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풍속도
십일월 마지막 주 토요일이었다. 예식장에 걸음할 일이 있어 운동을 겸해 상남동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집을 나서 용지호수를 둘러 시청광장으로 향했다. 겨울 들머리 용지호숫가 벚나무는 나목이었다. 잔잔한 호수는 고요와 침잠의 세계 그대로였다. 호수 가장자리 자라던 부들과 연꽃은 시들어 생기를 잃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물닭 한 마리가 꽁지를 치켜세우고 잠수하고 있었다.
주말을 맞아 산책 나온 노인네는 벤치에 앉아 볕살을 쬐고 있었다. 거위 가족은 수면 수생식물을 키우는 부표 위에서 젖은 깃을 말렸다. 호수 가운데선 몇 가닥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도청 뒤를 병풍처럼 둘러친 정병산은 스카이라인과 닿았다. 연이은 날개봉과 비음산의 청청한 소나무와 갈색 참나무는 혼효림으로 색상이 뚜렷하게 대비되었다. 가을은 깊어 겨울의 문턱을 넘었다..
성산아트홀 근처 은행나무는 샛노란 잎이 거의 떨어져 내렸다. 단풍나무는 시든 잎을 그대로 달고 있었다. 중앙동 거리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는 낙엽이 져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예식장에 닿아 혼주인 친구와 인사를 나누었다. 혼주는 초등학교 여자동기생이다. 고향 아랫마을에 사는 친구는 나랑 성이 같고 항렬도 같다. 결혼을 하는 친구의 아들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한단다.
초등학교 친구가 새 식구로 맞이하는 며느리는 인천의 세무서에 근무하고 사돈댁은 창원과 멀리 떨어진 강원도 고성이란다. 아마 신부측 하객들은 예식에 참석하려고 새벽부터 먼 길을 달려왔지 싶다. 친구 자제 혼사에 초등학교 동기생들이 하객으로 다수 참석했다. 고향 의령에서도 오고 부산에 사는 친구들도 나타났다. 같은 창원과 마산에 사는 친구들과 모이니 스무 명 넘었다.
우리는 예식이 끝나갈 무렵 늦은 점심 자리를 정했다. 친구들은 뷔페에 익숙하지 않아 횟집을 찾아 나섰다. 가까운 상남동에도 여러 식당이 있었다만 대방동 아파트단지 지하상가로 이동했다. 그쪽에 사는 친구가 추천한 횟집이었는데 너른 자리를 우리가 다 차지했다. 갑작스레 손님이 닥치자 주인은 손길이 바빴다. 친구들은 회가 나오기 전 밑반찬만으로도 소주를 몇 순배 들었다.
나이 오십 중반에 이른 초등학교 남녀동기생들이다보니 서로는 잘 아는 사이다. 우리들 사이에 별도 검증이 필요하지 않다. 추석 쇠고 다녀온 북악산 등반행사를 비롯해 여러 이야깃거리가 나왔다. 뭐니 해도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는 친구가 펼친 형이하학적 육담이 단연 압권이었다. 일반적 기준으론 성희롱에 해당할만한 소재가 부담스럽거나 어색하지 않는 사이가 초등학교 친구다.
소주잔이 한창 비워지는 중간에 자리를 먼저 떠야할 친구가 생겼다. 고향에서 비닐하우스시설 특용작물을 키우는 친구였다. 이 친구는 멜론을 키운다는데 해가 저물기 전에 보온을 위한 거적을 덮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멜론 수확이 끝나면 그 터에 수박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수박농사를 아주 잘 지어 고향에선 농사전문가로 알려진 친구로 수박축제 행사 때면 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고향 친구가 일어나도 나머지 여러 친구들은 세상 사는 얘기를 한동안 더 나누었다. 낮이 짧아져가고 있었다만 해는 아직 몇 뼘 남아 있었다. 부산 친구들이 먼저 일어나야 할 텐데 이차 자리까지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한 친구가 상가를 둘러보고 노래연습장을 정해 놓고 돌아왔다. 횟집을 나온 일행들 노래연습장으로 옮겨갔다. 누가 먼저다 할 것 없이 마이크를 잡고 춤을 추었다.
나는 기회를 엿보아 같은 아파트단지 사는 친구와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우리는 집 앞 상가에서 한 자리 더 앉았다. 호래기 안주를 놓고 소주를 몇 순배 더 나누었다. 우리 지역에선 호래기라 하지만 표준어는 꼴뚜기다. 제철을 맞은 호래기는 신선했다. 다른 친구들은 노래연습장에서 흥에 겨울 때 둘은 마주앉아 잔을 비우며 검박하고 순리대로 살자고 다짐했다. 날이 어둑해져갔다. 12.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