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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6~172)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166>장쉐량에게 저우언라이 ‘16字 밀서’ 전달한 주메이윈(朱湄筠) |제167호| 2010년 5월 23일
◀1929년 10월 결혼을 앞둔 주메이윈(朱湄筠)
저우언라이는 장쉐량, 장제스, 쑹메이링과 함께 시안사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전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을 설득했고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했다. 장은 “내전을 중지하고 국공 양당이 합작해 침략자 일본과 전쟁에 돌입할 것”을 촉구하며 최고통수권자 장제스를 감금했다. 장제스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장쉐량을 연금시켰다. 그리고 8년간 항일전쟁을 지휘해 승리했다.
장쉐량 덕에 기사회생한 중공은 전쟁이 끝나자 여세를 몰아 전 중국을 장악했다. 장을 데리고 대만으로 철수한 장제스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순간까지 장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륙의 저우언라이는 죽는 날까지 신(新)중국의 총리직을 유지했다. 장쉐량을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공신(千古功臣)’으로 치켜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61년 12월 12일 밤, 시안사변 25주년 기념식이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장쉐량을 회상하는 저우언라이의 한마디 한마디가 듣는 이들의 폐부를 찔렀다. 장의 부하였던 동북군 출신 장군들과 당 간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훌쩍거렸다. 저우는 “이 눈물은 중국공산당이 흘리는 눈물”이라며 연신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고 코를 풀어댔다. 귀가 후에도 좀처럼 잠자리에 들려 하지 않았다. 넋 나간 사람처럼 창밖을 보며 한숨만 쉬어댔다.
저우언라이는 장쉐량에게 친필 편지를 보낼 결심을 했다. 관련 부서는 편지를 전달할 밀사를 물색했다. 홍콩에 거주하는 주메이윈(朱湄筠)이 적임자였지만 접촉이 불가능했다. 저우는 북양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고건축 연구가 주치진(朱啓금)의 집을 방문했다. 주는 슬하에 5남10녀가 있었다. 딸 두 명이 장쉐량의 비서와 결혼했고 셋째 딸은 장의 제수였다. 주는 즉석에서 다섯째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했다.
저우언라이도 편지를 완성했다. “부디 몸을 소중히 해라. 서두르지 말고 마음을 닦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다.” 모두 16자, 수신인과 발신인은 적지 않았다. 장쉐량의 동생들에게도 편지를 준비시켰다.
▲베이징의 자택에서 딸들과 함께한 주치진(앞줄 가운데)과 두 명의 부인. 1930년 장쉐량은 주치진에게 베이징 시장을 권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는 망한 정권의 총리, 시장 자격이 없다”며 고사했다. 1964년 2월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건축과 전통공예 연구로 일가를 이루었다. 김명호 제공
주메이윈은 30년 전 장쉐량의 바람기 덕에 억울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일본군의 선양 점령 한 달 후 광시대학 총장 마쥔우가 장쉐량을 조롱하는 시를 발표했다. “자오씨 집안 넷째 딸과 풍류를 즐기고, 주씨의 다섯째 딸과는 미친 듯이 춤을 췄다. 훨훨 나는 나비(胡蝶)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사교계는 영웅들의 무덤. 남의 나라 군대가 성곽을 깨는 줄도 몰랐다. 야반에 급보를 받았지만 음악소리 작다며 투정만 해댔다….” 전 중국이 발칵 뒤집혔다. 장쉐량의 부인이나 다름없었던 자오씨 집안 딸은 억울해할 일이 없었지만 주씨의 다섯째 딸 메이윈과 영화배우 후뎨(胡蝶)는 분통이 터졌다.
주메이윈은 장쉐량이 단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급 캔디를 구입해 편지를 상자 바닥에 숨겼다. 대만에 건너가 6개월간 머무르며 기회를 살폈다. 1962년 10월 10일 연금 중이던 장쉐량은 쑹메이링의 총무비서가 전해주는 캔디 한 상자를 쌍십절 선물로 받았다. 이튿날 아침 장의 몰골은 온밤을 꼬박 새운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시 30년이 흘렀다. 1991년 가을, 캐나다에 살던 주메이윈은 자유의 몸이 된 장쉐량이 하와이에 거주한다는 보도를 접하자 자녀들 중 한 명을 데리고 달려갔다. 거동이 불편한 장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했다. 생존해 있다면 98세, 생사 여부는 알 수 없다. <167>'마오쩌둥 선집’ 찍으려던 종이로 대입 시험지를 찍다 |제168호| 2010년 5월 30일
▲1977년 겨울의 대학입시장. 그로부터 20년간 1000만 명의 대학졸업자를 배출했다.
1977년 봄 세 번째 정계 복귀가 확정된 덩샤오핑(鄧小平)은 베이징 교외에 머무르고 있었다. 5월 24일 “지식과 인재를 존중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교육과 과학의 발전이다.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현대화다. 국가 지도자의 가장 큰 의무는 인재양성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직접 모든 책임을 지고 담당하겠다.”
2개월 후 덩샤오핑은 4인방(四人幇)에게 쫓겨나기 전의 모든 직위를 회복했다. ‘과학 및 교육공작 좌담회’ 개최를 교육부에 지시했다. 참석자의 자격과 조건이 까다로웠다. “진정한 재능과 실학으로 무장된 사람이어야 한다. 허황된 이론이나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혁명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끝마다 혁명이니 뭐니 해대며 되지도 않을 연합 타령이나 하는 사람들이 참석할 자리가 아니다. 식견이 풍부하고 할 말을 과감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엄선해라. 4인방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던 사람들은 배제시켜라.” 적합한 사람들을 찾기가 수월치 않았지만 그럭저럭 40여 명을 모을 수 있었다. 문혁 시절 ‘반동학술의 권위자’로 분류되거나 비슷한 낙인이 찍혔던 지식인들이었다.
회의는 8월 4일부터 5일간 계속됐다. 영문도 모른 채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정·군을 완전히 장악한 73세의 작은 노인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교육부장조차도 덩샤오핑이 직접 참석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도 판에 박힌 연설이나 발언을 하러 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1977년 7월 세 번째 정계에 복귀에 성공한 덩샤오핑.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부도옹(不倒翁·오뚝이)이라고 불렀다. 김명호 제공
덩샤오핑은 매일 아침 회의 시작과 동시에 나타났고 마지막 발언이 끝나야 자리를 떴다. 순전히 들으러 온 사람처럼 행동했고 실제로 그랬다. 회의 내내 참석자들의 발언을 경청하며 잘못 알아들은 부분이 있으면 다시 확인했다. 간혹 옆에 앉은 사람과 귀엣말은 나눴지만 남의 발언에 끼어들거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한 번은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뜬 적이 있었다.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마치는 대로 돌아오겠다. 그때까지 쉬도록 하자.”
참석자들은 기존의 결론 없는 회의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하라는 말을 믿고 말 한번 잘못 했다가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틀이 지나자 목소리들이 커지기 시작했다. 점점 거침없는 내용들을 토해냈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종래의 대학 신입생 모집 방법인 ‘추천제’의 성토장으로 변했다.
당시의 대학은 공농병(工農兵)대학이었다. 중졸 이상의 문화적 소양을 갖춘, 사상이 양호하고 신체가 건장한 20세 전후의 노동자·농민·군인이라면 소속 혁명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공농병 대학생들은 학교를 관장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통한 대학의 개조가 주 임무였다. 학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준도 천차만별이었다. 1976년 베이징대의 경우 2,665명의 신입생 중 고교 졸업생은 171명에 불과했고 중학 졸업생이 2,142명으로 제일 많았다. 초등학교만 나온 입학생도 79명이나 있었다.
칭화대 교수 한 사람의 입에서 “추천제로 들어온 학생 중 대다수는 중학교나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덩샤오핑이 말을 받았다. “그게 칭화중학이지 무슨 놈의 대학이냐. 대학은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다. 혁명가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다.” 우한대 화학과 교수 자취안싱(査全性)이 “입학시험을 부활시키자”며 열변을 토하자 다들 찬성했다. 덩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생각이 그렇다면 입시제도를 바꾸자. 당장 실시하자. 내년 여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1977년 12월 중국 입시 사상 최초로 겨울에 대학입시가 실시됐다. 570여만 명이 응시해 27만 명이 합격했다. 시험용지가 부족했다. 마침 마오쩌둥 선집 제5권을 찍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종이가 있었다. <168>장제스 “최고의 예술은 적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 |제169호| 2010년 6월 6일
▲항일전쟁 시기의 장제스(가운데)와 함께한 다이안궈(오른쪽)와 장웨이궈. 세 사람의 혈연 관계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중일전쟁 시절 임시수도 충칭에 머무르던 쑹메이링은 온갖 병마에 시달렸다. 충칭에 신통한 의사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쑹은 치료를 위해 홍콩행을 택하지 않았다. 민심을 자극할 소지가 많았다. 게다가 장제스는 혼자 있기를 싫어했다.
1940년 9월 장제스는 쑹메이링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영어책을 한 권 끼고 다니며 툭하면 신경질을 부렸다. 10여 년 전 북벌군 총사령관의 넋을 빼놓았던 옅은 웃음이 사라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급기야는 마시던 찻잔을 집어던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평소 냉정함을 잃지 않던 장은 기겁을 했다. 쑹을 떠밀다시피 홍콩으로 보냈다. 정신 계통의 치료를 받아보라는 말은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미국인이 저술한 『인사이드 아시아(Inside Asia)』라는 책에 장제스의 차남 웨이궈(緯國)의 생부가 고시원장 다이지타오(戴季陶)라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장은 몰랐다. 장의 영어 실력은 알파벳을 혼동할 정도였다. 다이가 사석에서 “나는 젊은 시절부터 생육 능력이 없었다”는 발언을 한 것도 알 길이 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보고할 수 없는 무서운 내용들이었다.
◀고시원장 시절의 다이지타오. 쑨원(孫文) 사상의 발전적 계승자로 자처했다. 김명호 제공
10월 15일 장제스의 일기는 간단했다. “비서와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치료차 홍콩에 간 사람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장은 장남 징궈(經國)를 홍콩으로 보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차남 웨이궈가 홍콩에 도착하면 함께 모친의 병세를 돌보라고 단단히 일렀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이 두 아들과 함께 충칭으로 돌아올 줄 알았지만 허사였다. 편지를 해도 답장이 없었다. 성탄절이 다가와도 홍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도 상황은 여전했다. 1월 12일 일기에 “간밤에는 공산당과 집안 문제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썼다. 이튿날에는 “오후에 웨이궈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했다. 매화가 만발했다. 집사람과 함께하지 못해 애석하다”며 처연함을 드러냈다. 14일 일기는 유족들의 요구로 열람이 불가능하다. 장은 28세 때부터 57년간 일기를 썼다.
춘제(음력 설) 전날 밤의 일기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제야를 혼자 보낸다. 나처럼 외롭게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국가 원수가 또 있을까.” 이때 장제스는 이유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귀환을 재촉하는 편지를 쑹메이링에게 보냈다. 답장의 결론은 “돌아가지 않겠다”였다. 장은 “애정이 지나치면 원망을 낳고, 쾌락의 결말은 비극이다. 집안일처럼 풀기 힘든 것도 없다. 메이링은 몰라야 좋을 일이 많다. 고통은 많고 웃을 일은 적다”고 일기에 적었다.
충돌의 원인은 차남 웨이궈와 다이지타오의 아들 안궈(安國)였다. 쑹메이링은 웨이궈가 다이와 일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줄 알고 있었다. 다이가 생육 능력이 없다면 이건 얘기가 틀려진다. 미국인의 저서와 다이가 사석에서 한 발언을 접한 쑹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웨이궈와 안궈의 생부는 누구란 말인가? 쑹은 장을 의심했다. 큰일 날 사람이었다. 징궈(經國), 웨이궈(緯國), 안궈(安國)라는 이름들도 수상했다. 쑹은 웨이궈와 안궈의 생부와 생모가 누구인지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장제스는 냉정을 되찾았다. 웨이궈를 장남 징궈의 근무처인 장시(江西)로 보내고 홍콩에 장문의 편지를 발송했다. “부부가 각자 갈 길을 가자”는 내용을 첨가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화들짝 놀란 쑹메이링은 충칭으로 돌아왔다.
장은 평소 아들들에게 “최고의 예술은 적대시하는 사람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169>장제스·다이지타오, 일본여자와 한방서 살다 득남 |제170호| 2010ss 6월 13일
▲고시원장 시절의 다이지타오. 다이지타오는 중국 공산당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세계관이 다르다며 창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장제스 집권 후 20년간 고시원장을 역임했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철수하기 직전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인생을 마감했다.
다이지타오는 16세 때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봄 일본 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장제스를 만났다. 장이 네 살 위였다. 장은 동향 의식이 유난히 강했다. 다이는 본적이 장과 같았다. 옆모습도 비슷했다.
두 청년은 쑨원의 거처를 자주 드나들었다. 쑨은 우익단체 흑룡회(黑龍會)의 보호를 받으며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다 보니 흑룡회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오래 배겨 나지 못했다. 단 여자들에게는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흑룡회는 신엔 미치코(津淵美智子)라는 여인을 고용했다. 하녀학교 출신으로 뭐든지 잘 베푸는 성격이었다. 미치코는 다이지타오와 가까이 지냈지만 장제스와도 친했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두 사람은 귀국했다.
중국은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의 천하였다. 쑨원은 허울만 좋은 국부였다. 상하이에 정착한 다이지타오는 “난세의 붓은 제아무리 비단 같은 글 수백만 편을 토해 내도 총 한 자루만 못 하다”는 것을 통감했다.
◀장제스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황포군관학교 교장 시절 유아원을 자주 방문했다. 김명호 제공
1913년 쑨원이 무장폭동을 일으키자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쑨의 추종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다이와 장의 목에도 현상금이 걸렸다. 함께 추억의 도시로 도망쳤다. 도쿄에서 미치코와 재회했다. 생활비도 줄일 겸 방 한 칸을 빌려 셋이 같이 살았다. 미치코는 도망 온 주제에 온갖 큰소리는 다 쳐대는 두 사람을 입혀 주고 먹여 줬다. 빼놓았던 금반지가 없어져도 모른 체했다. 1916년 6월 위안스카이가 죽자 장과 다이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다시 혼자 남은 미치코는 10월 6일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장제스와 다이지타오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상하이의 증권교역소에서 브로커 노릇를 하며 한동안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지만 타고난 기질들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이는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해 중국의 윤리 문제를 연구하고 쑨원 학설을 토대로 다이지타오주의(戴季陶主義)의 틀을 완성해 나갔다. 중국 여인을 만나 결혼도 했다. 부인은 근엄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맹수와 같았다. 별명이 사자(獅子)였다. 장은 10여 년 후 도래할 황금 10년(黃金十年)의 청사진을 그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경제학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1920년 가을, 생각지도 않았던 날벼락이 두 사람을 덮쳤다. 장제스의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미치코가 서너 살 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장은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이지타오의 혈육을 데리고 왔다”는 미치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튀어 나갔다. 몇 층만 올라가면 다이의 집이었다.
다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가 들을세라 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모두 황당했던 과거의 일들이다. 한때의 풍류, 생각도 하기 싫다. 지금은 처자가 있다. 너도 알다시피 얼마나 사나운지 모른다.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 인생은 그날로 끝난다. 내 주소도 모르고 찾을 방법도 없다고 해라.”
장은 다이가 시키는 대로 둘러댔다. 다 듣고 난 미치코는 우선 한바탕 울어댔다. “두 놈 다 형편없는 놈들이다. 자신의 혈육도 필요 없다니 나도 필요 없다”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도 황급히 쫓아 나갔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장제스는 미치코가 팽개치다시피 하고 간 사내아이에게 웨이궈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족보에도 올렸다. 생모가 누구인지는 적지 않았다. 고향에 보내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이 3개월씩 돌아가며 키우게 했다.
장웨이궈가 누구의 친아들인지는 두고두고 중국인들의 화젯거리였다. 1989년 장웨이궈는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나도 모른다. 궁금하지만 밝혀낼 방법이 없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어 “장제스의 아들이어도 좋고 다이지타오의 아들이어도 좋다”는 말을 했다.
사실 여부를 증명해 줄 사람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중국인들은 수천 년간 야사(野史)가 정사(正史)를 압도해 왔다. 앞으로 무슨 얘기들을 사실처럼 믿을지 장담 못 한다. <170>홍군 枯死 직전, 에드거 스노 기자를 불러들이다 마오쩌둥의 공공외교<上> |제171호| 2010년 6월 20일
▲1960년 6월 중국을 방문한 에드거 스노(Edgar Snow). 당시 중국은 미국인들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에드거 스노는 예외였다. 국가주석 류샤오치와 대화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은 중국식 공공외교(公共外交)의 창시자였다. 1935년 10월 마오가 인솔하는 중앙홍군이 산시(陝西)성 북쪽 바오안(保安)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국민당은 물샐틈없이 봉쇄했다. “비적들은 소멸됐다. 극히 일부가 서북의 불모지에 들쥐처럼 숨어들었지만 소탕은 시간문제다”라는 기사가 연일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North China Daily News: 字林西報)가 유일하게 “조잡하고 문화가 없는 비적집단”이라는 조롱과 함께 ‘경이’와 ‘기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모두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홍군은 고사 직전이었다. 2만5000리의 장정으로 기력을 상실한 데다 산베이(陝北)의 빈곤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주 집안엘 가봐도 변변한 살림살이나 양식이 없었다. 남쪽이 고향인 홑옷 차림의 홍군 전사들은 첫해 겨울을 나기조차 힘들었다. 무기와 실탄은 거의 고갈 상태였다. 소련에 원조를 구하기 위해 리셴녠(李先念)과 쉬샹첸(徐向前)을 파견했지만 중도에 국민당 기병대의 공격을 받아 빈손으로 돌아왔다. 장제스의 중앙군은 포위망을 점점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마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자신과 전우들이 걸어온 길을 후세에 전설로 남기고 당의 기본방침이 “항일 근거지와 통일전선의 구축”이라는 것을 외부에 알리고 싶었다. 중국의 작가나 기자들은 마오의 요구를 들어줄 형편이 못됐다. 비적들을 옹호했다간 귀신도 모르게 행방불명이 되고도 남았다. 유명기자 판창장(范長江)이 찾아 왔을 때도 제대로 된 보도가 나갈 리 없다며 깊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신문이나 방송도 없었지만 마오는 제3자, 그것도 제 발로 바오안까지 걸어 들어온 외국인 기자를 통해 홍군의 진면목을 대내외에 알릴 방법을 모색했다.
◀쑹칭링과 에드거 스노(1939년 홍콩)
마오는 양상쿤(楊尙昆)에게 정치부 산하에 편집위원회를 만들게 하고 사단급 이상의 간부들에게는 ‘홍군 장정기’를 쓰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상하이의 지하조직을 통해 쑹칭링(宋慶齡)에게 “믿을 만한 외국기자와 외국인 의사 한 명이 바오안을 방문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쑹은 항일을 주장하는 공산당에 우호적이었고 아는 외국인이 많았다. 국민당 정보기관도 외국인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쑹칭링은 상하이의 외국인 기자들을 부지런히 만났다. 다들 사교활동에 바빴다. 홍군 얘기를 꺼내면 만나 보기라도 한 것처럼 침들을 튀겼지만 정작 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쑹은 항일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적극 지지했던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와 외과의사 조지 하템을 접촉했다. 스노는 험상궂은 얼굴에 공산공처(共産共妻)하는 것으로 외부에 알려진 붉은 토비들을 만나 보겠다며 몇 년 전 장시(江西)소비에트 문턱까지 갔다가 쫓겨난 적이 있었다.
1929년 4월 국민정부 교통부장 쑨커(孫科)는 중국의 수려한 풍경을 해외에 알리고 미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공공외교를 편 적이 있었다. 에드거 스노에게 철도여행을 주선했다. 스노는 가는 곳마다 굶어 죽은 시체들을 목도했다. 풍광 따위는 볼 겨를도 없었다. 4년간 비가 내리지 않아 500여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겪어본 중국인들은 미국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매하고 낙후한 민족이 아니었다. 중국인의 재앙을 외면하며 모험이나 즐기고 돈벌이에만 급급한 중국에 와있는 미국인들의 행태가 형편 없었다. 이들을 비판하는 글을 연일 발표했다. 문장이 신랄했다. “백인들의 반도”라며 공격을 한 몸에 받았다. 귀국할 생각까지 했지만 맘에 드는 여성을 만나는 바람에 그냥 눌러 앉아있었다.
쑹칭링의 제안을 받은 스노는 직접 예방주사를 놓고 암시장에 나가 브라우닝 권총을 구입했다. (계속) <171> 에드거 스노 만난 마오 “공산당원 될 줄 상상 못했다” 마오쩌둥의 공공외교 <中> | 제172호 | 20100627
▲장정 도중인 1935년 5월 다두허(大渡河)전투에서 17명의 홍군 전사들이 군복 한 벌, 일기장 한 권, 연필 한 자루, 젓가락 한 개를 상으로 받았다. 최고의 상이었다. 1949년 10월 신중국 수립을 선포했을 때 17명 중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에드거 스노는 1936년 여름 닝샤에서 이들을 만났다. 김명호 제공
1936년 6월 말, 에드거 스노는 시안(西安)에서 조지 하템과 합류했다. 중공 보위국장이 두 사람의 호송을 지휘했다. 관광객을 가장해 옌안(延安)에 도착한 후 장쉐량(張學良)의 부관이 동승한 차를 타고 마지막 검문소를 빠져 나왔다. 옌안은 아직 국민당이 지배하고 있었다. 국민당의 2인자 장쉐량과 공산당의 관계를 눈치챈 스노는 머리가 복잡했다. 『수호전』에 나오는 흑선풍 이규(黑旋風 李逵)처럼 험하게 생긴 사람이 마차를 몰고 와 무조건 타라며 짐을 빼앗았다. 어찌나 무섭던지 시키는 대로 했다.
7월 9일 소련 구역의 첫 번째 초소에 도착하자 말 위에 앉아있던 사람이 악수를 청했다. 얼굴이 수염투성이였다. “현상금 8만원에 지명수배된 저우언라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11일 밤 9시 스노와 하템은 저우의 안내로 마오쩌둥을 만났다. 마오는 부엉이처럼 모든 업무를 야간에만 봤다. 매일 밤 저녁을 먹고 나서 스노와 마주 앉아 노닥거리기를 즐겼다. 당시 마오의 부인은 허쯔전이었다. 허기가 질 때쯤이면 흑설탕에 버무린 살구와 기름에 볶은 고추를 내왔다. 어찌나 맛이 없고 매운지 혀와 코가 뭉그러지는 줄 알았다. 마오가 “후난 사람들은 매운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혁명가 기질이 다분하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매운 것을 좋아한다. 고추를 먹는다”고 하자 스노가 말을 받았다. “무솔리니도 매운 것을 먹지만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 마오는 스노에게 호감을 느꼈다. 아무 때고 찾아와도 좋다는 특권을 줬다.
마오는 별난 사람이었다. 자신에 관한 얘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전우들 얘기만 해댔다. “린뱌오는 어떻고, 보꾸는 어떻고, 주더와 펑더화이는 어쩌고 저쩌고….” 계속 이런 식이었다. 스노가 대놓고 물었다. “당신은 폐병 3기의 노인과 다를 게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전 세계에 당신의 상황과 진면목을 알리고 싶다.” 마오는 “아직은 말할 기력이 있다. 우선 전선에 가봐라. 서부전선에 가면 홍군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와서 얘기하자. 홍군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후회한다”며 딴청을 피웠다. “조사를 하지 않은 사람은 발언할 권리가 없다”는 천하의 명언을 남긴 사람다웠다.
홍군의 주력부대는 바오안에서 2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스노와 하템은 간쑤(甘肅)·닝샤(寧夏) 일대를 다니며 홍군을 접촉했다. 장정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들은 떼지어 다니는 토비들이 아니었다. “예정보다 더 머물지 않았다면, 마오만 만나고 돌아왔다면, 홍군의 승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홍군은 패할 리 없다. 정치적으로 잘 다듬어진 군대였다.”
스노가 바오안으로 돌아오자 마오는 토굴의 등잔 밑에서 본격적인 공공외교에 들어갔다. 10여 차례에 걸쳐 소련 정부의 정책과 항일전쟁의 형세,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관한 것 외에 그동안 누구에게도 해 본적이 없었던 성장 과정과 결혼에 얽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꿈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공산당원이 되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인간의 의지보다 강하다. 현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결국 내 발로 공산당 조직에 참가했다.”
스노는 통역하는 사람이 하는 말을 영어로 받아 적어 통역에게 건넸다. 통역은 중국어로 옮겨 마오에게 수정을 요청했다. 마오의 검열이 끝나면 통역은 다시 영어로 옮겨 스노에게 전달했다.
여름이기도 했지만 방 안에는 온갖 벌레들이 들끓었다. 마오는 간간이 옷을 벗어 들고 나가 한바탕 훌훌 털곤 했다. 평생 목욕을 해본 사람 같지 않았지만 정교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중국의 미래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칠지 잘 알고 있었다. (계속) <172>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 홍군에 날개 달다 마오쩌둥의 공공외교<下> |제173호| 2010년 7월 4일
▲에드거 스노는 중국의 문화인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1938년 봄, 홍콩에서 열린 만화가 딩충(오른쪽 둘째)의 항일전쟁 기금 마련 전시회에 참석한 스노(왼쪽 둘째). 김명호 제공
1936년 10월 중순, 베이핑(北平)으로 돌아온 에드거 스노는 미국 영사관 강당에서 서북기행(西北紀行)을 발표했다. 베이징대·옌징대·칭화대 학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스노는 일본과의 전쟁을 주장하던 12·9 학생시위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다. 참석자들은 스노가 16㎜ 필름에 담아 온 마오쩌둥과 주더, 펑더화이, 청년장군 린뱌오, 테러리스트 저우언라이 등 현상수배자들과 홍군의 진면목을 보고 열광했다. 홍군을 비적으로 몰아붙이던 국민당의 선전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2개월 후 시안사변이 발생했다.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이 최고지도자 장제스를 감금해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을 요구한 기상천외한 사건이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의 요청을 수락했고 마오쩌둥과 홍군은 기사회생했다. 마오는 바오안(保安)을 떠나 옌안(延安)에 정착했다. 홍군은 정규군 대접을 받았다. 이제 옌안은 현대판 양산박이 아니었다. 당당한 항일 근거지였다.
이듬해 여름(7월 7일) 중·일 양국이 전면전에 돌입한 직후 스노는 런던에서 『Red Star Over China(중국의 붉은 별)』를 출간했다. 상하이의 공산당 비밀당원들은 발 빠르게 중국어판을 만들어 시중에 내놓았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고사 직전의 공산당이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며 만든 홍보물이었다면 불쏘시개감으로나 딱 알맞을 종이 뭉치였지만 이건 경우가 틀렸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보도로 명성이 자자한 미국 기자가 그것도 제 발로 홍군의 근거지를 찾아가 4개월간 현장을 누볐다니 내용에 거짓이 있을 리 없었다.
반응은 해외에서 먼저 왔다.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캐나다 의사 노먼 베순을 포함한 외국의 의사와 기자, 작가들이 옌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중국 의료지원단을 구성했고 미국 내 화교들은 성금을 모아 옌안에 ‘로스앤젤레스 유아원’을 설립했다. 한결같이 스노의 책을 읽고 실상을 알았다는 말을 한마디씩 했지만 총연출자가 마오쩌둥이라는 사실은 알 턱들이 없었다.
◀1936년 7월 마오쩌둥의 권유로 바오안 외곽의 홍군 근거지 취재에 나선 에드거 스노(오른쪽). 당시 서북 지역의 이동 수단은 말이었다.
국내는 더 요란했다. 이상을 추구하는 청소년들과 정치와 도덕이 일원화된 사회가 가능하다고 믿는 문화인들은 옌안에 가기 위해 시안행 열차를 탔다. 전국의 대학생 4만2922명 중 1만여 명도 캠퍼스에서 자취를 감췄다. 항일 전쟁 기간 약 4만 명의 지식인이 붉은 도시에 바글바글했다.
아편·술·도박·여자 외에는 관심이 없는 시궁창 같은 남편들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던 여인들과 대도시로 나왔다가 온갖 꼴불견은 다 구경한 여류 연예인 중에도 장칭(江靑)처럼 결단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사람들이 많았다. 계급·매춘·불량배, 툭하면 눈 부릅뜨고 잘난 척이나 해대는 정객과 공직자들이 없다는 항일성지(抗日聖地) 옌안은 낙원이었다. 스노의 책에 그렇게 써 있었다.
팔로군(八路軍)으로 개편된 홍군의 시안 연락사무소는 하루 평균 180명씩을 옌안으로 인솔했다. 남녀 할 것 없이 녹색 군복에 집에서 들고 나온 물건들을 꿰차고 행군하는 이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정치범이나 사상범으로 체포되거나 수배된 경험이 있는 반역형 지식인과 입 한 번 벙긋한 죄로 죽도록 얻어맞고 나온 불평객들은 끝까지 잘 버텼지만 남의 돈 떼어먹거나 형사범으로 도망 다니다 옌안을 피난처로 택한 사람들은 오래 붙어 있지 못했다.
최근 공직에서 은퇴한 전직 관료 몇 명이 올해를 중국 공공외교의 원년으로 선포하자 스노와 함께 바오안에 갔던 조지 하템의 아들이 “74년 전 마오가 바오안의 토굴에서 스노와 하템을 처음 만난 1936년 7월 11일 오후 9시가 중국 공공 외교의 기점”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틀린 주장이 아니다. 『중국의 붉은 별』은 대전략가 마오쩌둥이 자신과 홍군을 중국과 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한 공공외교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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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제스와 다이지타오는 고망동서인가? 한 방에서 이들과 동거했다는 일본 여인도 별종이네.//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은 나도 오래 전에 읽고 감동 받은 적이 있지. 이 책을 통해 대장정과 홍군,그리고 공산당의 保安, 延安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얻어 들었네.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대목 중 하나.당시 국민당의 공격에 쫓기면서 중국 서부 고지대의 雪原을 지나던 중 홍군들은 하도 배가 고파 앞서 가던 동료 군인의 배설물 속에서 소화가 안 된 곡식 낱알을 눈에 씻어서 씹었다는 내용.기타 홍군 쫄병들의 열정과 생생한 체험 등.하여튼 명작! 동영상은 너무 길어서 틈나는 대로 볼 생각임. 귀한 자료 올려줘서 謝謝.
고망동서가 맞는 듯...ㅋ
'중국의 붉은 별'을 한번 읽어 봐야겠군!
언제나 잘 읽어줘서 외려 감사!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