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을 돌아보며.....
나는 1983년 7월20일 왕십리의 어디선가 태어났다.(다 어릴적이니 교통사고 전과 후의 기억이외에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귀 동냥으로 들었다)나의 이름은 崔永최영이다.
나의 어릴적 가족과의 유일한 기억은 단칸의 좁은 방에서 벽걸이형 전화기하나 들여놓고 또 청색트럭 장난감에 기와집 부자집같은 단칸 셋방에서 누나,나,엄마,아빠 같이 살았던 기억뿐이다. 또한 주인집 아들이 형이있었는데 나는 장난감 게임기를 부러워했다.
그리고 집앞에는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는 양갱을 사주셨다.
그외에는 친할머니댁 기억이다. 그리고 고모댁 기억.....
친할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 부터 키워주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현재 와서 많이 헷갈린다.
어머니는 배다른 어머니(1961.6.24 이미희)시고 내 친어머니는 누구인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배 다른 어머니 말로는 처녀로 시집왔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자 오기가 발동해서 결혼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이 둘을 가졌었으나 누나와 나만 키우면 된다는 생각에 아이 둘을 지웠다고 한다. 친할머니와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얘도 못낳는 년이...."라는 소리를 누나를 통해 들었다 한다.
못낳는 것이 아니라 지웠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어머니는 친할머니쪽에 가져다 주기만하고 외가쪽에서는 가져오기만해서 늘 미안했다 한다.
내 어린시절 엄마와의 기억은 양갱하나뿐이다. 아무것도없다.
친할머니는 나와 거의 같이 다녔다.
과수원밭과 결혼식장 또는 할머니 친구나 친척 또는 할머니의 재봉틀하는 일하는 곳까지 갔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양갱과 사탕, 요구르트를 항상 챙겨오셨다. 농구공이 마당에 세내개로 낡은 공이 가득했다. 친할머니집은 답십리다. 명절이 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슨 친척이 많은지 손님이 북적북적했던 기억이 난다. 잠자리도 잡아다 실로 꿰고 사촌형들과 지우개 따먹기도하고 큰아버지 오토바이타고 먼 산골에 갔었다. 거기서 금은동 메달 초콜릿을 유난 좋아했다. 개당 50원 짜리 였다.
당시는 오락실이 50짜리다. 거기서 밤도 구워먹고 밤을 때로 모여서 털고 따는 것을 구경했다.
한 겨울인가 봄인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그 산골에 있던 할머니의 언니일지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사람이 죽는걸 보게 되었다. 천인가 흰종인가 뭘로 싸고 관에 넣어 산소만드는 것까지 보게 되엇다. 노래도 으어으어우~하는 승천 카세트 테이프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가끔 이 꿈을 꿔도 어디가서 꿨다고 함부로 말 못한다. 말하면 그 사람은 사망한다.(믿거나 말거나 무섭다)
할머니가 막걸리에 밥말아주었다.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맛이다.
6살 적에 고모댁 신발 장사하는 곳에 갔다. 고모는 차표와 아이스크림 장사도 했다. 난 신발도 좋았지만 아이스크림은 무지하게 좋아했다. 거의 천국이었다. 아이스크림 천국....
하지만 기쁨도 잠시 동네 친구와 쉽게 친해졌는데 공을차고 놀았다. 네개의 차가다니는 넓은 길이었다. 거기서 한번 왕복무사히하고 두번 왕복 하고 다시 반복하는 찰나 버스에 치여 날아갔다.
귀동냥 말로는 온몸의 뼈가 부서져서 기적적으로 죽었다 살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는 청각이 왼쪽 청각이 거의 죽었다.
할머니와 고모가 얼른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어머니는 싫어한다.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래도 할머니가 좋다 내 잘못일 뿐이니까.
여덟살 학교 입학할 적에 경기도 고양시 벽제읍으로 이사를 왔다 역시 세를 든 좀 큰 집이었다.
아직도 거기에 가면 세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개천 너머에는 펌프기가 있었다. 지금은 물이 엄청 세져서 아예 담을 쌓아버렸다.
집에 와서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글을 한달만에 뗐다. 오기가 생긴 어머니는 더욱더 재촉했다. 공부할 것을..... 하지만 나는 공부하길 싫어했다.
누나는 도둑질도 하고 또 누나가 첫 저금인 백원을 가지고 가자 나는 더 이상 저축이 의미가 없음을 알고 방어적이 되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디론가 갔다. 누나는 밤는게 달이 뜨도록 올줄 몰랐다. 나는 연탄불에 라면을 불려 끓여 먹었다. 스프맛만 나고 면은 찬물에 풀린듯 딱딱하고 그 때 생각하면 눈물난다. 누나가 학교에 먼저가면 늘 사방에 이상한 그림자들이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학교에 갔다. 난 남보다 엄청느린 성장기를 거쳤다. 당시 공부는 못해도 받아쓰기는 백점이었다.
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다. 어머니는 화를 내셨다. 그다음 어려운 친구집에 갔다. 하루밤 잔 모양이다. 동네가 난리가 났다. 그다음 부터 밖에 나가서 노는 걸 유난 좋아했다. 나중에는 도를 넘어서 가출까지했다. 9살 적인듯하다. 고양시 고양동으로 이사했다. 유난 사고를 좀 낳이 쳤다. 학교에서도 문제아였다. 가출은 계속 되었다. 11살 금촌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난 완전히 갇혀 살았다. 학교는 못가보고 늘 아파서라고 어머니는 핑계되었다. 난 문이 거꾸로 잠긴 방에 갇혔다. 이유식통이 요강이었고 늘 반찬은 점심것만 주고 갔다. 기억에 남는 것은 작은 이모 결혼식날 갇아두고 밤는게 왔다. 난 아침부터 울다 잠이 들었다. 탈출하려고 했지만 능력밖이었다. 방충망이라도 찢어 종이 비행기를 날리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다 1994.3월경 가출했다.
그리고 경찰서에가서 어머니가 말한대로 거짓말했다.
어느 복지기관에 가서 난 학교를 다니며 갑자기 각성했다.
한문제도 못 풀던 내가 금새 90점대에 올라선 것은 놀라울 정도였다.
수녀님과의 첫 만남이었고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 것이다.
친구들과 싸우기도 하고 친하기도 했다. 나름 행복한 국민학교였다.
부산으로 중학교를 옮겼다. 마라톤도 뛰고 친구들과 여러 추억도 만들었다.
고1쯤( 나는 1년 늦게 들어갔다. 즉 나이에 비해 한 학년이 늦었다)
당시2000년도 여름 집에 들렀다. 고양시 파주시로 어느새 이사했다.
주민증 떼었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1년을 마치는 사이 수녀님과 마찰이 있었다. 농아원으로 가느냐 집으로가느냐의 마찰이었다. 아니면 글쓰며 혼자 사느냐였다. 난 글을 잘 못썼다. 단지 얘들을 잘 쓰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모르는 듯 했다.
아버지가 부산으로 내려와 파주 집으로 데려갔다. 이렇게 나의 고2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갔다. 인테리어 목공이라는 생뚱맞은 일부터 시작했다.
내 전공은 전자기계 고등학교였엇다. 때문에 처음부터 나는 이일 싫다고 했다.
그러나 왠걸 질질 끌려다녔다. 일을해도 돈은 나오지 않고 날 새는 일이 유독 많았다. 또는 밤는게 11시 넘게 하고 다음날 새벽5시에 다시 지방으로 가는 일이 흔했다. 이런게 반복되엇다. (최근 까지 일억원 이상 못 받았다. 갚은 것은 한 5억은 된다하니 엄청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집은 신용불량자로 내가 보증까지 섰다. 현대카드와 삼성카드였다.
또 나도 모르는 사이 어머니는 사채로 막았다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2002년부터 빛더미로 지금까지도 빛 갚으며 고생한다.
난 겨울을 싫어한다.코는 얼고 발은 땡땡 얼고 손은 얼어서 숟가락도 잡기 힘들었다. 현장은 한겨울 공사장이라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일했다. 죽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몇번있기는 했지만 집이 싫었다. 나의 감정 기복이 점차 나도 모르게 되었다. 이젠 지쳣다.
2008년1월 나는 슬슬 집에서 나가야 함을 느꼈다.
이제 슬슬 힘든 삶에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벌써 몇년 째 돈도 안받고 핸드폰도 없고 뭐 남들 다가진 자유도 한 번 누려보지 못했다. 연애도 못해보고 여행도 못가보고 맘껏 해본게 아무것도 없다. 겨울에는 나무를 자르고 불을 넣고 물을 넣고 강아지 밥주고 여름에는 밭갈고 늘 바깥일하러 늘 다니고 집에 있으면 어머니의 구박이 있고 나는 하루하루가 시련이다. 난 늘 아버지 밑에서 끌려다니고 집안일 해야하는 노예였다. 그러면서도 늘 내가 혼자서 살때를 위해서란다. 지금 당신들 꼴을 보라 누군가에게 충고할 때가 아니지 않는가? 단지 실패했다고 하는 삶을 다르게 생각흔 판단착오라고 보고싶다.
사주를 보며 내 삶을 위로했지만 이상하게 사주에서의 운명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포괄적으론 맞아도 조금 세세히는 맞지 않는다.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