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장롱
노병철
최달천 수필가 선생님 글 중 ‘40년간 같이 지내준 자개장롱’이란 글이 있다. 처음으로 집을 산 후 가보 1호는 자개장롱이라고 글이 시작한다. 시간 날 때마다 들기름 묻힌 수건으로 십장생 자재가 바랄까 싶어 열심히 닦았다고 이야기한다. 그 후 자개장롱이 그 수명을 다해 떠나보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던 마음을 절절히 표현한다. 자개장롱이 안방을 떠나면 모든 것이 다 자신을 떠나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면서 보내는 날에 몇 번이고 장롱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였다며 그 절절한 마음을 표현한다.
언젠가 곽명옥 선생님 가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가게 앞에 아직 쓸만한 자개농이 나와 있었다. 아직 안방을 지켜야 할 멋진 자개농이 거리에 먼지를 덮어쓰고 있으니 의아한 일이라 물었더니 이사를 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이별한다면서 장롱에 대한 아쉬움을 연신 토로한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최달천 선생님과 똑같았다. 처음 집에 들어오는 날 너무 좋아서 밤에 잠도 안 자고 장롱을 닦고 또 닦았단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하지만 지금 이별을 앞두고 장롱을 쳐다보는 곽 선생님의 눈엔 그동안의 추억이 너무 많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집에도 언제쯤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자개장롱이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집 형편에 비싼 자개장롱을 샀을 리는 없을 터인데 제법 안방의 품격을 지켜주고 있었다. 당시 자개농을 열심히 닦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장롱 안에서 이불을 펴고 개고 했고 화장대에서 화장하시면서 평생을 그 장롱과 함께하셨다. 이제 그 장롱은 안방에 없다. 최달천 선생님께서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자개장롱을 치우셨고 곽명옥 선생님도 이사하면서 굳이 추억을 너무도 많이 가진 그 자개농을 옮길 엄두가 나지 않으셨듯이 나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참 뒤에 그 안방을 내가 차지하고부터 자개농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딸이 시집가면 맨 먼저 장롱을 해주면 풍습이 있었다. 언제부터 장롱이 혼수 제1호 품목으로 자리 잡아 농이 비쌀수록 장가 잘 간다는 소리를 듣게 되기에 딸 가진 집에선 무리해서라도 농 하나는 제대로 갖춰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난 처가에서 장롱을 받지 못하고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장인어른은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궁합을 보니 귀하디귀한 딸이 삼 년을 못 넘기고 죽는 궁합이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어찌어찌하여 결혼 허락을 받아내고 날도 잡았으나 집안 살림을 해 줄 생각을 안 하셨다. 우리 집에서도 장남이란 놈이 장모 없는 집에 장가가는 내가 못마땅해하는 차라 무슨 말도 꺼내지 못하는 이상한 형국이 되고 말았다.
미안했던지 ‘경상도에선 장롱은 남자 쪽에서 한다’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정당화시키려는 처삼촌이 더 원망스러웠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은행에 대출을 내어 집도 얻고 장롱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살림살이를 내가 모두 장만한 뒤에 우리 부모님께는 처가에서 해줬다고 했고 집사람에게는 부모님이 해줬다고 구라 쳤다. 한 일 년 뒤에 집사람에게 들켜 거의 이혼까지 갈 뻔한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그때 이미 큰딸이 기고 있을 때라 어찌하지 못하고 잘 봉합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직 모르신다. 돌아가실 때까지 비밀로 할 참이다.
큰딸이 시집을 가는데 혼수 1호가 없다. 자개농을 지네들 집에 하나 들여다 주고 큰소리 좀 치려고 했건만, 요즘 장롱을 해가는 세상이 아닌 모양이다. 넌지시 물었더니 붙박이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단다. 이불이나 베개는 어디 두냐고 묻는 순간 난 이미 웃긴 인간이 되고 말았다. 집사람은 밥상도 준비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침대가 생기고 식탁이 생긴 지가 언제인데 나의 고루한 생각은 연신 자개농을 열심히 닦고 있다.
첫댓글
따님 혼인 날짜 잡히면 재깍 공지하세요.
9대 임원진 떼를 지어 몰려갑니다!
딸 시집 보내고 아쉬워할 선생님의 이탄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ㅎ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ㅎ 웃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