혁 상황은 그간 우리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개혁의 모습과는 상당 부분 다르다.
역사 속의 모든 개혁은 이른바 특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대다수 민중들의 박수 속에서 진행되던 축제였다. 반면 지금의 개혁은 축제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민중들을 억누르는, 무겁고 우울한 「장례」로 나타난다. 뚝 떨어진 일감, 고용조정이란 이름하에 진행되는 대량 해고, 늘어나는 노숙자들, 끝간 데 모를 불황….
민중들이 피부로 느끼는 개혁의 실체가 이러하다 보니 『이게 무슨 개혁이냐?』는 반발이 국민들의 심중에 내재하고, 어떤 계기만 생기면 폭발할 위험성까지 있다. 거리로 내몰린 회사원,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왜 우리만 당해야 하느냐」는 억울함이 배어 있는 한 현재의 개혁은 잿빛 우울함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이다. 현재의 개혁은 고통을 받아야 할 사람들과 위안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서로 뒤바뀌어 있는 상황이다. 개혁의 고통을 당해야 할 사람들, 즉 현재의 위기를 불러온 사람들은 오히려 큰소리치고 있는 반면 개혁으로 위로를 받아야 할 민중들은 현재의 위기 속에서 가족의 해체까지 경험하는 극단적 고통을 겪고 있다. 이것이 대다수 민서(民庶)들이 느끼는 개혁의 실체다.
개혁의 정의는 간단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라는 탁월한 언명을 빌려 개혁을 정의하면 「개혁주체와 개혁대상과의 투쟁」이다. 이것이 개혁의 핵심이다. 현재는 물론 유사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개혁은 주체와 대상과의 투쟁이었고 주체와 개혁대상도 분명했다. 현재의 개혁이 문제투성이라는 것은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이 불분명하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개혁할 수밖에 없었던 고려 말
우리 역사에서 개혁이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던 것은 신라 말기와 고려 말기, 그리고 조선 말기의 세 차례였다. 물론 오늘날처럼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이 불분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라 말기의 개혁대상은 진골 귀족이었고 개혁주체는 호족과 6두품 세력이었다. 고려 말의 개혁대상은 권문세족이었고 개혁주체는 국왕과 신흥 사대부였다. 조선 말기의 개혁대상은 노론이었으며 개혁주체는 정조나 대원군 같은 개혁 군주세력 및 당시 야당이었던 소론, 남인 그리고 중인들이었다.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역동적이고도 승리한 개혁 사례는 고려 말 조선 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개혁주체 세력의 좌절과 패배의 연속으로 나타났지만, 근 한 세기에 걸쳐 꾸준히 개혁을 추진한 결과 결국 개혁주체 세력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고려 말이 왜 개혁의 시대일 수밖에 없는지는 『고려사』의 한 구절을 보더라도 충분하다.
『요즘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기도 하고, 군(郡) 전체를 포함해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며,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팔구 할을 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간악한 도당」이 고려 말의 개혁대상인 권문세족이다. 이들은 고려의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독차지한 특권층이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고려의 최고 권력기구인 도평의사사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막대한 규모의 농장(農莊)을 소유했다.
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의 거대한 농장을 한 명이 소유하고 있으니 그 땅에 살던 수많은 민서들의 고통이 어떠했을지는 불문가지다. 게다가 어떤 곳은 땅 주인이 대여섯 명이나 돼 수확의 팔구 할을 세금으로 빼앗기다 보니 일반 농민들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논밭에 달라붙어 개미처럼 일해도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
이뿐만 아니라 삼봉 정도전이 개탄한 대로 전조(田租)를 바칠 때는 인마(人馬)의 접대비를 치러야 하고, 요청에 의해 강제로 물건을 사야 하며, 노자로 쓰는 돈과 조운(漕運)에 드는 비용 등을 모두 일반 백성들이 부담해야 했다.
게다가 공납과 부역까지 국가에 바쳐야 하니 민중들은 삶 자체가 고달픈 업(業)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노비가 돼 국가에 대한 공납과 부역을 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긴 농민들은 권문세족의 농장에 투탁(投託)해 스스로 자유민임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농업국가인 고려에서 농민 생활의 붕괴는 곧 국가 조세체계의 붕괴와 병농일치제였던 국방체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것은 나라 자체가 붕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라가 망하면 국왕도 없다는 점에서 고려 말의 많은 국왕들이 개혁에 나선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고려의 권문세족과 현재의 지도층
고려의 왕들은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돼 개혁대상과의 투쟁에 나섰다. 당시 개혁 대상, 즉 고려의 정치·경제적 특권을 한손에 쥐었던 권문세족의 수는 불과 60~7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왕들은 매우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는 개혁대상이 소수이긴 하지만 실제로 유무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의 권문세족이 60~7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개혁대상자로 꼽히던 사람들 숫자와도 묘하게 일치한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경제전문가들이 IMF체제를 상상도 못하던 작년 10월에 이미 한국의 외환위기를 예언했던 애널리스트 스티브 마빈(Stephen Marvin)은 「신동아」(98년 8월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개혁대상자 수를 간단히 정의한다.
『지금의 모든 문제는 70명 정도의 지도층 인사 때문에 시작된 겁니다. 재벌 그룹 총수 50명, 잘못된 정책 결정을 내린 재경부 고위관리 10명과 한국은행 등의 관계자 10명이 그들이지요. 나머지 한국민들은 잘못이 없어요. 그동안 정부와 재벌은 고임금과 국제경쟁력 상실, 과소비만 얘기해왔는데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예요』
스티브 마빈은 현재 한국의 개혁대상자가 70명이라고 꼭 집어서 말한다(필자는 그가 규정한 개혁대상자 수가 지나치게 축소됐다고 보지만). 고려 말의 개혁대상자와 마빈이 규정한 개혁대상자의 수가 비슷하다는 점은 기묘해 보이기는 하나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시대의 고금을 떠나 권력을 장악한 소수를 상대로 투쟁하는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확인해주는 것뿐이다. 오늘날 객관적으로 범법 사실이 확인된 부패 정치인 한두 명을 처리하는 데도 각종 논리가 다 동원되는 현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여하간 고려 말에 60~70여 명에 불과한 개혁대상과의 투쟁은 험난한 과정이었다. 신흥사대부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이전 고려의 개혁주체 세력은 국왕이었다.
그리고 그 첫번째 주자는 고려의 26대 충선왕이었다. 그는 중국 강남(江南)의 중봉명본(中峰明本)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도 하고, 중국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차려놓고 조맹부 같은 원나라 제일의 문사들과 이제현 같은 고려의 사대부들간에 교류를 주선하기도 했던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가 처음 개혁정치의 깃발을 든 것은 세자 때였다. 원나라에서 귀국한 그가 충렬왕을 대리청정하면서 개혁을 수행하자 권문세족들의 전횡에 신음하던 백성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자.
『세자가 왕을 뵈러갈 때 백성들이 길을 막으며 말을 둘러싸고는 원한을 호소하였으므로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세자가 모두 받아주었으니 이는 대개 권세가들이 남의 민전을 탈취해도 유사(有司)가 능히 청단(聽斷)치 못한 까닭이었다』
충선왕의 좌절
그러나 백성의 환호 속에 시작된 개혁은 불과 4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개혁대상인 권문세족들의 집요한 저항 때문에 세자는 원나라로 쫓겨났던 것이다.
권문세족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안고 원나라로 쫓겨간 세자는 3년 후 충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면서 다시 개혁작업을 벌이게 된다.
충선왕은 27조에 달하는 즉위조서에서 개혁대상인 권문세족을 「세가(勢家)」 또는 「호활(豪猾)의 무리」라고 강력히 비판하면서 박전지, 오한경 등의 4학사를 개혁의 주체로 기용한다. 이들 4명의 사대부는 권문세족과는 사상이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점에서 이들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무렵 고려에는 홍자번(洪子藩)이라는 매우 개혁적인 재상이 있었다. 그는 충렬왕에게 지방수령 등 관리의 비정과 공역(貢役)의 폐단 등을 담은 폐정 개혁안인 「편민(便民) 18사(事)」를 제시해 진재상(眞宰相)이라 불릴 정도로 호평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의 신분이 권문세족이었기 때문이다. 권문세족 출신의 양심적 관료인 그가 지목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개혁대상은 지방의 수령이나 아전 등이었다.
그러나 본질이 아닌 지엽에 집착한 개혁은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계급적 특권을 포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충선왕이 권문세족과는 이해관계가 전혀 다른 사대부를 개혁주체 세력으로 기용한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러나 충선왕의 두 번째 개혁도 8개월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개혁대상인 권문세족들이 또다시 원나라의 힘을 빌려 충선왕을 끌어내린 것이다. 충선왕은 10년 후에 다시 즉위하지만 두 번의 좌절을 겪은 그는 이번에는 그다지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다.
충선왕은 이후 원나라의 황위계승 분쟁 등 복잡한 원의 정세에 개입했다가 다시 원나라로 끌려간 후 머나먼 토번(吐蕃)으로 유배됐다. 그와 함께 개혁을 추진했던 사대부 이제현이 1323년 연경에서 그 머나먼 토번의 유배지까지 찾아가는 발걸음은 실패한 개혁주체의 비장한 동지애를 느끼게 한다.
호문애민(好文愛民)의 군주였던 충선왕의 개혁 실패는 한 가지 교훈을 던져주었다. 개혁은 개혁대상의 사상을 압도할 개혁이념과 이를 수행할 개혁주체세력이 강력하게 형성돼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이다.
또 충선왕이 개혁의 칼날을 뽑았던 시기가 조선이 개국하기 한 세기 전인 1295년이라는 점도 기억해둘 만한 사실이다. 이는 충선왕에 의해 시작된 개혁의 장정이 무려 한세기를 지속하는 험난하고 장구한 길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위원회 설치한 충목왕
충선왕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끝난 50여년 후에 즉위한 제29대 충목왕(1344~1348)도 개혁군주로 꼽힌다. 충목왕의 개혁 특징은 정치도감(整治都監)이라는 개혁의 중심기관을 설치했다는 데 있다. 정치도감을 현대의 정치용어로 바꾸면 일종의 개혁위원회가 될 것이다.
충목왕은 원나라 순제(順帝)의 명에 따라 개혁을 시작했다는 특징도 있다. 폐정을 바로잡으라는 순제의 명을 직접 받고 귀국한 왕후(王煦)는 김영돈(金永旽)과 함께 정치도감을 설치해 폐정 개혁에 나섰던 것.
정치도감이 작성한 개혁안의 핵심은 권문세족들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를 조사해 원주민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백성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키는 것이었다. 정치도감 소속의 정치관(整治官)들이 지방에 파견될 때 그 지방의 안렴사와 존무사 등을 겸임했는데, 이는 그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치였다.
양광도에 정치관으로 나간 김규는 기황후의 친동생 기주를 체포해 서울[개경]로 압송한 후 정치도감의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그리고 역시 기황후의 일족으로서 양민의 토지를 탈점한 기삼만을 체포해 옥에 가두는 등 강력한 개혁을 실시했다.
이는 매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원나라에 공물로 바쳐졌다가 순제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를 배경으로 한 기씨 일족의 위세는 당시 왕권을 능가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씨 일족의 전횡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쌍수를 흔들며 개혁작업을 환호했다.
그러나 정치도감의 개혁 역시 2개월 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기삼만이 옥중에서 사망하자 권문세족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권문세족은 기삼만의 사망을 빌미삼아 개혁의 부작용을 거론하고 나섰다. 또 권문세족들은 정치도감을 원나라의 정동행성이문소(理問所)에 고발하는 매국적 작태도 서슴지 않았는데, 정동행성이문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치관 서호(徐浩) 등을 잡아 가두고 정치도감을 해체시켜 버렸다.
공민왕의 번개 작전
정치도감이 해체된 이후 고려 사회가 다시 개혁에 나서기 위해서는 공민왕을 기다려야 했다. 1351년 즉위한 공민왕은 충선왕 못지않은 개혁 군주였다. 그는 개혁 사대부 이제현을 등용하여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개혁위원회인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권문세가들의 부당한 민전(民田) 탈점을 규제하는 등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이런 개혁조치에 친원파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권문세족들의 저항이 강력한데다, 개혁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초기의 개혁은 그리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공민왕은 이를 거울삼아 재위 5년째에는 본격적이고도 전광석화 같은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개혁대상들이 미처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군사를 일으켜 국왕보다 위세가 강했던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 일당을 전격적으로 주살해 버렸다.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신속성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속하지 않으면 정치·경제적 특권을 장악하고 있는 개혁대상들에게 반격당하기 십상이다.
이처럼 공민왕의 신속 과감한 개혁정치에 당황한 권문세족들은 또다시 친정격인 원나라로 달려갔다. 이들의 보고를 듣고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분노한 원나라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을 임금으로 봉한다고 발표한 다음, 최유(崔濡)에게 1만 대군을 주어 공민왕을 내쫓도록 했다.
이런 어려움을 간신히 극복한 공민왕은 재위 14년(1365)에 또다시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이번에는 개혁적인 승려 신돈을 등용했다. 우리 역사상 신돈처럼 매도당한 인물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편찬된 「고려사」는 32, 33대 임금인 우왕과 창왕을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두 임금이 고려의 국성(國姓)인 왕씨가 아니라 신씨 성을 가진 신돈의 자식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는 신돈이 지닌 개혁성과 신흥사대부들의 개혁성이 중첩되는 것을 두려워한 조선건국자들의 의도적 폄하에 불과하다.
위대한 개혁정치가 신돈
사실상 신돈은 우리 역사 전체를 통털어 짝을 찾기 쉽지 않을 정도의 개혁정치가였다.
신돈은 계성현 옥천사의 한 여종의 아들로 태어났다. 더 내려갈 데가 없는 미천한 신분이었던 그는 개혁대상인 권문세족들과는 이해가 중첩되지 않을뿐더러 권문세족들의 횡포를 몸으로 겪으며 자랐기 때문에 본능적인 개혁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정책에 권문세족의 집요한 방해가 뒤따를 것임을 알고 공민왕에게 이런 다짐을 받는다.
『소승은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습니다. 비록 권문세족의 참언이나 방해가 있더라도 저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국사(國師) 신돈의 말에 공민왕은 대답한다.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겠소』
공민왕은 드디어 신돈을 개혁위원회 위원장 격인 전민변정도감 판사로 임명했다. 그의 즉위 일성은 권문세족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고려 백성들의 염원 그대로였다.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 이내에 돌려주어라. 이에 따르는 자는 불문에 붙이겠지만 기한을 넘기는 자는 엄중하게 처벌하겠다』
신돈의 개혁의지에 겁먹은 권문세족들은 빼앗은 토지를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권문세족의 횡포에 눈물 흘리던 백성들은 신돈의 과감한 개혁에 감격했다. 백성들이 그를 성인(聖人)이라 추앙할 정도로 그의 개혁은 성공적이었다.
공민왕이 초기의 개혁정책에 실패하고 두번째 시도한 개혁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공민왕은 초기의 개혁에서 자신의 외사촌인 홍언박(洪彦博) 같은 권문세족 출신을 개혁주체 세력으로 내세웠다. 이 경우 개혁주체 세력이 된 권문세족은 자신의 계급을 배신할 확고한 철학을 지닌 인물이어야 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앞에 말한 홍자번의 경우처럼 개혁과 계급 이익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후 공민왕은 초기의 실패를 거울삼아 신돈 같은 개혁인사를 개혁주체로 등용하고 전민변정도감 같은 개혁위원회를 설치해 체계적인 개혁을 추진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전민변정도감에는 오늘날처럼 개혁대상이 돼야 할 인물이 개혁의 주체세력으로 몸담고 있는 상황과는 달리 철저하게 개혁의 논리에 충실한 인물들이 몸담고 있었다.
그러나 신돈의 개혁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돈이 권문세족들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서울을 개경에서 평양으로 옮기려고 하자 드디어 권문세족들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왔다. 현재의 총리격인 시중 벼슬에 있던 권문세족 경천흥과 오인택은 신돈을 제거하려 하기도 하고, 여론을 이용해 신돈을 제거하려고 신돈이 양가 아녀자를 겁탈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여기서 공민왕은 신돈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 지금껏 신돈의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공민왕의 개혁의지 때문이었는데, 신돈이 백성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는 데다가 이런 소문까지 퍼지자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여긴 공민왕은 스승을 구하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말았다. 개혁추진 5년여 만인 공민왕 19년에 왕은 신돈에게 반역의 혐의를 씌워 수원으로 유배보낸 후 다음해 사형시켜버렸다.
물론 개혁이 좌초된 데는 신돈의 한계도 있다. 그는 개혁에 나서기 전 이제현을 보고 『유학자는 나라에 가득 찬 도적과 같아서 나라에 해가 크다』고 비난했다. 그러다가 개혁에 나서면서 『공자는 천하 만세의 스승』이라면서 성균관을 중건했다. 유학자에 대한 신돈의 표현이 도적에서 스승으로 바뀐 이유는 신흥사대부 세력의 회유에 있었지, 그가 성리학을 새시대의 지배이념으로 인식한 결과는 아니었다. 이처럼 신돈의 신분이 승려였던 점은 개혁주체 세력으로서의 사상적 한계를 그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경로를 거쳐 결국 신돈의 개혁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공민왕과 신돈의 좌절은 단지 두 사람의 좌절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두 사람의 좌절은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고려 지배층 내부의 개혁이 실패로 끝났음을 뜻한다. 이제 개혁의 주도권은 고려 왕실에서 신흥사대부로 완전히 넘어가게 됐다. 전혀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신흥사대부의 등장
신흥사대부가 공민왕 이후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토번에 유배간 충선왕을 찾아갔던 이제현도 신흥사대부였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사대부는 권문세족과 맞서 싸울 만한 힘이 부족했을뿐더러 이들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확고한 전망이 부족했다.
개혁은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 곧 새로운 사상이 뒷받침될 때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보면 신돈 역시 권문세족의 전횡에는 분개했으나 역사의 물줄기와 함께 할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은 부족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사상적 기반은 불교였다. 개경에만 70여개가 있었다는 거대한 사찰은 단지 신앙의 산물이 아니라 2800여간에 달했던 흥왕사(興王寺)의 이름이 내포하는 것처럼 그 자체가 하나의 국가 권력이었다. 고려 말 불교의 타락은 몽고 침략 전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수선사(修禪寺)를, 그리고 천태종이 백련사를 건설해 불교계 혁신을 위한 자정운동에 나선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고 간섭기에 불교 내의 이런 자정운동이 소멸되면서 왕실 및 권문세족의 후원을 받는 고려 불교는 민중과 더욱 괴리됐다. 권문세족에 못지않은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고리대금업과 목축업에 나섰으며, 심지어는 술을 주조해 판매할 정도로 부패 타락해 있어서 승려의 비행이 커다란 사회문제였다.
결국 고려 말의 개혁은 권문세족들의 사상인 불교에 대한 부정의 사상을 담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역할을 맡은 세력이 신흥사대부들이었다. 신흥사대부들은 불교와 다른 성리학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유학자라면 영남 지방의 보수적 인물들을 떠올리지만 고려 말의 성리학은 급진적인 개혁사상이었으며, 성리학자는 그 누구 못지않은 개혁적 인사들이었다는 점과 혼동하면 안 된다.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 중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은 공민왕에게 이런 상소를 올린다.
『불교의 오교양종(五敎兩宗)이 모리배의
소굴이 되고 강가건 산속이건 절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원컨대 금령을 내려 이미 중이 된 자들에게는 도첩을 주더라도 도첩이 없는 자들은 군병으로 충원하고 새로 지은 절은 철거케 하여 따르지 않는 자는 수령에서 서민까지 죄를 주어 양민들이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색은 신흥사대부 중 온건개혁파로 알려진 인물임에도 불교에 대해 이처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이색은 불교의 타락한 현상을 비판했지만 급진개혁파 신흥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인 정도전은 한발 더 나아가 불교 자체를 부정하고 나선다. 죽기 직전 완성한 불교 비판서의 제목이 「석가의 잡소리」란 뜻의 『불씨잡변』인 것은 불교에 대한 그의 부정의 강도를 한마디로 말해준다.
『불법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 사람들 가운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잘못 지옥에 들어가 이른바 시왕(十王)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이는 무슨 까닭인가? 이는 그런 일이 있지도 않았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불교의 지옥설은 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끌어 착하게 살게 하려고 만들어 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
정도전은 이 책 서문에서 『이 책을 보면 유학과 불교의 다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지금 호응을 얻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후세에 전해진다면 내가 죽어서도 안심할 수 있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신흥사대부들은 이처럼 당시의 지배사상인 불교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상인 성리학을 받아들인 세력들이다. 이들은 단지 권문세족이 전횡하는 현실의 개혁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을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던 사상가들이었다. 이 점이 이전의 개혁세력들과 질적인 차별성을 획득하는 부분이다.
이들 신흥사대부들이 권문세족의 뒷심인 원나라에 반대한 것은 당연했다. 정도전은 권문세족 경복흥이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맡기자 그의 집을 찾아가 『나는 마땅히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든지 그들을 묶어 명나라에 보내겠다』며 반발해 귀양에 처해진다. 3년 후인 1377년 귀양에서 풀려난 이후 정도전은 고향 영주에서 4년 간 칩거하다가 서울 북한산 밑에 자신의 호를 딴 삼봉재란 초막을 지어 제자들을 길렀다.
그러나 이곳 출신 권문세족이 초막을 헐어버리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드디어 우왕 9년(1383) 결단을 내리고 함경도 함주에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는 이성계의 군막을 찾았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대단합니다. 이런 군사를 가지고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라고 감탄한다.
이성계는 이 말의 뜻을 모른 체했지만 나라를 세울 정도의 야심가였던 그가 그 뜻을 몰랐을 리는 없다. 이 만남 이후 고려말의 개혁운동은 질적인 전환을 이룬다.
이전의 개혁이 고려 왕조 테두리 내에서의 개혁운동이었다면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 이후는 고려 왕조의 테두리라는 한계는 의미가 없어진다.
이 만남을 계기로 신흥사대부는 둘로 갈라지는데 정도전처럼 고려 왕조 자체의 교체를 주장하는 세력을 역성혁명파라 하고, 이색이나 정몽주처럼 고려 왕조 자체는 존속시키면서 개혁을 수행하자는 세력을 온건개혁파라 한다. 온건개혁파들도 권문세족의 전횡에 분개한 것은 마찬가지다. 목은 이색의 말을 들어보자.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오로지 밭에 있을 뿐이다. 몇 무(畝) 되는 밭을 일년 내내 갈아봤자 부모 처자를 먹여 살릴 만큼도 안 되는데 소작료를 걷으러 다니는 자들은 벌써 와 있다. 밭주인이 한 사람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혹은 서너 집이요 혹은 일곱 여덟 집이다. 아무리 어찌 해보려 해도 소가 울며 서로 맞붙듯 적대할 뿐이니 누가 기꺼이 소작료를 갖다 바칠 것인가』
그러나 권문세족의 횡포에 분개한 이색의 해결책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밭을 전주(田主)들이 합리적으로 분배하자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의 위기상황에 대해서는 분개하면서도 그 해결책으로는 전국민의 각성 등을 제시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탁상공론과 마찬가지 처방이다. 반면에 급진개혁파 정도전은 그 해결책으로 토지개혁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집니다. 심지어는 스스로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땅을 버리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종국에는 도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오호라, 그 폐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그들이 사는 곳에 나가 친히 그 광경을 보시고 개연히 토지개혁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십시오』
개혁은 현실에 대한 진단뿐만 아니라 그 대안 제시가 중요하다. 정도전은 토지개혁이란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만난 5년 후인 1388년 역사적인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다.
아직도 위화도 회군에 대해 충(忠)이냐 역(逆)이냐 하는 봉건적인 논란이 있지만, 회군의 평가를 충역의 시비에서 찾는 것은 너무 좁다. 위화도 회군의 의미는 역성혁명파의 또 다른 인물인 조준이 회군 직후 올린 토지개혁 상소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무릇 어진 정사는 경계(經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토지제도가 바로잡혀야 나라의 물자가 족해지고 민생이 후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지금 가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입니다… 위로는 시중(고려의 최고위직)으로부터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관에 있는 자는 물론, 군역에 종사하는 모든 자와 백성 및 공사천인(公私賤人)으로 적에 올라 국역을 맡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급진개혁파의 구상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일반 백성을 비롯한 모든 국민들에게 배분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권문세족들의 반대가 드셌다. 조준의 회상을 들어보자.
『우리 태조(이성계)와 삼봉(정도전)과 나는 사전(私田) 혁파를 논의했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이 서로 짜고 이를 방해했다. 도평의사사의 논의에 참여한 자 53인 중에 토지개혁에 찬성하는 자는 18~19명에 불과했다. 반대하는 자는 대개가 권문세족들이었다』
불타는 권문세족의 토지문서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도 토지개혁은 이렇게 어려웠다. 권문세족들이 계속 토지개혁을 방해하자 회군 3년째인 1391년 이성계와 급진개혁파인 신흥사대부들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전격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그해 9월의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기존의 모든 토지문서[公私田籍]를 서울(개경)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
불탄 토지문서의 주인들은 물론 권문세족들이다. 신흥사대부는 토지문서를 불태운 토대 위에서 새로운 토지법을 발효했으니 이것이 바로 과전법이다. 과전법은 몰수한 토지를 모든 백성들에게 지급하려 했으나 권문세족들의 반대가 워낙 집요해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것은 실패했다. 이 과전법에 대한 정도전의 평가를 들어보자.
『전하께서는 즉위하시기 전에 친히 그 폐단을 보시고는 개탄하여 사전을 혁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셨으니, 이는 대개 국내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식구를 헤아려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전제(田制)를 회복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 권문세족들이 자기들에게 불리하다 하여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온갖 방해를 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했으니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개혁은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이때는 조선 건국이 기정사실화되는 혁명 전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백성에게 땅을 나누어준다는 개혁방안이 직역자(職役者)와 향리, 역리(驛吏) 등을 포함하는 서리와 군인, 학생들에게만 지급하는 것으로 축소됐다.
그러나 정도전이 『고려조의 문란했던 전제에 비하면 어찌 몇만 배나 낫지 않겠는가』라고 자평한 대로 고려시대의 전제에 비하면 진보한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정도의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도 충선왕의 개혁부터 한 세기의 세월이 걸렸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아무튼 현 정부의 개혁의지가 사실이라면 공민왕과 이성계처럼, 신돈과 정도전처럼 개혁을 사상과 신념으로 지닌 개혁적 인사들을 주축으로 개혁위원회를 구성해 개혁을 맡겨야 한다.
개혁대상들이 개혁추진 세력과 혼재해 있는 현재의 구조로는 개혁이 성공할 수 없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일치된 개혁목표를 가지고 단호하게 나아가도 성패가 불분명한 판국에 내부의 개혁대상에게 개혁의 칼자루를 주고 어찌 개혁에 성공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현 정권 그 누구도 개혁의 주체세력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