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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신’ 김성근 한화 감독
상대가 질릴 만큼, 지더라도 끝까지 싸워야 다음엔 이긴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김성근(73) 감독은 최근 마무리 투수 권혁(32)을 불렀다.
지난달 15, 16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이틀 연속 패전투수가 된 권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김 감독은 한화 홈구장 이글스파크 옆에 있는 보문산을 가리켰다.
“저기 산 정상이 보이지?
거긴 바람이 많이 불 거야.
산 밑에는 바람 한 점 없겠지.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넌 예전에 산에 오르지 못했어. 그러니 욕하는 사람도 없었지.
그런데 지금 넌 정상에 있어. 그래서 바람을 맞는 거야.”
권혁에게 한 말은 김 감독 자신이 평생 품고 산 금언이다.
일본 교토에서 나고 자란 동포 2세 김성근은 1965년
기업은행 야구단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영구 귀국을 선택했다.
한국에 뿌리내린 지 올해로 50년. 그의 야구는 내내 뜨거웠고 시끄러웠다.
2011년 SK 와이번스 지휘봉을 내려놓은 뒤
3년 만에
프로야구 무대로 돌아온 그는 여전했다.
지난 6년 동안 다섯 차례나 최하위에 그쳤던 한화는
3일 현재 포스트시즌 진출 마지노선인 5위(58승63패)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다.
SK 시절 ‘야신(야구의 신)’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와 치밀한 전략을 자랑했던
그는 일흔 살이 넘어서도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언
제나 그랬듯 선수 혹사, 독단적 리더십 등에 대한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 시즌 전부터 지금까지 뉴스의
중심에 있다.
“이 나이쯤 되면 적이 하나 둘씩 없어질 때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본질(야구)이 없어져.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 방식대로 할 뿐이야.
어찌 보면 고지식하고 모자란 사람이지.
그래서 지금까지 감독을 하는 거야. ”
- 선수를 혹사시킨다는 비판을 또 받고
있는데.
“권혁은 직구의 힘이 떨어지면 얻어맞는 투수지.
힘을 빼서 커브를 섞어 던지면 타자들이 못 쳐.
그런데 힘으로만 덤비면 직구가 가운데로 몰리면서 얻어맞아.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혹사가 아니야. 권혁이 성장하는 과정이지.”
- 베테랑 박정진도 데뷔 후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했다.
“정신 자세가 달라졌어. 원래 박정진은 연투(連投)가 안 되는 투수였다고.
시즌 초 어느 날 코치한테 ‘연투가 어렵다’고 했다는 거야.
‘너, 몇 살이야?’라고 물었더니 마흔이래.
그래서 ‘그렇게 할 거면 야구 그만둬’라고 했지.
20년 가까이 한계를 못 넘은 거잖아.
이후로 싹 달라졌어. 선배로서 책임감을 갖게 됐지.”
현재 권혁은 70경기에서 104이닝을 던졌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권혁은 ‘필승조’가 아니었지만
한화로 이적하자 최고의 불펜투수로 거듭났다.
7월 이후에는 피로증세를 보이며 패전을 이어가고 있다.
한화 입단 17년이 된 박정진은 74경기에서 95이닝을 던졌다.
은퇴할 나이에 불꽃 같은 피칭을 하고 있다.
- 그래도 인간의 한계는 분명 있을 텐데.
“ 사람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해.
한계를 정해 놓으면 사람은 거기서 멈춰.
나도 펑고(수비수의 훈련을 위해 땅볼이나 뜬공을 때려주는 것)를
두 시간씩 치면 숨이 차고 심장이 막 뛰어.
그럼 좀 조절하고 다시 뛰면 괜찮아. 난 그렇게 강해졌지.
2010년엔 두 어깨 인대가 끊어졌다고.
팔을 어깨 높이까지밖에 들지 못해 유니폼도 혼자 못 입었어.
그런데 스트레칭하고 강화 훈련하니까 괜찮아졌어.
오버워크를 해서 한계를 넘는 거지. 전쟁에서 발목 삐었다고 걸을 수 있나. 뛰어야지.”
- 선수 시절엔 어떻게
한계를 극복했나.
“원래 난 발이 느렸어.
일본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땐 우유와 신문 배달을 하면서 많이 뛰었지.
한국에 와선 기업은행 훈련장이 예전 벽제화장터(경기도 고양시)에 있었거든.
거기서부터 본점(서울 을지로)까지 20㎞ 거리를 뛰어서 퇴근했지.
다음 날 아침에는 버스 타고 구파발에서 내려서 또 뛰고.
그래서 지금도 내 하체가 좋아. 의지가 강하면 길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
- 위기를 돌파하는 비법이
있는지.
“어릴 때 막노동 아르바이트도 했는데 그게 재밌는 거야.
구덩이에서 3~4m 위로 큰 돌을 던져야 하는데 팔 힘만으로는 도저히 안 돼.
무릎을 이용해서 던지니까 올라가더라고. 하체 쓰는 법을 깨달은 거지.
버스 타면 빈자리가 있어도 절대 앉지 않았어.
버스가 흔들릴 때 몸 중심을 잡아보는 거지.
버스기사가 나더러 미친 놈이래. 어
떤 일이라도 그 속에 들어가 몰두하고 배우면 힘들지 않아.
그게 쌓여 어마어마한 자산이 되는 거라고.
야구도 마찬가지야. 바보스러워도 그렇게 해야 돼.”
- 젊은 선수들에게는 어려운 말일지도
모르겠다.
“선수들에게 사명감을 가지라고 얘기하지.
야구는 개인이 아닌 팀 스포츠니까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외국인 선수도 마찬가지야. 얼마 전에 로저스를 1군에서 뺐잖아.
심판 판정에 불만을 터뜨리기에 ‘지고 나서 신경질 내면 뭐 하느냐.
너보다 팀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했지. 개인이 불만을 참을 줄 알아야 팀이 살아. ”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뛰다
지난달 초 한화에 입단한 투수 로저스는
첫 4경기에서 세 차례 완투승을 거둘 만큼 뛰어난 기량을 자랑했다.
그러나 지난달 27일 NC전에서 역전패하자 심판에게 항의하고
벤치로 돌아와 글러브를 집어던지며 신경질을 냈다.
김 감독은 특급 에이스를 곧바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열흘 동안 로저스를 기용할 수 없지만 팀 기강이 흔들리는 걸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 한화가 단단해진 건 사실
같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 선수들 꽤 강해졌어.
주축 타자 김태균·정근우가 부상을 참고 뛰잖아.
예전 같았으면 몇 경기 빠지고 쉬었겠지.
그런데 부상을 이겨내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어.
투구에 종아리를 맞고 한 달을 쉬어야 한다던 이용규도 20일 만에 돌아왔잖아.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손아귀에 없던 힘도 생기는 거야.”
- 정규 시즌 막판에는 버릴 경기와 잡을
경기를 구분해서 운영해야 하지 않나.
“아니다. 끝까지 ‘내일이 없는 야구’를 할 거야. 2
009년 막판 SK가 19연승(단일 시즌 최다 기록)을 할 때도 그랬다고.
당장 내일 선발투수가 없이 다 쏟아붓고도 힘이 생겼어.
지더라도 마지막까지 상대가 질릴 만큼 붙어서 싸워야 돼.
끝까지 지지 않으려고 하면 상대가 우리를 힘들어 해.
그럼 다음엔 이길 수 있어. 그러니까 포기할 수 없지.
감독이 포기하기 시작하면 선수가 미리 경기를 버리거든. 그럼 팀이 엉망이 돼.”
- 그 점을 야구 팬들은
비판한다. 물론 한화 팬들은 응원하지만.
“지난달 26일 삼성전에서 1회 5점을 주고도 연장 11회까지 가서
10- 9 역전승을 했어.
내가 아는 의사가 ‘0.1%의 희망이 기적을 만들었다.
야구로 그걸 보여주셨다’고 하더라고.
많은 팬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화 야구를 보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다시 힘내고 살겠다’고 말해줘. 내가 더 고맙지.”
- 한국 야구는 어떻게 해야 더 발전할 수
있을까.
“오늘 지면 ‘두고 봐라.
다음엔 꼭 이긴다’라는 오기를 갖고 싸워야 해.
이기는 걸로 증명하고 복수하는 거야.
스스로 위안하고 남에게 동정받는다고 뭐가 달라져?
아무것도 얻지 못해.
그리고 야구에 대한 시야를 넓혀야지.
1950~60년대 재일동포 김영덕·신용균 선배가
한국에 와서 변화구를 처음 던졌어.
그전에 한국 투수들은 직구뿐이었지.
80년대엔 재일동포 장명부·김일융으로부터 배웠어.
98년 이후에는 외국인 선수들이 들어왔잖아.
그러니까 시속 150㎞ 넘는 공을 보게 되고, 또 그걸 치게 되고.
그래서 강정호(28·피츠버그)가 메이저리그 갔잖아.
외국인 보유 한도(팀장 3명)에 얽매이지 말고
더 많이 데려와서 서로 경쟁하고 발전해야지.”
- 마지막까지 이루고 싶은
꿈은.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맨 앞에 서고 싶어.
2005년 일본(롯데 마린스)에서 내가 정식 코치가 된 게 한국인 최초였지.
또 내가 계약(2009년부터 SK에서 3년 총액 20억원,
올해부터 한화에서 3년 총액 20억원)을 하면서 다른 감독들 연봉도 높아졌어.
내가 학교·기업에서 강연하는 걸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배운 사람들에게도 내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나 젊을 때 운동하는 사람들은 다 깡패라고 했거든.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기회가 된다면 외국 구단에서 감독도 하고 싶지.
뒤에서 남을 욕하는 사람 말고 욕을 먹어도 맨 앞에 서서 먹고 싶다고.”
“50년 전 중앙일보에 실린 연속 피칭 사진 보고 깜짝 놀라”
김성근 감독은 인터뷰 도중
중앙일보에 대한 추억을 슬며시 꺼냈다.
“50년 전 중앙일보가 내 피칭 연속 사진을 게재했어.
그거 보고 깜짝 놀랐지. ‘와, 이런 걸 시도해?’라면서 말이야.”
김 감독이 말한 건 1965년 9월 27일자(중앙일보
창간 후 5호) 신문이다.
당시 8면에는 ‘모터 카메라가 잡은 역투 모션’이라는 제목으로 5단 연속사진이 실렸다.
허리를 활처럼 팽팽하게 당겼다가 온몸의 힘을 짜내
던지는 사진의 주인공이 기업은행 좌투수 김성근이다.
감독은 “지금도 그런 분석 사진을 보기가 쉽지 않잖아.
사진을 보고 나서야 공 던질 때 왼쪽 어깨가 처져 있는 걸 알아챘어.
당시 왼팔 부상이 있었거든. 그래서 내 공(궤적)이 달라진 걸 알았지”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당시 사진을 보관하고 있다.
김 감독은 중앙일보 애독자다.
8월 28일 NC 다이노스와의 창원 경기를 마치고
이튿날 비행기로 서울까지 오는 동안에도 중앙일보를 읽었다.
그는 “스포츠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의 정보를 얻고 있다”고 했다.
"젊은 세종의 무기는 '열린 귀'였다"
'세종대왕의 리더십' 신하들 장점 찾아 격려 …자긍심 ·사명감 갖게 해
젊은 군주 세종이 풀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노(老)대신들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부왕인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사권과 인사권을 쥐고 흔드는 상태에서 2인자의 길을 걷는 것도 어려웠고,
고려에 대한 단심(丹心) 운운하는 길재와 같은 신하들의 존재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과제는 세종보다 2~30년씩 나이가 많은
노회한 대신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고려 말부터 혁명과 건국 등 시대의 격변을 겪어낸 그들이 보기에
세종은 태종 이방원과 달리 그저 책만 열심히 들여다보던 애송이에 불과했을 수 있다.
즉위 초년 박은·허조 등이 세종에 대해
보였던 데면데면한 태도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세종이 왕위에 오른 1418년을 기준으로 황희는 왕보다
34세가 많은 56세였고, 맹사성은 황희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59세였다.
그나마 젊은 축에 들어가는 윤회가 39세로 세종보다 열일곱 살이나 연상이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실세인 상왕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노대신들의 마음을 청년 세종은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세종이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부지런히 묻고
경청하는 일이었다.
즉위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내가 인물을 잘 모르니 경들과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려 한다"는 왕의 말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즉위 제일성이 "의논하자"였던 것인데, 세종은 대신들을 수시로 불러서
나라에 도움되는 절실한 말을 강직하게 말해달라고 주문하곤 했다.
토론하다가 쓸 만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곧 해당 부처에 명을 내려
시행하도록 하는 조처도 신하들의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됐다.
세종의 탁월한 지적 리더십 역시 신하들의 존경심을 이끌어 내는 데 기여했다.
세종은 경연이라는 세미나식 국정회의를 매달 5회꼴로 열었는데,
신하들은 국왕의 해박한 유교 경전 및 역사 지식에 감탄하곤 했다.
특히 그는 회의 때 신하들의 무지가 드러나면
"무릇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대들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고 다독거리곤 했다.
학문에 있어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겸손한 세종의 인격에 신하들은 차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신하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뛰어났다는 점이다.
1425년 정월의 종묘 제사 때 허조가 겪은 에피소드가 그 한 예다.
당시 허조는 행사를 주관하는 이조판서였는데, 술잔을 들고 물러나오다가
그만 실족해서 계단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황에서 세종이 급히 다가가 한 말은 "허 판서 다치지 않았나"였다.
허조가 황망한 가운데 다시 계단
위에 올라와 사죄를 하자 세종은
“계단을 넓혀서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마땅히 벌을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세종은 오히려 그의 몸이 상하지 않았는지를 묻고,
이어서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계단을 넓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보다 28세나 연상으로 줄곧 ‘태종의 사람’을 자처하던 허조가
세종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바뀌게 된 데에는 이때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노대신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세종의 강점경영에 있었다.
그는 신하들의 장·단점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들을 임명할 때
그 자리에 왜 그가 적임자인가를 구체적으로 말하곤 했다.
1428년에 황희가 뇌물 받은 혐의로 탄핵을 받았을 때가 좋은 예다.
세종은 정승이란 자리는 나랏일의 대체(大體)를 알고 많은 인재를 추천해야 하는 관직인데,
“경은 나랏일에 의심나는 것이 있을 때 귀신같이 그 해법을 제시하는 능력이 있고,
인사나 형벌을 의논할 때는 실로 저울대와 같다”면서
황희의 사직상소를 되돌려주었다.
그가 맡은 관직의 핵심 조건과 함께 그의 장점을 함께
이야기해 주어서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게 한 것이다.
허조와 김종서를 중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관직에서 물러나려는 허조에게
“경은 강직하고 정직한 자질을 타고났다”면서
지금 사직하면 장차 “임금의 실수를 바로잡고 나라 풍속을
진작시키는 일은 누가 맡을 것이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어전회의에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집요하게 지적해서
바로 잡는 그의 역할을 높이 산 것이다.
그뿐 아니다.
김종서를 북방의 영토경영 책임자로 맡기면서
“경은 옛일을 상고하는 힘과 일을 잘 처리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 및 여진족과 빈번이 영토문제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함경도의 국방 책임자로서 과거의 사례를 잘 알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을 결단하는 능력을 가진 김종서의 강점을 높이 산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중요 관직에 사람을 임명할 때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며, 왜 그가 필요한가를 구체적으로 말하곤 했다.
세종 시대의 많은 신하가 때로 과로사의 지경에 이르면서까지
맡은 일을 완수한 것은 그 같은 존재 인정과 두터운 신뢰 때문이었다.
허조가 임종 때 “지금까지 나는 국가의 일을 나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며 살아왔다”며
“나와 같은 죽음은 아마 내 이전이나 이후에도 찾기 힘들 것”이라고
행복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세종의 강점경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명의 명령’만 있고 ‘임명의 말씀’이 없이 고위직 관료들을 자리에 앉히고
경질하는 요즘의 인사 관행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바로 나의 가능성을 찾고 인정해준 분들이었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장점을 발견하고 격려해준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들이 있게 된 것이다.
신하들의 강점을 인정하고 살려준 세종의 멘토 리더십을 기려서
그의 탄생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이유다.
"너만 그렇게 일이 많은 게 아니다. 나도 피곤해 죽을 것 같다."
식의 말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이기적인
반응이다.
나에 대한 믿음까지 갖게 한다.
또 그로 인해 더욱 적극적으로 일에
임하여
수고로움을 덜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
흔히들
착각하고 오해하기 쉬운 것이 하나 있다.
남을 높이고 인정해 주면 내
자신의 가치가 낮아진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자신 없고 못난 사고를 가진
비겁한 사람들이나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한다.
상대를 낮추고 깎아내리며
잘난척하는 것은 나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 아니라
"난 이렇게
수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다.
거지 같은
남편이라고 핀잔을 주면 결국 자신은 거지랑 사는 부인일 수밖에 없으며,
무능력한 상사라고 무시한다면 무능력한 상사를 모시고 있는
자신은 결국 더 무능력한 직원이 아니겠는가?
"역시 당신은
대단해요.",
더군다나 물을 끓이지도 않았으니 설탕이 녹지 않은 거야.
많은
사람들이 자네처럼 겉만 보고 판단을 하지.
하지만 그 판단이 정말 옳은 걸까?
자네는 분명히 설탕 넣는 것을 보았고
분명히 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모든 일을 겉에서만 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네."
사람들은 직접 보았다는 이유로,
경험했다는 이유로 자신도 모르게 선입견을 갖는다.
하지만 일에는 다양한 면이 존재한다.
너무 많이 들어서 어쩔 도리가 없구려, 미안해요
오직 기적만이 앤드류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소
부모의 대화를
엿들은 어린 여자아이는
그렇게도 예뻐하는 남동생을 살릴 수 있는 건 기적뿐이라는
아빠의 말을 듣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골방 깊숙이 숨겨놓았던 유리병을 꺼내 오
랫동안 모아온 동전을 다 쏟아놓고 여러 번 세고 또 세었다
아이는 동전을 다시 유리병에 담고는 옷 깊숙이 감추고 살짝
집을 나섰다
여섯 블록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약국에 들어갔을 때
약사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느라 바빠서그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아이는 동전 한 개를 꺼내 진열창을
두드렸다
약사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제 동생이 많이 아파요, 저는 기적을 사러 왔어요."
"뭐라고?"
약사가 다시 물었다
"저런, 여기서는 기적을 팔지 �는단다, 안됐다만 너를 도와줄 수가 없구나,"
"아저씨, 여기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왔어요, 기적을 사려고요,
만일 모자라면 더 가져올게요, 기적은
얼마예요?"
여자아이는 계속해서
물었다
그때 정장을 한 약사의 형이 아이에게 다가와서 인자하게 물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제 남동생은 많이 아파요, 엄마가 그러시는데 수술을 해야 한데요,
아빠는 수술비가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 돈을 쓸려고
해요."
"너는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는데?"
시카고에서 왔다는 신사가 또 물었다
아이는 눈물을 삼키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1달러 11센트요, 그렇지만 필요하면 더 가져올 수
있어요."
"그것 참 잘됐구나, 1달러 11센트면 네 동생을 위한 기적 값이랑 딱
맞겠어,"
다른 손으로는 아이의 가느다란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나를 너희 집으로 데려다주겠니? 네 남동생과 가족을 만나보고
싶구나
아마도 네가 원하는 기적을 내가 줄 수 있을 것
같다"
신사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뇌수술 전문 의사 칼 암스트롱
박사였다
"앤드류의 뇌수술은 진짜 기적이었어요,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다니...,"
"가끔 나도 그 수술비가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해보곤 해요, 꿈만 같아요."
기적은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에게 기적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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