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 김승진 (옮긴이) (생각의힘, 2020)
6장 뜨거운 지구
기후변화가 인간의 활동으로 유발되었고,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이라는 점은 이제 과학계에서 압도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2015년 파리 협약에서 기후변화를 2도 이내 상승에 막는다는 목표를 정했고, 더 야심차게는 1.5도 목표를 염두에 두기로 했다. 온난화를 2도 상승에서 막으려면 온실가스 배출이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25% 줄여야 하고 2070년에는 제로가 되어야 한다고 추산했다. 1.5도 상승에서 막으려면 2030년까지 45%를 줄여야 하고 2050년까지 제로가 되어야 한다.
온실가스는 대부분 부유한 나라에서 나오거나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소비하는 물건을 생산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기후변화 비용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가장 크게 부담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cf.<프로메테우스의 금속> 기욤 피트롱(갈라파고스, 2021))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적절한 기술에 더 접할 수 있게 되면 기후 위기의 충격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미국에서 폭염이 사망률에 미친 영향이 현재보다 6배 높았던 것으로 추산. 이 차이는 더 많은 사람이 에어컨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으로 거의 설명된다. 에어컨은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더워진 기후에 적응하는 데 사용한 핵심 메커니즘이다. 이 때문에 더운 해에는 부유한 나라에서 에너지 수용가 급증한다. 에어컨 사용이 흔치 않은 가난한 나라들에서는(2011년 미국 가구 에어컨 소유 87%, 인도는 5%) 기온이 오를 때 생산성이 크게 낮아지고 사망률이 크게 오른다.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해지면 에어컨이 더 많이 보급될 수 있을 것이다. 1995년과 2009년 사이 중국 도시 가구 중 에어컨이 있는 가구의 비중이 8%에서 100%로 올랐다. 문제는 에어컨이 기후 위기 자체를 악화시키는 것. 에어컨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수소화불화탄소(HFC)는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강력한 온실가스다. 사람들을 기후변화의 영향에서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그 기술이 기후변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에너지 전문가들은 재생 가능 에너지원(태양과 바람)이 너무 비싸서 화석연료의 대체 에너지원이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투자하는 것은 매우 멍청한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현재 재생 가능 에너지원의 가격이 훨씬 더 싸졌다.
에너지 기술과 경제 구조의 변화를 통해, 소득 성장에서 유발되는 온실가스 배출량의 규모를 줄일 수 있다. 강력하고 의식적인 정책적 선택이 있다면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에서 경제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기후를 안정화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탈탄소화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돈이 든다. 전 세계 GDP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비용.
낙관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공짜 점심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한다. 연구개발로 청정 기술 가격이 낮아지면 기업에도 사람들에게도 청정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비용상 이득이 된다. 그렇다면 청정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개인과 자국에 윈-윈이 될 수 있다. 공짜 점심이 가능하리라는 전망은 언제나 유혹적이다. 너무 유혹적인 나머지, 이것이 기후변화 담론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공짜 점심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은 기술을 통해 배출을 저감하는 것으로 공짜 점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사람들의 소비가 줄어야 한다. 단지 더 청정한 자동차를 타는 것만이 아니라, 더 작은 자동차를 타거나 자동차 없이 사는 삶에도 만족해야 한다.
사람들이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은 경제학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선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소비를 후생의 척도로 삼는 버릇이 있다. 둘째,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의 행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의심스럽게 본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선호를 ‘조작’하는 것에 대해 철학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거부감은, 선호는 내재적이고 ‘진정한’ 것이며 그에 따른 사람들의 행위는 그들의 깊은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는 오랜 믿음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행동을 바꾸도록(소비를 줄이거나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도록) 설득하고 확신시키는 것은 그들의 내재적인 선호 체계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일관성 있는 ‘선호 체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모르는데, 기후 변화에 대해 사람들이 명백한 선호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근거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나 아주 멀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희생하지는 않는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는 이 가정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사실 경제학자 본인들도 그렇다.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사안에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는다. 그것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기 어려운데도 말이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이 점을 고려하면 ‘정책적 개입’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잘 규정된 선호 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이상적인 정책은 환경 피해에 가격을 붙인 후 그다음은 시장에 맡기는 것이다. 탄소세가 이러한 접근 방식에 해당한다. 오염에 명시적으로 가격표를 붙이면 기업은 자신의 활동에서 그것을 진지하게 계산에 넣게 될 것이다.
하지만 탄소배출권을 넘어서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데도 탄탄한 논거가 존재한다. 기후변화와 싸우는 데 일조하고자 하는 마음은 강하지만, LED 전구에 대해 알지 못해서, LED 전구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부가 LED가 아닌 전구를 아예 금지하면 더 좋지 않을까? 금지가 너무 심한 조치라면, 사람들이 환경에 더 좋은 쪽을 선택하도록 정부가 쿡 찔러주는 ‘넛지’ 전략을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오늘날 몇몇 경제학자들은 우리의 선호에 습관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소비하면서 자랐는지는 현재 우리가 가진 소비 취향을 구성한다. 습관은 그것을 바꾸고자 할 때 단기적으로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미래의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 행동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7장 자동 피아노
노동자의 해고를 어렵게 하거나 일부 영역에서 로봇 도입을 금지하는 것 외에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생각하는 대안은 로봇 사용에 세금을 물리는 것이다. 로봇세는 현재 매우 진지하게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주제다. 빌 게이츠가 이런 종류의 세금을 주장하고 있고, 2017년에는 유럽의회에서도 로봇세 안이 논의되었다. 유럽의회에서는 로봇세가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부결되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한국은 기업이 자동화에 투자할 때 제공되던 조세 혜택을 줄이는 방향으로 로봇세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레이건과 대처의 정책이 불평등 증가의 주된 이유라는 평가 또한 따져 보지 않고 받아들여도 될 만큼 꼭 그렇게 명백한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 실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진단과 정책적 함의는 경제학계에서 아직 명확한 결론 없이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주제이다. 토마 피케티 같은 사람들은 전적으로 당시의 정책 변화 탓을 돌리지만 다른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기술 변화를 포함한 경제의 구조적인 전환을 더 강조한다.
세계화와 IT산업의 부상이 경제의 경직성과 결합해서 좋은 기업과 나쁜 기업의 위계가 존재하는 세계를 만들었고, 이는 불평등 증가에 기여했다. 이렇게 보면, 불평등 증가는 안타까운 일이기는 했어도 멈출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승자 독식 논리도 불평등 증가를 설명하기에 여전히 불충분하다. 한 가지 답은 금융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은 투자 은행, 정크 본드, 헤지 펀드, 모기지 담보부 증권, 민간 에쿼티 펀드, 퀀트 등 하이엔드쪽 금융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다. 하이엔드 금융은 최근에 천문학적 수익이 발생한 영역이기도 하다.
경제적 효율성의 관점에서만 보면, 실증 근거들이 말해주는 바는 매우 높은 최고한계세율을 포함해서 굉장히 누진적인 조세 정책을 실시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유권자의 51%가 소득이 1,000만 달러 이상인 사람에게 한계 세율을 70%로 올리자는 안을 지지한다.
레이건-대처 혁명의 뿌리에 있는 성장 집착증, 그리고 그 이후의 어떤 대통령도 그런 성장주의를 완화하기 위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것은 영구적 피해를 야기했다. 경제 성장의 이득은 대체로 소수의 지배층에게로만 들어가면서 성장은 사회의 번영이 아니라 사회적 재앙을 낳는 기제가 되었다.
우리 사회가 이 극심한 불평등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지금 당장 펴지 않는다면,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다루어 나갈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영구히 훼손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