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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1주일설교 시편33:1-22(새 노래로 즐겁게 부르자!)
본문: 시편33:1-22
제목: 새 노래로 즐겁게 부르자!
오늘은 시편33:1-22의 말씀을 가지고
“새 노래로 즐겁게 부르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제목은 무엇입니까?
“새 노래로 즐겁게 부르자!”
저에게 요즘 흥미를 주는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은 슈퍼밴드 2 입니다.
지금은 시작 단계라 개인들의 역량을
뽐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이를 보면 좀 많은 사람들이 30대
그리고 20대가 많고 10대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각기 목소리면 목소리로
자신이 잘 하는 악기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면 참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12살 어린아이가 그렇게 기타를 치는지
어떤 여자청년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고 강력하게 드럼을 치는지
어떻게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악기를 가지고 노는지
어떻게 그렇게 그런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지 참으로 감동하였습니다.
윤상이라는 프로듀서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서
우리나라가 이제 음악에서도 선진국이 되었다고
말하는 소리에 동감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유엔에서 57년 만에 처음으로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승격시킨 나라가 있는데
그것이 대한민국입니다.
그것도 만장일치로 결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또래때에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푹빠져 피아노를 치고,
기타를 치고, 춤을 추고, 노래하는 하는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렇게 미쳐서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면
트로트가 되었든지 바둑이 되었든지 악기가 되었든지
춤추는 것이 되었든지
미쳐서 그 일을 해서 뛰어난 사람이 되고
인생을 즐기는 모습을 볼 때 참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10대에 쇼팽콩쿨에서 우승하는
조성진 같은 사람들이 나오고
빌보드 차트에서 ‘버터’라는 곡으로 6주 연속 일등을 하는
세계 최고의 가수가 BTS가 나오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배우겠다고
우리 대한민국을 동경하고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의 노래는 무엇이며
우리가 연주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에 미쳐서 노래하고 있으며
우리의 노래와 연주에 우리의 이웃이나
세상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1.즐겁게 찬양하라!(1-3절)
오늘 시인은 즐거워하라 찬송하라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즐거워하는 일, 노래하는 일, 감사하는 일, 기뻐하는 일
그건 우리가 원하는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그렇게 즐거워하며 노래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고 있습니까?
지난 한 주간의 삶은 어떠하였습니까?
지난 한 주간 얼마의 시간동안 기뻐했고
감사했고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오늘 시인은 시를 시작하면서 곧바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다른 아무 말이 없이 이렇게 곧바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고 할까요?
그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자라면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즐거울 때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박수를 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의인과 정직한 자가
누구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의인은 하나님께 나가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입니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의식하여 사는 자입니다.
여러분들은 의인이십니까?
여러분은 정직한 자입니까?
하나님께 나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용서함을 받아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는 의인입니다.
본인이 그런 자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자가 정직한 자입니다.
그런 자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즐거워해야 하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찬양해야 하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함을 받았다면
우리는 마땅히 즐거운 자로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이 어떤 좋은 일이 있어도
그 일보다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기뻐할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이
감사한 일이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송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더 하라고 합니까?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열줄 비파로 찬송하라고 합니다.
왜 수금과 비파로 노래하라고 할까요?
우리의 노래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악기 중의 최고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합니다.
물론 저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악기와 함께할 때
사람의 목소리를 훨씬 돋보입니다.
여러분도 느껴보지 않으셨나요?
노래하기가 훨씬 좋고 노래하기가 더 힘이 나고
노래가 훨씬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다윗의 시라고 쓰여 있지는 않지만
다윗의 시 일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다윗이었다고 한다면
비파를 탈 줄 알았던 다윗이었기에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알았기에
악기를 가지고 찬양할 때 느낌을 알기에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 중에 으뜸은
남이 만든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보다는
자기가 만든 노래를 자기가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 노래를 자신이 만들었기에 가장 느낌을 알고
그 아는 느낌을 가지고 부를 수 있기에
최고의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새 노래를 지어서 노래하라고 합니다.
옛날에 지은 노래가 아닌
새 노래를 지어서 노래하라고 합니다.
노래를 작곡하라고 합니다.
아니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악기를 다룬다고 노래가 쉽게 작곡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슨 말일까요?
새 노래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새 노래입니다.
누가 만든 노래도 아니고
전에 만든 노래도 아니고
지금 자신이 만든 노래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새 노래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노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것을 지금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을 지금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노래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찬송가에 있는 찬양을 부릅니다.
그 찬양은 누군가 받은 은혜를 가사를 만들고
그 가사에 곡조를 만들어 찬양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 만난 하나님을
그들은 글로 썼고 그 글에
곡조를 붙여 찬양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찬양도 좋습니다.
남이 경험한 찬양을 통해서
나도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찬양을 통해
나도 같은 은혜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새 노래는 내가 경험한 은혜입니다.
진정한 새 노래는 내가 경험한 하나님과 만남입니다.
그런 만남을 통해서 부르는 노래가 진정 새 노래입니다.
어제의 만난 하나님과
오늘의 만난 하나님이 같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늘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이라는 상황 속에서
오늘이라는 경험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다를 수 있으며 새로운 수 있습니다.
새 노래는 그럴 때 부르는 노래입니다.
교리적이나 성경에 있는
문자적으로 만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만나는 하나님을 통해서
경험한 것을 노래하는 것이 새로운 노래입니다.
부모님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고 그것을 넘어서
내가 새롭게 만난 하나님을 경험하여
부르는 노래가 새로운 노래입니다.
2.시인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4-9절)
4절에서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정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언제나 올바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모두 바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경험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올바르고 바르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더 나가 하나님이 행하심이
언제나 신실하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오늘 시인은 그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실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신실하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고백합니까?
그 반대는 아닙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행한 일이 있는데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뭘 하시기에
나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느냐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시인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즐거워하는 바는
사랑과 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온 땅을 덮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하늘이 세워지고
그분의 숨결로 만물이 생겨났다고 고백합니다.
바닷물을 간직하고
깊은 연못 곡간에 가둬두신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능력자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모든 것을 조절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놀라워하고 우리가 감당할 없는 세계의 모든 것을
말씀으로 조절하고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알고 그런 하나님을 만났기에
시인은 찬양하며 즐거워하며
새 노래를 지어 여러 악기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가진 자라면 어찌 그런 분을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새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아는 자는 주님을 경외할 것이며
그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3.폐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10-17절)
세상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나라와 권세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세상 나라들의 품은 뜻을 흩으시고,
세상 민족들의 계획을 무효로 돌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품은 뜻은 흔들리지 않으며
하나님 마음의 품은 뜻은 대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만이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시고 그의 소유됨을 알아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이고 복된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늘에서 굽어보십니다.
하늘에서 굽어보신다고 하는 것은
어디서나 굽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삶을 낱낱이 살펴보십니다.
우리의 영과 마음을 지으셨기에
그 지으신 뜻대로 행동을 잘하고 있는지 보십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쓸 때는
만든 이의 뜻대로 사용해야 바르게 사용하게 됩니다.
우리의 영과 마음을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영과 마음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숫자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기가 많으면 대통령이 되고
숫자가 많으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군사가 많은 임금이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단한 힘을 가진 용사라고
제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지 못합니다.
불레렛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골리앗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큰 소리치고
대단한 힘을 자랑했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오만하였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린 소년의 작은 돌에 맞아
쓰러져 죽고 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것은 무엇입니까?
군사를 많이 가진 임금입니까?
괴력을 가진 장군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할 대상은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4.은혜의 단비에 젖으리라(18-22절)
그것을 깨달은 시인이 결단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눈길은 경건한 이에게 온전히 머무십니다.
여호와는 그 하나님께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이를 살펴보십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소중히 나를 받드는 자에게 어찌 머물지 않겠으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이를 살펴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이 은혜의 단비
곧 자신에게 머무시는 하나님
자신을 사랑으로 살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에 젖어 살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푸근하고 따뜻하고 즐거운 일입니까?
죽을 것 같은 어려움에도 건져 주시고
굶주림 속에서도 살려 주시는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은 주님만 간절히 바랍니다.
자신의 굶주림과 두려움에서 방패가 되어 주시는
주님만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니 무엇이 즐거움이겠습니까?
세상 향락입니까?
그것은 잠시면 사라질 것입니다.
세상 돈입니까?
그것도 역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머물러 주시고
나를 보살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는데
우리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오직 즐거움으로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오직 그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사는 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마지막 소원을 아뢰고 있습니다.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렇게 잊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고 살겠으니
나를 보시고 하나님의 끝이 없는 그 은혜를
자신에게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 이외 무엇을 우리가 구하여야 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이라고 하면 분명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믿는 이라고 하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즐거워 노래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노래는 언제나 새 노래이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부르는 찬양이 아닌
타성에 젖어 부르는 찬양이 아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계가 뻔하고 어리석은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맛본다는 것 자체가
언제나 놀랍고 신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뻔히 아는 하나님,
인간의 생각과 경험 안에서
파악되는 하나님이라면 얼마나 조악하며
그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이겠습니까?
하지만 유한한 인생에게 하나님은
날마다 새로운 분이시며 놀라운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께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그저 아! 하고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상상할 수 없는
말로 하나님께 탄성을 지르고 노래를 하게 됩니다.
그러한 자가 입을 열어 찬미한다면
늘 새로운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은혜에 젖어 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