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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마삼터[馬參基]라고 부르던 마을인데 마을 북쪽 굼배리에서 낙동강 상류의 물이 크게 굽이쳐 흐르므로 클구비라 하였다. 클구비가 글그미로, 글그미가 글금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거곡(巨曲)', '대곡(大曲)'으로 쓰다가 나중에는 글금을 글월 '문(文)' 굽을 '곡(曲)'하여 '文曲'으로 쓰게 되었다. ㆍ편뜰 ― 장성광업소 신사택이 있는 곳이다. 꽤 넓은 들이 형성된 곳으로 낙동강의 한쪽편에 형성된 들이라고 편뜰 이라 한다. 또한 편편하게 생긴 들이라고 편뜰이라 하기도 한다. ㆍ새밭골 ― 편뜰 뒤에 있는 넓고 큰 골짜기이다. 새[억새]가 많다고 새밭골이라 하기도 하며 서조귀소형(瑞鳥歸巢 形)의 명당이 있는 골짜기라 해서 새밭골이라 한다. 골짜기 어귀는 점터골이고 안쪽은 새밭골이라 한다. 새밭골은 큰 새밭골과 작은 새밭골이 있다. ㆍ새목이 ― 새밭골에서 철암 피내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산등이 잘록하여 새의 모가지처럼 생겨서 새목이라 한다 고 하며 혹은 철암과 문곡 사이에 있는 고개라서 새[사이]목이라 하기도 한다. ㆍ둔지터 ― 편뜰 맞은 편에 있는 움푹하고 펀펀한 땅이다. 35번 국도 윗쪽 언덕 위에 있는데 한 집이 살고 있다. 땅 의 모양이 새둥지 처럼 생겼다고 해서 둥지터라 하다가 둔지터로 변했다. 새밭골의 서조귀소형(瑞鳥歸巢形)명당의 새가 이곳의 둔지터의 둥지로 날아오는 형상이라 한다. 지금은 등광사가 자리하고 있다. ㆍ무래이쏘[무래이 빠져 죽은 쏘] ― 장성여자고등학교 앞에 넓고 깊은 쏘[沼]가 있는데 무래이쏘라 한다. 옛날 황지 쪽에는 좋은 나무들이 많아 목상들이 그것들을 베어 낙동강물에 띄워 안동지방까지 운반하였다. 그 것을 무나무라 하였는데 뗏목과는 다르다. 뗏목은 나무로 떼를 엮어 물로 운반하는 방법이다. 뗏목은 강심이 깊고 강폭이 비교적 넓은 곳에서 행하는 목재 운반 방법이고 무나무는 강폭이 좁고 얕으며 암초들이 많은 곳에서 행하는 목재운반 방법 이었다. 뗏목을 운반하는 사람들을 뗏목꾼이라 하고 무나무를 운반하는 사람들을 무래이라 한다. 그 무래이가 이 쏘 에서 실수로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무래이 빠져 죽은 쏘 혹은 무래이쏘라 한다. ㆍ섬거랑 ― 장성여자고등학교를 지나 상류쪽으로 300m 정도 가면 넓은 밭이 있다. 황지에서 내려오는 황지천이 이 곳에 와서는 큰 섬을 하나 이루어 놓았는데 본류는 현재의 위치대로 흐르고 물줄기는 산밑으로 흘러서 그 가운데에 길다란 삼각주를 이루어 놓았다. 섬이 있는 거랑[개천]이라고 섬거랑이라 한다. 현재 이곳에는 콘크리트 다리가 놓 이고 땅을 메워 시영아파트를 지었다. ㆍ피아골 ― 섬거랑 뒤에 있는 골짜기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철암의 피내골로 통하는 골짜기인데 안쪽은 경사가 급하다. 옛날 의병들이 이 골짜기에서 많이 죽어 피를 흘려 골짜기 안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철암의 피내골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데 피내골에서 피아골로 피해 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을 피해가 는 골짜기라서 피아골이다. ㆍ황장목이 ― 섬거랑 맞은 편에 있는 작은 산 언덕이다. 갓밭드리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이곳에 와서 맺혀 있는데 산 등에 황장목이 많이 자라고 있고 그 윗쪽의 낮은 산등으로 옛날 고갯길이 있었다. 지금은 그 산등 아래로 도로가 나서 이 고개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 황장목이 있는 고개[목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ㆍ갓밭드리 ― 황장목이 윗쪽의 넓은 밭이 있는 곳이다. 농가가 너댓집 있고 그 아래에는 군부대가 있다. 옛날 그 일 대에는 아름드리 황장목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서 나라에서 '황장갓'으로 정하여 보호하던 곳이다. 황장갓의 산을 개 간하여 밭을 만들었고 그 일대가 제법 넓기에 갓밭드리라 부른다. 갓은 산이란 의미로 부르기도 하고 밭이란 뜻으 로도 쓰이는 말이다. ㆍ허홀영감터께 ― 종합운동장을 건설한 일대가 허홀영감터께이다. 옛날 허홀영감이라는 사람이 이 땅을 개척하여 살 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ㆍ굼배리 ― 명주바우 상류에 있다. 문곡이란 동네 이름이 나오게 된 곳이다. 황지에서 내려오는 황지천이 이곳에 와 서 크게 굽이치며 흐르는데 그 모양이 활처럼 휘어져 굽이쳐 흐른다고 굼배리이다. 배리는 벼루에서 온 말로 물가 의 벼랑을 의미하는 말이다. 또한 굽이친다의 굽이가 굼으로 변한 것 같다. 왜냐하면 문곡의 옛이름이 '대곡(大曲)' 혹은 '거곡(巨曲)' '거곡(巨谷)'으로 '클구비'였었는데 클구비의 '구비'는 굽이인 것이다. 굼배리는 구정배리라고도 부른다. ㆍ마고할미 통시나들 ― 종합운동장 위쪽에 가로 놓인 문백교(文柏橋) 윗쪽에 있다. 지금의 콘크리트 다리 윗쪽에 옛 날 다리가 있었고 그 조금 아래에 옛날 나무다리가 있던 곳이다. 황지천이 이곳에 오면 양쪽으로 깍아지른 바위 사 이로 물이 흐르는데 그 생긴 형상이 통시[변소]처럼 생겼다. 옛날에 그 곳이 가장 강폭이 좁아 외나무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다. 나들[나드리]은 나루와 비슷한 말로 배로 건너지 않고 걸어서 건너는 곳을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연화산에 사는 마고 할미가 이곳 통시나들에 내려와서 뒤를 보고는 연화산으로 올라 간다고 한다. 그래서 마고할미 통시나들이라 하다가 할미통시나들로 혹은 통시나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하상정비로 바위돌을 깨어내어 흔 적이 희미하다. ㆍ물둑매기 ― 사배로 들어 가면서 산개나무 거랑을 지나서 조금가면 갑자기 골짜기가 가파라지며 개천물이 급한 여 울로 변한다. 좀더 올라가면 다시 개천물은 완만한 경사로 흐르는데 바로 그곳이 물둑매기이다. 옛날 산판을 할 때 나무들을 베어 물둑매기 아래쪽 산개나무 거랑 앞이나 강시터 부근의 개천에 갔다 놓았다. 그리고는 물둑매기에 물 둑을 설치하여 사배에서 내려오는 개천물을 막아 놓았다가 일시에 물둑을 터뜨려 한꺼번에 많은 물을 쏟아 흐르게 하여 그 아래에 쌓아놓은 나무들을 물의 힘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물둑을 설치 하였던 곳이라고 물둑매기라 한다. 물둑매기가 변해 물동매기라고도 부른다. ㆍ사배(四拜) ― 풀장골로 들어가서 물둑매기 윗쪽 동네를 사배라 한다. 옛 기록에 보면 '새별리[鳥別里]' 또는 '조서별 어리(鳥栖別於里)'라고도 했는데 모두 사배의 이두적기일 뿐이다. 사배에서 장성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사배치[사배 재]인데 옛날 어떤 도승이 이 고개위에서 장성쪽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며 절을 네 번하는 것이었다. 곁에있던 동 자승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도승이 말하기를 이곳의 산세를 보니 앞으로 몇 백년 뒤 흑면장군(黑面將軍)이 수만명 나타나 수만명을 살릴 땅이라서 두려워 절을 하노라고 했다. 그래서 그 고개를 사배재라 하였고 그 아래에 마을을 사배로 부르게 되었다. 그 도승이 예언한 흑면장군은 오늘날 광부들이라 생각되며 심산유곡의 장성땅이 국내 최대 석탄산지가 되고 수만명의 사람이 운집하여 살고 있으니 예언이 적중하였다고 보겠다. ㆍ불찌끼봉 ― 솔뱅이재 아래에 솟은 산봉우리이다. 옛날 화전을 많이 할 때 이 산 부근과 장성쪽 소란평지 문곡쪽 둔지터 등지에서 산불이 많이 났다. 그때 사람들이 이 산에서 지켜서서 산불을 잡았다고 한다. 산불을 지켜서서 끈 산이라고 불지키봉이라 했는데 그말이 변해 볼찌끼봉이 되었다. ㆍ동우 ― 사배를 지나 절터양지 안쪽 전체를 동우리 혹은 동월이라 한다. 동월이는 동우리에서 온 말로 한자로는 '동 우(東隅)'라 표기한다. 어떤 곳에는 '동우(東雨)'라고 표기된 곳도 있으나 '동우(東隅)'가 맞다. 동우는 태백산의 동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동우라 한 것이다. ㆍ사십마지기 ― 동우를 지나 거란지 윗쪽 문수봉에서 뻗어 내려온 산록에 있다. 개간을 하여 한 집에 살고 있는데 주위가 매우 넓다. 넓은 땅이 사십 마지기 정도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하며 또는 옛날에 메밀씨를 사십 말 정 도 뿌릴 수 있는 땅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