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성 추문 입막음 건이 유죄 판결을 냈고, 최태원 노소영 이혼 사건에 위자료를 1조 3천억 지급 하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어떤 또라이가 강남 한복판에서 아내와 딸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고 60대 범인이 잡혔대요. 이 미친놈을 어쩔까요? 야쿠자의 나라 일본에서 택시기사가 권총을에맞아 중태,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장악하고 구호물자를 막는 바람에 영유아 85% 한 끼를 못 먹고 죽어간다고 합니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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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2500k를 달리는 전기 배터리가 출시 되었고 북한에서 정은이가 GPS 전파 교란 장난을 친다고 속보가 떴어요. 어느 것도 역대급이 아닌 게 없지만 필자는 최태원 노소영 1조 3천억원을 현금 배상하라는 것을 가장 역대급으로 봅니다.Why? C 회장이 용띠 갑장이고 이혼남이어서 동병상련인가? 필시 내 욕망이 발동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나 지금 친구를 질투하는 거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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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needs)와 욕망(desire or want)의 차이를 아시나요? 욕구는 뭔가 결핍이 생긴 상태를 의미하는 본능이라면 욕망은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갈구하는 욕망의 상태를 말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픈 것은 욕구의 상태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겠지요. 종종 나는 돌솥밥이나 고기를 욕망해요. 이들 선택지 중 한 가지를 택해서 욕구를 충족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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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배고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돌솥밥의 효용과 고기의 효용을 비교해서 고기를 선택했다면 이 고기는 내 배고픔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최적의 욕망입니다. 고기를 먹으면 나의 욕망(want)은 실현되고 욕구(needs)는 해소됩니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needs)를 다섯 단계로 분류했어요. 먹고, 입고, 성욕을 느끼는 생존의 욕구, 이런 것들을 안정적으로 받는 안정의 욕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관계의 욕구,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존경의 욕구, 자신이 차별적 존재임을 실현해 보고 싶은 자기실현의 욕구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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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슬로우는 다섯 가지를 그냥 위계로 분류했지만 사실 이 다섯 가지 욕구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입니다. 이 다섯 가지 욕구 중 생존과 안정의 욕구는 결핍의 욕구이고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는 생성의 욕구입니다. '관계'의 욕구는 결핍의 욕구이기도 하고 생성의 욕구이기도 하지요. 결핍의 욕구는 결핍이 생기면 이에 반응하는 욕구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 결핍이 생기고 대부분은 이 결핍에 본능적으로 반응해요. 배가 고프지 않기 위해서 미리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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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배가 고프다는 결핍이 선행하면 음식을 섭취합니다. 안정에 대한 욕구도 마찬가지예요. 안정된 상태가 깨지면 사람들은 이것에 대한 결핍을 느끼고 이것을 복구하기 위해 입니다. 보험이라는 상품은 이런 인간의 안정에 대한 결핍의 욕구를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생성의 욕구로 바꾸어서 상품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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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고 싶은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연적으로 결핍의 상태가 생기지 않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핍의 상태를 만들어내야 욕구가 생기는 생성의 욕구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이것들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욕구보다는 차라리 욕망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존경받는 상태에 대해서나 자아실현에 대해 목표를 세우고 현재 상태와 갭을 주체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때 욕구로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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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는 상태나 자아를 실현하는 상태가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는 않아요. 현재 상태를 초월해 나의 경계를 확장해 보려는 의도가 생성의 욕구를 만들 것입니다.. 배고플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있어도 존경이 깨질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요. 생성의 욕구는 나를 초월한 새로운 목표 세움과 이를 위한 다양한 대안의 선택이 있어야만 욕구로 작동해요. 생성의 욕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더 나은 새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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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성의 욕구는 생성의 욕구이기도 결핍의 욕구이기도 하지요. 오랫동안 친구를 못 만나면 보고 싶어집니다. 자연스럽고 기계적인 결핍의 상태이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과 교류하기 위해서 네트워크를 확대해가기도 한 대, 이는 생성의 욕구에 반응하는 행동입니다. 내가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존경받고 싶어 하는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는 생성의 욕구여서 자신이 목표지점을 명확히 설정하여 현재 상태와의 갭을 창출하고 이 갭을 줄이는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생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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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의 욕구는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방식으로는 채울 수 없고 감을 열망한다면 감나무에 올라가는 수고를 감내해야 채울 수 있는 욕구입니다. 존경받는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는 모두 자신의 존재 차별성을 증명함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욕구입니다. 나로 인해 세상이 더 좋아지는 것을 목격하고 싶어 하는 삶의 존재 이유에 대한 욕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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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욕구와 안정의 욕구를 자제해가며 아낀 재산을 후세에게 유산으로 남길 수도 있지만 존경받으며 자아를 실제로 실현하는 삶에 모범을 보인 기억을 더 큰 유산으로 남길 수도 있다고 봅니다. 심지어 들뢰즈는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규정해 욕구와 욕망 사이의 연결을 시도했지요. 생존의 욕구나 안정의 욕구처럼 존경의 욕구나 자아실현의 욕구를 기계적 일상처럼 반복하는 삶을 통해 더 나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음을 주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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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헤겔의 차이가 부정성이라면 들레즈의 차이는 긍정이며 차이는 반복에 거주합니다. 일상에서 이런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을 몸소 느끼는 상태를 근원적 체험(deep experience)이라고 부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근원적 체험을 행복의 원천(eudemonia)이라고 본 거고. '차이를 무시한 동일성은 폭력이다' 후~Delez is driving me crazy!
2024.5.31.FRI 악동