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나된 것은(고전15:9-11)-2024.7.28
사람의 사람됨은 자기정체성의 고백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정체성은 내가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것이요, ‘나의 나된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신앙의 초석이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의 나된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기독교신앙을 가졌다할지라도 모두가 다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신앙을 가진 자와 복음신앙을 가진 자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율법신앙을 가진 자는 자기의 마음으로 자기를 보고 평가하나, 복음신앙을 가진 자는 주님의 마음으로 자기를 보고 평가합니다.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떤 존재로 여기시냐는 말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무엇이냐는 말이지요. 다양한 생각을 하실 수 있고, 다양한 고백을 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믿음을 가진 우리들의 고백속에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는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고백을 하실까요? 분명히 오늘 이 시간 각자 마음을 통해 ‘나의 나된 것은’ 무엇인지 고백을 해보시고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믿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내가 어떤 신앙에 속한 자인지 대화를 해보면 어느 정도는 드러납니다. 또한 믿음 생활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누군가 율법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면 아주 불쾌한 반응을 드러냅니다. 자기가 율법적인 사람이라는 데 동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신앙적인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의 신앙적인 칼라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속에 그 사람의 신앙이 배어 있거든요. 혹은 영적 습관 속에도 배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연조와 상관없습니다. 교회 안에 주어진 직분과도 상관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진 신앙의 중심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은혜의 중심축이 자신에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적인 사람들도 복음주의자들 못지않게 은혜라는 말을 더 즐겨 사용하고 더 많이 강조합니다. 다만 은혜의 출발이나 중심축이 하나님께 기울어져 있지 않고 자기들에게 기울어져 있는 경우가 많을 뿐입니다.
그래서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은근히 자신들의 열심과 공력을 자랑합니다. 때문에 율법렌즈로 보는 나와 복음렌즈로 보는 나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렌즈로 보는 나는 자신의 공로와 열심과 의에 집착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자기들의 공력과 공로가 추가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이 정도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이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잘 들어보셔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렌즈로 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복음의 렌즈를 가진 자들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렌즈를 가진 자들은 은혜의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른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1)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바울은 신앙세계의 두 진영을 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의 두 진영은 율법의 세계와 복음의 세계를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주의 세계에 몸을 담았다가 복음주의 세계로 넘어온 사람입니다. 그가 율법에 있었을 때는 보통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율법주의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이른바 율법의 극단을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물론 복음주의 신앙을 경험한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두 진영의 극단을 경험해 본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은 설득력이 있고 확신이 넘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의 두 극단을 경험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말입니다. 율법에 빠지되 바울처럼 빠져본 사람이 있습니까? 혹은 복음에 미치되 바울처럼 미쳐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어설프게 경험해 본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말이지요. 어설픈 율법주의를 경험했든지, 혹은 어설픈 복음주의를 경험한 자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입니다. 대부분 어정쩡한 율법주의자들이든지, 어정쩡한 복음주의자들이라는 말이지요.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율법과 복음이 혼재된 방식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최고의 발견일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학문이나 보물을 발견함보다 가장 위대한 발견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데 세상에 위대한 발견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바울은 최고의 발견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두 극단을 다 경험해 본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발견한 최고의 발견은 무엇입니까? ‘나의 나된 것’의 발견입니다. 자기 정체성의 발견이지요. 바울은 한때 율법의 최첨단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율법 안에 있을 때 바울은 남다른 열정을 가졌었지요.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였으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습니다(빌3:6). 이것은 모두 자기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맨이었습니다. 율법의 최고의 정상을 경험해 본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율법의 렌즈로 보는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남다른 열심을 가진 자였고, 율법의 그룹 안에서도 두 번째 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율법의 광신도였습니다. 세상에 바울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 있는 자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발견한 것이지요. 복음의 렌즈를 끼고 본 자신의 실체는 죽도 밥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엉망진창이었던 것이지요. 망나니 같은 인간이었을 뿐 아니라, 죄인 중에 괴수였던 것입니다.
율법의 렌즈를 끼고 살았던 시절에는 자신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복음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 자신은 속물 중에 속물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이 고백한 ‘나의 나된 것’이라는 말은 최고의 발견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신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동일한 사람이 이렇게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렌즈를 끼고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렌즈의 색상이 세상을 결정하는 셈이지요. 빨간색 렌즈를 끼고 보는 세상은 온통 빨간색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파란색 렌즈를 끼고 보는 세상은 온통 파란색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에 의해 율법의 렌즈를 끼고 보는 나와, 복음의 렌즈를 끼고 보는 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한동안 율법의 렌즈를 끼고 보는 바울은 온통 자기 열심과 공로와 의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율법의 렌즈를 벗고 복음의 렌즈로 보는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동일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율법의 렌즈를 끼고 볼 때와 복음의 렌즈를 착용하고 볼 때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달라지니 하나님이 달라 보이셨던 것입니다.
율법의 렌즈로 보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렌즈로 보는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의 렌즈로 보는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과 수고와 공로에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렌즈로 자기 자신을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자신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복음의 렌즈로 보는 자신은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여전히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지요.
무엇보다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율법으로 보던 때와 확연하게 달랐던 것이지요.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굴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어떤 의지가 개입될 수 없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작동되어가는 세상이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온통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 아니면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 것입니다. 대부분의 믿는 자들이 상투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믿고 누리고 하는 말일까요? 은혜의 절대성을 인정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절대 이 고백은 율법 신앙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만 할 수 있는 고백인 것이지요.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나의 나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만이 영적 세계의 깊은 곳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나의 나된 것’이라는 고백 속에서 발견한 진리가 무엇일까요?
(2) 복음의 렌즈를 통해 발견한 하나님의 은혜
‘나의 나된 것’이라는 고백도 두 가지 측면에서 고백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사람에 따라 ‘나의 나된 것’이라는 고백속에 수많은 수식어를 붙일 수 있습니다. 자기자랑 내지는 하나님 외의 그 어떤 것을 수식어로 첨부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나의 나된 것은 내 아내의 수고’입니다. 혹은 ‘나의 나된 것은 부모님의 돌봄’입니다. 혹은 ‘나의 나된 것은 주변에 좋은 분들의 도움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분들의 은혜를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혹은 그분들의 은혜를 들먹거리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분들이 내게 끼친 은혜도 반드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면 그분들의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바꿔치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의 자리에 다른 것을 대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은혜의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나의 나된 것은’이라는 말 뒤에 수많은 수식어를 붙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받으실 은혜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을 가진 자들 속에서 이런 고백이나 간증을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이렇게 성공한 것은 기도의 열심이었다고 자랑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자기가 40일 금식을 몇 번 했다는 것을 평생의 훈장처럼 자랑하고 다닙니다. 어떤 분은 자기 명함에 40일 금식을 새겨서 부흥회를 초청해달라고 선전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전도의 열심이나 종교적인 열심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혹은 어떤 사람은 성경을 몇 번 읽었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요즘 들어 유투브 방송을 통해 자기자랑에 빠져 있는 수많은 설교자들을 봅니다. 물론 충분히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이런 자랑들이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서 되어진다면 큰 문제가 안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그렇게 고백하는 것은 본인 신앙이나 다른 사람의 신앙에 유익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단에게 공격할 틈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공격루트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내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될 때 공격 포인트가 됩니다. 사단은 내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거나 은혜가 삭감될 때 여지없이 공격합니다. 문제는 내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됨을 나보다 사단이 더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귀신같이 압니다.
바울은 복음을 영접하기 전에 자기 잘난 멋에 살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자신의 멋에 취해 삽니다. 혹은 자기 잘난 맛에 미쳐 삽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안경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이 그렇게 살았던 것이지요. 바울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거칠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체포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갈 정도의 열정을 가진 자였지요.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으로 본 것이지요.
그래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사울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오죽하면 그가 예수를 믿어 회심했으나 그의 회심의 진정성에 대하여 의심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만큼 자기 의에 취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이런 열심이 없었다면 복음을 만난 후 복음에 대한 열정도 없었을는지 모릅니다. 감사하게도 바울이 율법이라는 뜨거운 용광로 속에 들어가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확신 있는 복음을 듣고 보고 배우고 영접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이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은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발견한 것이지요. 물론 바울이 스스로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실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복음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위에 은혜요,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바울이 발견한 은혜의 진수는 그런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은혜는 깨닫는 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좋은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을지라도 깨달음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은혜의 시각으로 접근하고 고백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부분적인 것만 선택하여 은혜라고 고백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은 은혜로 접근하고, 은혜로 해석하며, 은혜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이만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분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복음의 일군으로 세워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은 은혜의 시작이요, 은혜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쉬워도 모든 것을 은혜로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의 넘어짐도 은혜요, 실패도 은혜며, 부서짐도 은혜요, 무너짐도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내 삶의 모든 절차나 과정이나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비록 나에게 건강이 무너졌을지라도, 경제적인 고난이 주어졌을지라도, 혹은 너와 나의 관계가 깨어졌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범주 속에서 해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형편이나 상황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저울질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은 것만 은혜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조건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당당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은혜라면 그것은 은혜의 보편성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양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은혜 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은혜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대변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은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에 대한 선포가 많습니다.
(3) 자기부정은 은혜 신앙의 진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 안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부정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자기 부정은 그리스도 신앙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드러날 수 없거든요. 각 사람에게 자기 부정이 일어나는 만큼 은혜의 깊이가 달라지는 법이지요.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정은 예수님의 제자도입니다. 자기부정은 은혜신앙의 진수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렌즈를 끼고 자신을 보니 죽어 마땅할 죄인임이 발견되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새롭게 보는 눈이 열린 것이지요. 자기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림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갈2:20). 그래서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복음을 위한 수고가 더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9절상). 심지어 자신은 사도라고 부르심을 받기에도 감당치 못할 자라는 것입니다(9절하).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한 자라고 고백합니다(8절).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고 나온 자가 아니라 팔삭둥이 혹은 칠삭둥이로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자기가 다른 사도들에 비해서 부족한 자라는 겸양의 표현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박한 수준이 아니라 거의 존재감이 없는 사람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은 자의 자기 평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신앙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게 합니다. 혹은 자기 시선으로 보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율법의 시선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기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혹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은혜 받은 자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평가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내려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나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이 가장 정확하십니다. 그분은 좌우로 치우침이 없으십니다. 시대의 조류나 환경에 따라 변하지도 아니하십니다.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초청하십니다. 은혜로 초청을 받으려면 반드시 율법으로 무너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나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기력하며, 무익한 존재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만 복음의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강가로 나아가려면 먼저 율법으로 자기 자신이 철저히 붕괴되어져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하고 무기력하며 무능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그것은 ‘나의 나된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무익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야 은혜의 깊은 강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른바 에스겔서 47장에 나오는 생수처럼 말입니다. 처음에는 성전 문지방에서 스며 나오던 물이 넘쳐흘러서 넘지 못할 강이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발목에서 시작된 물이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건너지 못할 강을 이룬 것처럼 은혜도 수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모두 다 은혜의 강가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은혜의 깊은 강에서 헤엄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유영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은혜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당신의 은혜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를 평가하는 도구가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도 평가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무익한 인간의 가치가 드러날 때 은혜가 돋보이기 시작합니다. 빛이 빛으로서 평가를 받으려면 어둠이 필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선이 선함으로 평가받으려면 악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은혜가 은혜로서 평가를 받으려면 율법의 판단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율법도 하나님의 은혜가 덧입혀져야 율법의 소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단독으로 자기의 소임을 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율법을 주신 목적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은혜는 율법 안에 있을 때도 은혜요, 복음 안으로 들어온 것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지요. 우리도 복음의 렌즈를 통해서 보면 은혜 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엇보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한 가지 고백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의 세계를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바뀌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내가 바뀌지 않으면 결코 은혜일 수 없습니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나의 고백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니 우리 모두의 고백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롈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