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급서... 극심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의 비극
이완용 윤덕영 안상호 궁녀 등등 독살설의 밝혀지지 않은 물증이나 진위 여부를 떠나, 당시 고종이 처해 있던 상황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수치였으며, 한계치를 이미 아득히 넘어선 상태였습니다.
누적된 극한의 화병과 심적 붕괴: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잃은 남편의 트라우마부터 시작해 대한제국 황제자리에서 일본에 의한 강제 퇴위, 1910년 망국의 치욕, 그리고 아끼던 아들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게 된 일, 덕수궁이라는 '화려한 감옥'에 갇혀 사방이 일제 헌병과 밀정으로 둘러싸인 10여 년의 세월 동안 고종의 속은 이미 새까맣게 타들어 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역린을 건드린 정략결혼:
그 와중에 고종이 가장 아끼던 핏줄이자 황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어린 영친왕이 일본에 끌려간지 10년 뒤 1919년 1월 13일 귀국해서 일본 육군 군복을 입은 채, 원치도 않는 일본 황족과의 정략결혼식장으로떠나야 했습니다 (1월 25일 결혼식 예정) . 이는 군주로서의 자존심뿐 아니라 한 아버지로서의 영혼마저 짓밟는 최악의 능욕이었습니다.
폭발해 버린 뇌관:
함녕전 의자에서 휘청거리며 피눈물로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 비통한 하직과 강요된 혼례식 날짜의 카운트다운은, 이미 극에 달해 있던 황제의 울화와 혈압을 단숨에 터뜨린 결정적 도화선이었습니다.
일제가 '지병으로 인한 급사'라며 자신들의 책임을 털어내려 했지만, 설령 독약이 든 식혜가 아니었더라도 일제가 가한 잔인한 심리적 압박과 영친왕과의 생이별이 늙은 황제의 숨통을 끊어놓은 셈입니다. 간접적 살인이자 심리적 타살이나 다름없었던 비극이었습니다.
1월 21일 사망을 28시간이나 지연후에 22일 사망으로 발표한 이유는 중요인물들이 영친왕의 결혼식에 참가하러 일본에 가느라 궁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결혼식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고종의 사망으로 국상이 끝난 뒤에 열기로 미루었습니다만 ... , 아래는 미루었던 일본에서의 영친왕 결혼식장에 갔던 인물들입니다. 이완용, 순종의 장인 윤택영, 송병준, 이윤용, 엄비의 오빠 엄준원, 조카 엄주익 등등등 ........
첫댓글 게다가 당시 코로나19 .... 아니 스페인독감18에 걸린 조선사람이 700만 명, 그중에 사망자가 15만 명 가깝던 위험한 환경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